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왜인지 두 번 봐야 하는 영화가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
나리타 09시 출발 비행기는 타지 못했다. 기상 악화로 심사가 미뤄진다는 메시지는 하필이면 그 때 도착해 예정되어 있던 시간은 돌연 시작되지 못했다. 여기까진 자주는 아니어도 없지도 않은 일. 하지만 그렇게 떠버린 시간 앞에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면 그건 얼마나 나의 선택이고 선택이 아닐까. 근처 호텔에 묵거나 먼저 도착해 현지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닌, 다시 집으로 향하는 결정이란 얼마나 나의 의지에 의한 것일까. 그렇게 이곳에 도착하고 도착하지 않는 것들. 아내를 떠나온 카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아침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고, 그러고보니 영화의 크레딧은 아직 등장도 하지 않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8번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마이 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겠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를 다시 한 번 보며 난 보지 못한 것들을 어김없이 보고만다. 이 영화의 플롯이란, 주인공 카후쿠가 아내를 잃고 방황의 2년을 보낸 뒤 사람들을 만나며 관계를 가지며 조금씩 스스로를 알아가는 여정이라 정리할 수 있지만, 애초 하마구치 영화를 완성하는 건 그런 사건 만을 도려낸 줄거리와 같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 사이사이 잠재된 사건이거나 예고하는 어느 복선의 전과 후. 그리고 시차를 두고 찾아오는 우연이거나 어떤 운명의 알아차림 같은. 혹은 지연된 삶의 연속 안에 그의 영화는 보다 깊숙이 자란다. 그리고 그 우연이거나 운명이란 어김업이 영화란 틀을 넘어 삶 속의 수많은 징표를 가리키고, ‘드라이브 마이 카’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며 내가 느낀 건, 하마구치의 이 영화는 전에 없이 많은 암시, 삶 속에 잔재하는 수많은 우연, 그러한 ‘징표’를 그야말로 ‘드라이브’ 하고 있다는, 뒤늦은 발견이었다.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후쿠는 갑작스레 교통 사고를 당한다. 이어진 장면에서 그는 병원에 있고, 달려온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와 함께 앉은 자리에서 예상 밖 녹내장 진단을 받는다. ‘녹내장은 한쪽 눈의 시력이 차차 악화되는 것이고, 하지만 다른 쪽 시력은 살아있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힘듭니다’라고, 의사는 얼추 설명을 하는데, 듣고 있는 카후쿠도, 그 곁의 오토도, 보고있는 관객도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갑작스런 사고도, 예상 밖의 녹내장이란 진단도, 그저 일을 하고있는 의사의 그 태연한 설명도 당황스러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바로 전 교통 사고가 난 카후쿠의 빨간 사브를 높은 부감으로 바라보던 장면에서, 사고 차량을 제하면 아무도 없던 고속도로엔 카후쿠의 사브와 충돌한,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던 새파란 세단 만이 멈춰 있었고, 빨강과 파랑, 가는 길과 오는 길. 어쩌면 그 순간 영화는 이미 하나의 전조를 보여주었는지 모른다.
물론 너무나 단조롭고 지극히 1차원적인 비유 혹은 상징이지만 공항으로 향하던 길, 카후쿠의 차 안에선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속 이 구절이 흐르고 있었다. ‘두려운 건 진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를 모른 척 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면서 보고있다는 착각 속의 오른쪽 눈과 그를 알아버려 깨져버린(충돌) 사건 이후 카후쿠의 왼쪽 눈. 난 그 순간 이건 부감의 영화라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시간 속, 카후쿠의 것이 되지 못한 체호프의 문장은 그곳에 시차를 두고 그렇게 증명되었다. 굳이 한 번 이야기하면, 영화의 원작이 실려있는 단편집의 제목은, 세상을 여자와 남자의 ‘합’으로 정의해본다면, ‘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하루키의 동명 원작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좀 이상하다. 아마도 해가 떠오르려 하는 이른 아침, 여명의 방 안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돌연 한 여자의 목소리로 문을 연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시작이라기 보다 잔해, 어제 밤의 흔적이거나 물러나지 못한 어둠으로 느껴지고, 해가 밝아오는 창 밖과 달리 어둠이 짙은 그곳에 여자는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있다. ‘그녀는 때때로 야마가 집에 몰래 들어가게 되었다.’ 뒤이어 카메라가 어둠을 걷어내면 뒷모습의 그녀의 나신이 드러나고 곁에는 아마도 함께 밤을 지샌 남자가 누워있다. ‘그래서 빈집에 들어가는군.’ 남자는 여자의 말을 받아주며 이는 곧 대화처럼 흘러가고 어둠이 모두 물러나기까지 그렇게 이야기의 한 토막이 완성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이야기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여자의 이름은 오토(音), 굳이 이야기하면 ‘소리’란 뜻이다.
