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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13. 2020

마음이 흔드리는 날에는 극장 F열에서

우리가 말하지 않은'나'의 모든 것

우리가 말하지 않은'나'의 모든 것


#01 

코로나는 세상 모든 걸 바꿔놓은 듯 싶지만, 어쩌면 보지 못한 시간과의 뒤늦은 조우다. 거리 두기를 말하는 시대에 영화관은 옛말이 되어가는 듯 싶어도 100년 넘는 역사의 시간, 혹은 자리가 보여주는 건 그저 조금 다른 '오늘'이다. 지난 3월 홍콩과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의 감독들이 목소리를 모은 B2B, Back to Basic 프로젝트처럼. 지금 코로나가 불러일으킨 생소한 '오늘'은 때로는 어제를, 그렇게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한국에선 장율,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시이 유야 감독이 참여했고, 이시아 감독은 가장 먼저 완성작을 단 세 달 만에 만들어 공개했다. 제목은 무려 '살아버렸다.' 부산영화제에 초청되면서는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는 "서른 중턱을 넘으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에서 내일이 보이고, 세계를 어떻게든 알 것 같은 감각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문득 지금 제가 하고있는 것, 영화라는 건 무엇일까 의문을 갖게됐어요."라고 말했는데, 별 어렵지도 않은 이 제목은 이상하게 묘한 뉘앙스를 남긴다. 사건, 혹은 사고처럼 어느날 돌연 살아버리게 된 시간들. 



生きちゃった는 진심을 감춘 채 살아가는 세 남녀에게  불현듯 들이닥친 사고 아닌 사고, 그리고 이후 나의 '진심', 세상 모든 것의 '진짜'와 부딪히며 벌어지는 스토리다. '도쿄의 밤하늘 항상 짙은 블루'의 이시이 유야와도, '이별까지 7일'의 조용한 죽음까지의 일주일과도 분명 다르고, 질컹한 무드와 이야기가 91분을 채운다. 이시이 유야는 "이 작품에서 모든 걸 다 쏟아부은, 저의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라 그만큼 긴장이 된다"고도 했는데, 주연을 맡은 타이가는 무슨 우연인지 작년 6월부터 이름도 바꿔 성을 붙인 나카노 타이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신념, 각오, 진심. 세 주연 배우와 이시이 감독의 인터뷰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촌스럽게도 이 세 개이고, 이시이 감독 말대로 "프라이드랄지, 사회적 상식이나 룰같은 걸 모두 다 벗어버리고 남아있는 것", 어쩌면 그게 우리가 진심으로 믿고있는 영화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있는 영화의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지워냈을 때, 우리가 모르던 영화가 찾아온다. 참고로 '무산일기'의 박정범 감독이 타이가의 형으로 출연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가장 작은 영화의 한 자락.



#02 

이케마츠 소스케의 토크 프로그램을 보고, 소마이 신지의 '바람꽃(風花)'를 찾아보고, 유튜브에선 코이즈미 쿄코의 'おやすみ, 오야스미'가 흘러나왔다. 흩날리는 벚꽃만큼 아름다운 4월도 없지만 그 풍경은 추락을 품고있고, ‘잘 자’라는 인사는 어쩌면 가장 아침을 기다리고 있는 말인지 모른다. 개구리 그림과 울음 소리가 끝나지 않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풍년을 수확하는 이 날에 묘하게도 어긋나고 어울리는 영화라 생각했다. 육교 위 아사노 타다노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줌없의 순간을, 벚꽃 흩날리는 하늘 아래 잠든 두 남녀의 마지막 새벽을, 소마이 신지는 가장 아무렇지 않은 시간처럼 그려낸다. 너무나 평범해 눈물이 날 것 같은 생이거나 죽음을. 너무나 생소해 이름도 잊어버릴 것만 같은 이 시절의 추석을. 밀물이 썰물을 밀어내고 시작하는 시간, 나는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라고 척박한 마음으로 카톡 몇 개를 보냈다. 너무 죽고싶다는 건 너무너무 살고싶다는 말. ‘카자하나’는 어쩌다 소마이 감독의 유작이다.



#03

마음이 힘들 때, 무슨 이런 날이 있을까 싶을 때 글을 쓰다보면 편안해질 때가 있다. 물론 글이 잘 풀리느냐 아니냐의 따라 그 정도도 달라지지만, 생각했던, 혹은 하지 못했던 말들이 흘러나올 때 묘하게 안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일종의 피난처이자 어쩌면 나의 자리. 영화 '주디'를 보면 주디가 미국에 아이를 남겨놓은 채 영국으로 향하는, 그렇게나 많은 상처, 아픔, 이별, 슬픔을 안겨준 음악, 무대로 기어코 올라가는 장면이 스쳐간다. 세상엔 떠나고도 떠나지 못하는, 도착했지만 출발하지 못한, 자신만의 '응어리'같은 자리가 있다고 느낀다. 

어쩌다 그 '주디'를 누나와 함께 본 아침, 흐르는 눈물을 감추느라 소파 구석에 몸을 기댔다. 아마도 나만 아는, 나밖에 알지 못하는 슬픔, 혹은 바보같은 감정이 영화 속 주디, 그녀의 질곡의 사연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만 같은 당혹스러움, 그런 민망함을 피하고 싶은 심정에서라고, 이제는 간혹 생각한다. 아니면 나만의 애달픔을 들켜버리고 싶지 않은 허세같은 걸까. 추석이면 여행을 하자는 가족 약속 2년째. 서해 바다 섬에서 홀로 독방의 2박을 보내고, 엄마 방에 모여 아침을 먹었다. 돌아가는 길 난 누나 차 뒷자리에 앉아 '이래서 같이 가면 안돼'같은 몹쓸 생각을 했는데, 세상 어떤 여행은 어쩌면 그런 푸념에서 시작하곤 한다.

어떤 '가족'이란 이름의 여행은.

https://youtu.be/PSZxmZmBf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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