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멈췄던 곳, 너가 가지 않았던 길. 구로사와 기요시'지구의 끝까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2019년 영화 '지구의 끝까지'는 좀 재미없게 설명하면 우즈베키스탄과 일본이 국교를 체결하고 25주년을 맞아 제작된 작품이다. 유라이사 한복판 대륙 국가와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섬나라 일본 사이에 별 다른 접점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곳엔 25년간의 '관계'의 세월이 있다. 사실 그런 '관계'라는 건 정체도 없고 증거도 희미한 허울좋은 말에 불과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이 떠올린 건 '25년 거리의 남', '타인'이란 말의 묘한 이면이다. 내가 아닌 남에게서 보이는 나, 타인에게 비치는 나의 길'같은 것. 그렇게 이 영화는 이름은 들어봤어도 아는 건 거의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 미아가 되어가는 나의 '오늘'을 바라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촬영할 것', '극중에 나보이 극장이 등장할 것', 이 단 두 개의 조건을 제외하면 모든 게 '마음대로 해'였다고 하는 이 영화의 촬영 현장은, 그렇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멈췄던 곳, 더 나아가지 않았던 길, 그 끝이 시작하는 세계가 되어간다. 나라 간의 이런저런 우호를 다지는 거창한 명분의 '말'들과는 다르게, 혹은 비슷하게 구로사와 기요시는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의 관계, 그 경계를 걷기 시작했다. 지구, 세상, 여행의 끝이라는 건, 언제나 내가 멈췄던 곳, 더 가지 않았던 길의 시작. 영화의 원제는 '여행의 끝, 세계의 시작(旅の終わり、世界の始まり)이다.
일본에서 몽골 사막을 지나 6211km나 건너온 이 영화는, 사실 주인공 요코(마에다 아츠코)를 홀로 두기 위한 여정이다. 아마도 아침 생활 정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촬영팀의 리포터로 일하는 요코는 어느 때이든, 어떤 장면에서든 '그 상황,-대부분 난처함으로 설명될-앞에 맞선 1인이 된다. 일본에서 가장 크다는 호수 미와코에 배가 넘는다는 '아라르호'에 발을 담그고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다는 희귀 거대 물고기를 낚느라 고생이고, 유원지 어트랙션이라고 하기엔 위험하기 짝이없는 기구에 세 번이나 몸을 맡긴다. 이제는 쿠로사와 멤버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소메타니 쇼타가 매정하게, 오직 방송 생각 밖에 없는 듯한 '나쁜 PD' 캐릭터로, 요코를 몰아붙이고 있다. 그나마 호의적으로 그려지는 카메라맨 이와오 역의, 카세 료는 한 인터뷰에서 "요코를 제외한 스태프는 모두 그녀를 홀로두기 위한 캐릭터에요"라고도 이야기했는데, 구로사와 기요시의 이 영화가 우즈베키스탄이라는, 25년 교류가 있지만 여전히 미지의, 그곳으로 향했던 건, 애초 '완전한 타자', 그리고 '혼자'의 시간을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구 끝에서 바라보는 나란 타자와의 조우. SF, 호러의 거장이라 불리는 구로사와 키요시는 왜인지 지금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스파이의 아내'가 은곰상을 수상하며 다시 주목을 모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내게 '<도쿄 소나타>와 그리고'로 이어져왔는지 모른다. 벌써 20여 년 전, 도쿄 시부야 언덕 아트 시네마 유로 스페이스에서 어쩌다 보게된 '도쿄 소나타'는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나와 본래의 나, 혹은 이전의 나를 들여다보게한 일종의 '사건'이었다. 마지막 엔딩 창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과 드뷔시의 '달빛'을 곱씹으며 걸었던 비오던 밤의 시부야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이후 기요시의 영화는 내가 알던 도쿄의 소나타와는 사뭇 달랐고, 이제야 생각하는 건 그의 영화에 그려지던 그 '이질감'들이다. 그의 영화는 흔히 호러와 SF의 장르로 설명되지만, 나는 그가 조금 더 초현실의, 가장 현실을 닮은 그 너머를 응시할 때, 내가 아는 그 오래 전 '소나타'를 꺼내볼 수 있다. 장르 너머에서, 말로 설명되지 않는, 형체로 구현되지 않은 바람과 빛과 이상한 멜로디의 전이같은 것들. 촬영에서 돌아온 요코가 호텔 객실에 들어섰을 때 커다란 창은 활짝 열려있고, 흔들리는 커튼 너머 거센 바람이 분다. 10년 전 '도쿄 소나타' 속 피아노를 연주하던 켄지 뒤켠 흔들리던 창의 커튼과 바람 사이의 데자뷰. 요코는 지친 나머지 침대에 쓰러져있지만 어딘가 시작하는 듯한 묘한 리듬이 감돌고, 난 이걸 어느 10년의 시작과 끝이라 생각하고 싶어졌다.