이후 영화는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으로 연결되고 그를 이어주는 건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와 기억하는 이야기이다. 차 안에서 둘은 잠결에 주고받은 이야기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말하자면 카후쿠와 오토의 현실이 아닌 그를 끌고가는 또 하나의 메타 현실로서의 이야기가 이 영화를 내포하고 있다. 오토는 드라마 극작가에 카후쿠는 극을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물론 둘의 직업적 성격을 반영한 인트로라 단순화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중요해보이는 건 오토는 왜인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그녀의 이야기는 발화되고, 오토가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어둠 속에 있다. 마치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혹은 또 하나의 세계가 그곳에 흘러든 것처럼 몽롱하고 불안하며, ‘아사코’의 오프닝을 연상케도 하는 어느 이질감의 아침. 그렇게 어쩌면 ‘다른 세계’와 ‘접촉’하고 있던 오토와 그의 남자 카후쿠.
하지만 이후 영화는 마치 그 접촉을 끊어내기라도 하듯, 방 구석구석 도착한 아침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 햇살 눈부신 방 곳곳을 둘러보고, 이내 카후쿠의 빨간 세단을 굴린다. 그렇게 모른척을 한 하루가 시작한다. 화자보다 먼저 도착한 소리와 기억으로 대체되는 지난 밤의 이야기. 이건 무엇의 상징이었을까. 밤은 아침을 결코 볼 수 없고, 어쩌면 이건 예고된 실패의 시작은 아니었을까. 하마구치의 아침은 오늘도 불온하게, 어느새 그곳에 시작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을 시작’하기 까지, 그곳엔 몇 개의 우연, 그리고 죽음이 지나간다. 악천후로 지연된 비행기 탓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카후쿠가 목격한 건 외도중인 오토였고, 그건 바로 카후쿠의 차 안에 ‘그녀의 정숙은 철두철미한 거짓이다’란 구절이 흘러나온 다음이었다. 우연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심사를 마치고 집으로, 오토를 만나러 돌아오는 길, 카후쿠의 빨간 사브가 맞은 편 파란 세단과 충돌한 것 역시, 그와 그녀 사이를 암시하는 듯한 대사, ‘아무래도 자네 질투하는 것 같군.’ 이 대목이 흘러나오던 순간이었다. 우연히도.
차 안에서 녹음된 음성 파일을 들으며 작업을 준비하는 카후쿠에게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이상하게도 그 픽션의 이야기란 현실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오늘’을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작용한다. 더불어 카후쿠는 ‘텍스트에 자신을 받쳐 마주하면 텍스트가 질문을 해온다’는 말을, 조언을 구해오는 배우에게 이따금 하는데, 그런 질문과 같은 것들이 그곳에 보이지 않는 물음을 남긴다. 마치 어떤 ‘사고’를 예고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지만 오토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보고도 모른 척을 했던 카후쿠처럼, 물음의 답은 지연되기만 하고, 결국 ‘그럴 수 있을 것 같던’ 사건은 벌어지고 만다. 그런 선택의 지연이 결과(사고)로 드러난다. 하마구치는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선택을 하지 않은, 뒤로 밀어놓은 상황 속에 놓여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를 포함해 어쩌면 운명일까. 왜인지 카후쿠가 오토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 날, 뒤늦게 집에 돌아온 날 오토는 바닥에 쓰러져있었고, 숨을 거두고 이미 그곳에 없었다. 마치 그 우연은 운명이었던 것처럼. 이 영화가 시작을 시작하기 전, 어쩌면 그곳엔 하나의 ‘재난’이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영화가 ‘오피셜리’ 시작을 하는 건, 심사 차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돌아온 뒤, 오토를 지주막하출혈로 잃고 2년 후, 연극제 참석차 히로시마로 향하는 고속도로 서비스 에리어에서이다. 무려 41분이나 영화는 그렇게 오프닝 크레딧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이런 유형의 영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선 왜인지 ‘그 후’가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터널을 지나(耐え), 그리고 나와(抜く) 히로시마로 향하는 길에 하시모토 에이코의 음악이 플랫을 하나 덜어낸 듯 화창한 햇살 속에 울릴 때, 우리는 오래 전 딸에 이어 아내도 잃은 카후쿠가 진흙칭의 2년을 지나 돌아왔음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죽음이란 삶의 구렁을 지나 다시 삶의 문턱으로. 그리고 ‘우연히도’ 히로시마라는 상흔 그리고 ‘그 후’에. 하마구치의 영화는 왜 늘 그곳에 있을까.
