아마도 내가 아는 작고, 또 작은 영화. 보니 핑크의 2002년 곡 'under the sun'과 함께 흘러가는 '란도리'는 그야말로 노래 한 곡 만큼의 영화인지 모른다. 어릴적 사고를 당해 어딘가 굼뜨고 어리숙한 주인공 테루오, 하지만 모두가 테루라 부르는 쿠보즈카 요스케가 스물 여섯의 나이로 10대 소년같은 걸음을 걷는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시골 마을 코인 란도리 앞에서 '망'을 보는 테루오와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별 거 아닌 하루와 하루. 몇 번의 결혼식 장면을 제외하면 등장하는 사람 수도 극히 작고, 또 작다. 자기 소개를 하는 듯한 테루오의 말로 시작해 영화는 테루가 바라본 사람, 거리, 하늘, 그리고 아마 그만 느끼고 감각했을 사소함으로 채워지고, 그만큼 작고도 작은 우주가 탄생한다. 영화의 캐치 카피였던 '이런 걸 지구에서는 '사랑(愛)'라고 해. 우주에서는 잘 모르지만'과 같은 순수함의, 테루를 태워준 트럭 운전사 말 속 '내가 상냥한 거라고 착각하면 안돼요. 그냥 너가 조금 마음에 들었을 뿐'과 같이, 조심스러움의 영화가 느린 걸음을 걷는다. 자극히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알고도 무심코 지나칠 것 같은 기억들에 영화는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늦은 밤 세상이 잠깐 빛을 내는 시간이 있다면, 그건 아마 테루의 '란도리', 쿠보즈카 요스케의 '테루'라고 생각했다.
2001년 모리 쥰이치가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란도리'엔 연상되는 유사 작품이 여럿 있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초기작이거나 그녀가 종종 비교되곤 하는 아키 카위스마키의 영화들. 실제로 오기가미의 '바바 요시노'나, '안경'같은 작품의 영화적 출발은 결코 '란도리'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최소한의 구성으로 가장 최소의 인원으로 가장 최소의 이야기를 지어가는 영화들. 소위 '힐링의 영화'라 수사되는 작품들은 아마도 '한 마을'에 거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작은 영화'에 '힐링'의 의지는 사실 별로 없다. 오기가미의 초기작이, 모리 쥰이치의 '란도리'가 빛을 내는 건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작고도 완전한 하나의 세계를 빚어내는 데에 있다. 실제 오기가미 감독은 한 해외 영화제에서 '힐링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란 소개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대규모 복잡한 일상의 짜투리 '휴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런 영화들이 태어나지 않는다. '란도리'에서 테루는 지구와 우주를 이야기하고, 고작 시골 마을과 더 작은 시골 마을을 오가는 여정의 이야기지만 2시간 16분을 채운다. '작은 영화'라는 건 상대적 크기의 비교가 아닌, 절대적 수사의 단어로서 하나의 세계를 지칭할 때, 분명 보다 영화에 다가간다. 세상은 어쩌면 조금 더 작아도 되고, 어쩌면 그곳에 나에게 결핍된 무언가가 숨어있다고, 이런 영화들은 이야기한다. 작고, 아주 작게. 보니 핑크의 피아노 선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테루오에겐 몇 가지 자기만의 '룰'이 있다. 옷을 훔쳐가는 사람이 없는지 줄곧 주위를 살피면서 눈이 피로해질 즈음엔 두 눈을 감고, "그러면 보고싶지 않은 걸 보지 않아도 되어서 편안해'라고 말한다. 매번 지기만 하는 아마츄어 복서, 꽃을 좋아하는지 카메라를 좋아하는지 아리송한 동네 아줌마, 눈싸움이라도 하듯 질세라 시선을 피하지 않는 중딩 남학생... 손님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도 별 다른 관계로 발전하는 일은 없다. 테루의 행동 반경은 란도리 앞 몇 걸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는 애지감치 그런 빤한,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곳곳이 채워진 시간을 그릴 맘이 별로 없다. 두 마디 말할 거 한 마디만 하고, 한 마디 마할 걸 말을 삼키고...영화는 오래된, 할머니가 장만해 놓은 의자에 앉아 햇살 좋은 오후의 한 자락을 보내는 테루처럼, 온순한 어느 강아지의 하루를 살아간다.