고작 프로그램 코너 하나 분량을 뽑기위해 떠난 여정에서 이렇다할 '사건'이라면 모두가 멈춘 이후 돌아가지 않고, 몇 걸음을 더 나아가는 요코의 '그 후'다. 말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계획대로 되는 건 사실 없어 일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그들이 건진 건 고작 1분 30초 정도 뿐. '방송이 될 만한 소재'만 찾아대는 PD 요시오카(소메타니 쇼타)의 막무가내 스타일은 일면 현실과 동떨어진, 편집(조작)된 TV 속 허상의 괴리감에 일침을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요코의 왜인지 찾아가는 바자르에의 '모험'이고, 예고된 사고 아닌 사고 속에 미아가 되는 요코의 방향 잃은 걸음 속에 영화는 계속 나아간다. 남성 중심의, 이슬람 문화가 압도하는 거리 속을 홀로, 단 한 장의 지도만 들고 방황하는 요코의 위태한 '직진'은 짐짓 비장한 긴장도 품고있다. 그리고, 그건 곧 기요시 영화에 묻어있던 '이질감'의 재현이었다.
영화엔 우즈베키스탄이라는 타국, 이세계에서 마주하는 몇 번의 '이탈'의 순간이 등장하고, 아마도 요코의 내면에 흘러갔을 그 순간은 영화의 제목과도 같이, 어떤 끝과 시작, 그 경계의 장면일지 모른다. 모두가 귀국을 하겠다고 이야기한 날, 요코는 남겠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엔, 그렇게 지연되는 엔딩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징병된 일본인 병사들이 만들었다는 나보이 극장에 요코가 우연히 도착하는 건, 물론 영화적 설계겠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일까. "주인공에 대해서는 '이런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고 싶다'는 저의 이상이 투영된다고 생각해요." 구로사와는 사람, 내면에 잠자던 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영어로 옮겨진 'the end of the earth'는 SF 공상 과학 영화를 연상케할 정도로 거창하고, 다시 한국말로 옮긴 '지구의 끝까지'는 어딘가 설익은 청춘영화 같기도 하지만, 원제인 '여행의 끝, 세계의 마지막'이란 타이틀은 진부하면서도, 가장 작고 커다란 세계를 응시하는 제목인지 모른다. 그간의 기요시 영화가 이런저런 곤경, 수상한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수상함'의 합으로 완성되었다면, '지구의 끝까지'에서 모든 건 요코, 20대 중반의 방황하는 여자의 시간으로 수렴한다. 마지못해 리포팅을 하면서 내면의 갈등을 숨기지 못하고 짜투리 시간에 미지에서의 방랑을 주저하지 않는 요코는, 내 안의 나와 타인 안의 나를 오가는 혼란의 문턱이고, 여기엔 외부 세계와 '나'가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어느새 동일시되는 묘한 이탈과 발견의 수상한 시간이 흐른다. 단순히 이야기하면 '나의 타인은 어디에 살고있나요.'
요코는 시종일관 핸드폰 라인창을 닫지 못하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남친은 얼마나 더 가까운 타인일까. 영화엔 우즈베키스탄이라는 생소한 나라, 문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곱씹게 하는 대목이 (당연히) 여럿 등장하고, 그렇게 파편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건 '세상의 끝은 어떻게 다시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요시 감독은 그간 자신의 영화에서 탐지해왔던 실체를 향한 '수상함'의 흔적을 한 여자의 방황하는 길목에서 변주해놓는다. '도쿄 소나타' 속 류헤이, 켄지 부자가 한바탕 곤욕을 치루고 마주했던 '어느 달빛의 시간'이 요코의 지연된 출국 속, 이상한 의지의 발걸음에 그려지는 묘한 데칼코마니의 완성. 그만큼 능동적인, 그리고 밖이 아니 내부에서의. 이 영화의 절정은 마에다 아츠코가 부르는 두 번의 '사랑의 찬가'에 있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9vdI0DU-Qj8
나는 이즈음에서, 볓 번의 세월을 돌아 '여자'를 산책하기 시작한 홍상수 영화의 지금을 생각했는데, 이건 그저 단순히 나의 편향적 생각일까. 그의 차기작 '스파이의 아내'에 출연한 건 또 한 명의 여배우, 아오이 유우. 시간은 흐르고, 시절은 반복되고, 지구는 회전한다. 시작이 늘, 언제나 마지막이었던 것처럼. 여행의 끝, 그리고 세상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