카후쿠는 그곳에서 ‘바냐 아저씨’의 워크숍과 공연을 치를 예정이다. 그렇게 약 두 달 간 그곳에 체제한다. 다국적 배우와의 다국어를 사용하는 그의 독특한 연출 방식의 작업이 그곳에 이뤄진다. 하마구치는 여기서 자신의 연출법, 소위 ‘하마구치 방법론’을 그대로 재연하는데, 말에서 감정을 지우고 배우를 최대한 객관화, 뉴트럴 상태에서 감정을 더해가는 그 지난한 과정이란, 아마도 바로 배우 자신, 텍스트에 비친 나, 카후쿠가 말하는 ‘텍스트가 물어오는 질문에 대한 대답’ 그 자체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를 잃고 외면하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는 이 영화의 소위 줄거리는 곧, 카후쿠가 다시 한 번 ‘바냐 아저씨’를 연기할 수 있게 되는, 그 실패를 넘어서는 시간과 얼추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만, 그 과정이란 극중극의 극 안이 아닌 극중극의 극 밖, 오토를 잃고 더이상 바냐 역을 할 수 없게 된 카후쿠의 대답되지 않은 숱한 과거에 매여있고, 여기서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불온할, 카후쿠가 목격했던 오토와 섹스를 했던 남자, 워크숍 참가자이기도 한 타카츠키(오카다 마사키)가 등장한다. 오토 곁에서 가후쿠의 자리를 대체하기도 했을 바로 그 남자. 그는 누구인가. 단조롭게 이야기하 자신이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바냐 역을 맡게 된 타카츠키는 카후쿠의 나머지 반쪽 눈, 곧 카후쿠의 아바타처럼 보인다. 낯선 남자와 섹스를 하는 오토를 문턱에 서 바라보던 카후쿠를 반사된 거울의 대칭 숏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영화는 카후쿠와 타카츠키를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대상이자 존재처럼 그리고 있다.
차가 수리중이라며 타카츠키가 카후쿠의 세단 뒷자석에 앉았을 때, 둘은 오토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토를 사이에 남겨진 의문만큼 관계가 불편한 둘의 동석은 그야말로 불편하기 그지없는데, 오히려 그 불온한 기운이 둘을 이야기하게 한다.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주저없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카후쿠가 미쳐 다 듣지 못했던 오토의 마지막 이야기. 야마가 집에 몰래 들어가는, 전생이 칠성장어였던 여학생의 이야기는 왜인지 타카즈키의 기억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자위를 하던 여학생에게 들려오던,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거기서 멈췄던 이야기가 이상하게 타카츠키의 기억 속에 있었다. 물론 이는 오토와 섹스를 한 남자가 타카츠키임을 조금 더 확신하게 하는 대목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둘은 오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란 점이다.