아마도 테루오, 남들이 부르는 '테루'가 아닌 스스로 소개하는 테루오의 하루, 시선, 감정에 온전히 눈높이를 맞추고 진행되는 탓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묘하게 가장 깊숙한, 그리고 물컹한 아픔의 외연처럼 다가오는 건 아마 이 영화의 가장 소중한 리듬, 템포, 어떤 마음의 생김새 덕인지모른다. 테루는 어릴 때 맨홀 구멍에 떨어져 머리에, 그리고 뇌에 상처가 생겼다고 여러 번 말하는데, 그런 구멍을 안고 살아가는 시간이 그곳에 흘러간다. 미소를 짓지만 슬픔을 간직한, 아픔이 웃음을 보이는 '시간'이 매일 아침 일어난다. 나는 별로 '테루'가 아니지만, 맨홀 구멍에 떨어져본 적도 없지만, 깊은 상처에 모자를 쓰고 살아가는 그 하루를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상처는 누구나 입으니까, 아픔은 내게도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빨래는 매일하는 거니까. '란도리', 그건 어쩌면 그런 너와 나의 떼를 지워내는 공간이곤 하다. 다시 한 번 걷기 위한, 또 한 번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세탁기가 돌아간다.
이 영화가 조금 특별한 건, 테루오의 별 거 아닌 날들을 걸어가며 소위 이야기의 결말, 엔딩을 끌어내는 과정이 우리가 익히 아는 영화적 픽션이 아닌, 테루오의 인생, 온전히 그곳에서 새어나오듯 연출된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의 한 챕터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따뜻함의 순수한 매너가 이 영화엔 있다. 테루오의 며칠이 지나가고 영화는 돌연 장면을 전환해 란도리 손님 중 1인이었던 미즈에의 일상을 쫓아가는데, 이후 테루오의 하루가 그려진 만큼의 미즈에가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건 미즈에가 어쩌다 두 번이나 깜박하고 나두고 간 세탁물 하나. 보통의 영화라면 별 이야기도 되지 못할 이 일은 테루오에게 가게를 비울만큼 급박한 사건이고, 테루오는 미즈에의 집에, 도쿄를 떠난 그녀의 시골집까지 먼 길을 떠난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번잡스러워 할머니가 부동산 업자에 속아 가게가 넘어가고, 집에 돌아온 미즈에는 동생에게 미움을 사고, 마을에선 누군가 목숨을 끊었는지 구급차 사이렌이 울리지만....테루오는 자신의 걸음으로, 자신만의 속도로 미즈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아마도 테루에겐 세상에 흘러가는 다반사보다 속으로 되내이는 혼잣말의 세계가 더 리얼하고, 그곳은 이곳에 있지만 이곳에 없고, 그렇게 잘 보이지 않지만 그저 세상 떼가 덜 묻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아슬아슬함,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테루가 아닌 '테루오'의 세계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빨래 전과 후의 마음이 멀어지지 않게, 상처, 그 이후의 날들을 살핀다.
이 영화를 단순하게 말하는 건 무엇보다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란도리'엔 전혀 다른 크기와 질감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섬세함, 선한 마음같은 게 있다. 결국 '란도라'는 상처받은 두 남녀가 서로에게 '위안'을 받는 길목의 스토리이지만,여기엔 '위안'이라기 보다 상처 그 자체로 괜찮을 수 있는 '교감'이 오고간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주저와 망설임의 물컹한 사랑이고, 결혼을 하자고 말해도 들판 가운데서 서로를 마주보는, 가장 단순한, 말 그대로의 결합, 두 영혼의 '만남'이다. 영화에도 성격이란 게 있다면, '란도리'는 아마 조금도 수선을 떨지않는 순도 100프로의 '사람'이다. 쿠보즈카 요스케의 테루는 길가의 강아지와 같고,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상처의 코유키, 미즈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과도 같다. 그런 세계에서의 사랑, 지구와 우주. 테루는 고작 란도리를 감시하는 20살 청년일 뿐이지만, 그곳엔 수많은 세계가 내일맞이할 준비를 한다. ’상상해봐(想像してみて)'라는 암호가 속삭이듯 들려오는 곳, 가장 작은 소우주의 세계가 그곳에 시작된다. 이건 행복한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작고 여린 창에 비친 딱 그만큼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