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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01. 2021

나는 다시 한 번,
'망각'을 기억하고 싶었다,

’너의 이름은', 3년과 10년의 문턱에서



페북이 전해주는 알고리즘의 '시간 스토리'는 대부분 맥락이 없지만 때로는 꽤나 심오한 우연같아, 몇 해 전 내가 적어놓은 한 리뷰의 글을 보고, 다시 그 영화를 찾아보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일본에서 천만을 넘겼다고 하는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당시(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지금보다 몇 살이 어렸을 때)의 난 그 영화를 '내가 보지 못한 나', '꿈속에 잠시 떠오르다 사라지곤 하는 그림자거나 뒷모습'같은 '모놀로그'의 영화라고 보았'었나본데', 몇 해가 흘러 다시 마주한 그 애니메이션은 절반은 맞고 혹은 틀리고, 완전히 빗나간 오독이거나 앞을 바라보며 뒤의 이야기를 하고있는, 깨어나지 못한 현실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 때의 나라고 하면 모든 게 잘 굴러가지 않아 어디라도 숨고싶었던 나약함 그 자체였던지라, 어떻게든 그 영화가 나의 이야기기를 하고 있길 바랬는지 모른다. 마치 '너의 이름은' 다음에 나의 이름을 불러줘야 할 것같은 유치한 망상같은. 쓸데없이 감정만 풍부해 착각으로 모든 것에 이입해버리고 마는 요지경처럼. 



세상은 사실 하나가 아니고, 개와 늑대의 시간은 황혼 무렵 매일같이 찾아오고, 실은 느끼지 못할 뿐 곁에 흘러가는 평행 우주라 함은, 어느 고독에 미친자에겐  모든 아픔을 무화해줄 달콤한 빛줄기, 혹은 그곳에만 존재하는 영원의 찰나와도 같아, 난, '너의 이름은' 그 다음이 영원히 쓰여지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곳을 등지고 너머의 아침을 기다리던 시간.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지난 5년 여의 새벽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본 '너의 이름은'은 오히려 그곳에서 '돌아온' 시간의 영화였고, '내 안의 나'가 아닌 내가 아닌 너가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였다. '너의 이름은', 그건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남겨진 (내일의) 문장이다.

  

"유성이 떨어지는 날, 황혼 무렵 다른 세계가 뺴꼼히 문을 연다. 미츠하는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깬다. 늘상 있는 일이다. 타키는 핸드폰을 잡으려다 침대에서 떨어져 잠에서 깬다. 역시 늘상 있는 일이다." 

착각은 이미 이 첫문장에서 시작됐다. 나는 도쿄와 기후현 산골 마을, 수 만리나 떨어져있는 미츠하와 타키를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 인트로 부분에서의 둘의 교차를 단순한 이야기의 연결을 위한 장치가 아닌, 꿈과 현실, 여기와 저기를 은유하는, 방황하는 청춘의 자아에 대한 메타포로 이해했는데, 그 메타포의 맥락은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같은 시간 다른 개인의 내면을 바라보는 장치로서의 오고감이 아닌, 엄밀히 서로 다른 시공간에 그려지는 흘러가는 시간과 남아있는 시간, 저항하는 시간과 기억하는 시간으로서의 장치. 그렇게 대체하는 교차가 아닌 병렬하는 작용으로서의 교차. 


'너의 이름은'은 시간을 오가는, 몸이 뒤바뀌는 비교적 흔한 영화적 상투를 바탕에 깔고 시작하지만, 그렇게 그려지는 건 뒤바뀜으로 인한 오해와 좌충우돌의 코미디가 아니고, 심연을 드러낸 듯한 이세계의 몽연하고 멜랑꼴리한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너의 이름은'은 철저히 현실 위에서, 3년 전과 지금, 혹은 지금과 3년 후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남아있는 이곳의 시간을 드러내느라 여념이 없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 오지않은 3년과 남아있는 3년의 희미한 흔적들을 그 특유의 섬세함으로 담아낸다. 창밖에서 비치는 빛의 너머를 바라보게 하고, SNS에 남겨진 내가 아닌 나의 기록에 타인 아닌 타인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차피 그곳에 갇혀버린(릴) 빛과 글자들. 하지만 누군가 기억할지 모를 글자와 빛들. 영화가 개봉되기 3년 전 311, 그 날이 없엇더라면,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는 SNS 시대 140자 독백의 가장 애처로운 영화가 될 뻔도 했다. '너의 이름은', 우린 누구일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140자의 메시지를 건넨다.




근래의 일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최근 몰라보게 변화하는 도쿄의 모습은 10년 전, 311 동일본 대지진이 시작이었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마주한다. 갑작스런 지진과 츠나미, 수 만명이 파도에 휩쓸려가고 마을 전체가 여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극의 기억에서 시작된 '10여 년의 변화.' 그 트라우마가 최첨단 트렌드를 열어가는 지금의 도쿄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도 싶지만, 돌연(코로나 팬데믹이란 시기를 보내며) 공통의 아픔이라는 건 그곳만의 자산이란 생각을 하곤한다. 특히나 자연 재해가 많은 일본엔 그런 '트라우마의 유산'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의미에서 '너의 이름은'은 3년 전 하마구치 류스케가 완성한 '아사코'와 비슷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하마구치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와 311 사이의 연결에 대해 '일본 사람들은 311 이후 평범한 것, 당연한 것들이 실은 그렇지 않음을 여지없이 느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을 이어서하면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은 어제의 아픔을 잊지않기 위해, 홀로 두지 않기 위해, 눈을 뜬 아침 지난 밤의 꿈을 남겨두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왜 하필 미츠하는 아침에 일어나 타키와의 꿈속을 맴도는지, 왜 하필 타키는 아침에 일어나 미츠하가 흘린 눈물과 같은 눈물을 흘리는지. 대부분의 몸이 뒤바뀌는 영화들에서 그런 '현상'들은 후반까지 이어지지만, '너의 이름은'에서의 그건 일종의 증상과도 같아 금새 깨어나거나 잊혀지고, 흡사 우리의 기억처럼 흘러간다. 신카이 감독은 혹시 꿈도 아닌 뒤바뀐 몸에서의 생소한 아침도 아닌, '기억'에서 어쩌면 내일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난 그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날씨의 아이'는 기후 위기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됐어요'란 말을 '기억'했다.



어긋나고 잊혀지고 끝내 이름도 모른채 끝이나는 애절한 드라마에 311이란 험악한 현실을 들이미는 건 다소 실망스럽다. 방황하는 소년과 운명과 싸우는 소녀의 애처로운 모험을 기후 변화라는 암울한 뉴스 곁에 데려놓는 것 역시 달갑지 않다. 무엇보다 타키의 꿈을 빌려, 미츠하의 꿈속에서 이곳을 외면하려 했던 나의 빈약한 상상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건 그야말로 내키지 않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은 내가 아는 가장 '현실'을 사랑한 영화이고, 동시에 과거를 믿고있는 순박한 이야기다. 이미 흘러버린, 어제가 되어 잊혀지는 3년 전 미츠하의 일상을 신카이 감독은 꿈이라는 깊은 밤 한복판에서, 시간을 이탈해 평소 동경하던 도쿄의 남고생으로 일어나는 영화적 트릭을 빌려 다시 살아가는 오늘의 자리에 데려온다. 회복할 수 없던 과거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으로 돌려놓고, 잊고있던 너에 대한 나의 기억을 이상하게 느껴지는 가슴의 통증으로  기어코 이곳에 남겨 놓는다. 그러니까 이건 '기억', '이어짐'의 영화다. 꿈이거나 기억, 그리고 내가 아닌 어딘가 타인의 자리에서 (완성되는 이야기).

https://youtu.be/M40SBBsSCIA


영화에서 미츠하는 미츠하로, 타키는 타키로 등장하지만 둘은 서로의 이름을 모르고 있고, 그곳엔 3년이란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이 흐르고 있지만, 그렇게 숱하게 스쳐가는 타인이 나의 어제, 혹은 내일을 거늴고있다. 아마도 신카이 감독은 가장 멀고 가장 가까운 오늘에서 내일을 찾고 싶었던걸까. 이 영화에 관통하는 모티브는 지독히 일본적이고, 그들의 가장 큰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선 이야기이지만, 사실 그런, (내가 아닌 너에게 남아있는) 과거와의 조우를, 우린 늘 꿈꿔왔는지 모른다. 또 한 번의 꿈을 꾸며, 희미한 가슴의 통증을 매만지며 나는 어제의 나를 찾고있는 걸까. 나의 어제를 찾는걸까. 미츠하의 할머니는 실을 잇고 또 이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끊어진 시간이 다시 만나는 것도 '인연'이지." 그러니까, 다시 회복하는 어느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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