이후 타카츠키는 너무 직설적이라 당황스러운, 하지만 영화의 핵심일 대사를 말하기 시작하고, 그게 어느 순간 카후쿠에게 하는 말인지 타카츠키 자신에게 건네는 말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또 하나의 '거울 숏'과 같은 수상한 장면이 만들어진다.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을 해가는 게 아닐까요. 정말 타인을 알고싶다면 자신을 깊이 똑바로 바라볼 수 밖에 없어요.’ 그렇게 오토의 죽음은 '나의 상실'이 되어가는 걸까. 이렇듯 2년의 암전 후, 다시 돌아온 카후쿠를 맞이하는 건 자꾸만 어제를 들처내는 아직 답 되지 못한 물음들이고, 여자를 잃은 남자가, 그렇게 그곳에 있다.
그저 의식을 하지 못했을 뿐일까.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 영화엔 유독 부감 촬영의 앵글이 많다. 물론 차가 자주 등장하는 특성 상 구도의 제약에 기인한 일일지 모르지만, 녹내장이란 사실을 알게되는 결정적 모티브의 사건, 카후쿠의 교통 사고 현장을 바라보는 부감의 카메라는 마치 그 현장의 마침표처럼 찍혀있다. 정지된 시간과 서로 반대 방향에서 부딪힌 빨강과 파랑의 차. 그런 대비 그리고 조화. 이 만큼의 사고 현장을 부감이 아니고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하마구치 영화에서 ‘터널’이 이야기의 도입이자 그의 영화적 인트로에 다름 아니었다면, 카후쿠의 전적인 1인칭으로 흘러가는 이 영화에서 그 누구의 눈도 아닌 ‘부감’은, 보지 못한 것들을 아우르는 시점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미사키의 운전으로 히로시마 원폭 돔이나 미사키의 고향 홋카이도 카미쥬니타키무라로 향하는 길에서의 부감은, 마치 영화의 맥락적 엔딩이기도 한 ‘바냐 아저씨’의 구절 ‘신은 알아줄 거에요’란 대사와 조응하는 것만 같다.
강둑에서 서로의 이름에 대한 대화를 하며 미사키가 ‘카후쿠, 이름 특이하네요. 집에 후쿠(복). 상서로워요.’라 말할 때, ‘아내는 오토. 사운드의 오토. 결혼할 때 가장 망설였던 것도 그거. 너무 종교적이라서’란 카후쿠의 말은 어쩌면 그에 대한 힌트였을까. 결혼한 여성은 남자의 성을 따르니 굳이 읊어보면 ‘카후쿠 오토.’ 미사키 말대로 무언가 거창한, 대단한 이름이다. 이름이란 생후 지어진 극히 선택에 의한 결과일 뿐이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 이 영화에선 우연 혹은 운명처럼 작용한다. 미사키는 와타리란 성을 쓰고, 그건 일본에서 매우 드문 이름이지만, 어릴 적 사고로 엄마를 잃고 무작정 차를 달려 도착한, 그것도 하필 차가 고장나 멈췄던 곳은 히로시마였다. 그곳에서 와타리란 성은 의외로 흔하다. “아빠 얼굴은 본 적도 없지만"이라 자조하지만 그렇게 어쩌면 운명적인? 심지어 카후쿠와 오토 사이 8년 전 세상을 뜬 딸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스물 셋, 곧 지금 미사키의 나이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아니면 운명적으로?
이렇듯 영화엔 현실에 가려진 우연을 드러내는 순간이 찾아오고(혹은 숨어있고), 우연을 하나 안다는 건 곧 세상의 비밀에 한 걸음 다가서는 길이기도 하다. 타카츠키의 조언 아닌 조언 이후, 카후쿠가 처음으로 뒷자석이 아닌 미사키의 옆, 조수석으로 옮겨 앉았을 때, 그렇게 둘은 만나고 또 만나지 않은 걸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미사키의 아빠는 그 순간 그곳에 도착한 걸까. 달리 말하면 카후쿠는 8년 전 딸과 재회를 한 걸까. 물론 현실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어제의 상처를 지워줄 수 있는 건 어제가 아닌 오늘. 죽음이 남겨놓은 건 상처난 오늘과 내일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엔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우연에의 의지가 있다.
이상하게도 아니 우연히 히로시마에 도착한 카후쿠의 주변엔 비슷한 아픔을 겪은 이들이 함께 존재하고, 그의 공연을 도와주는 한국인 스태프 준수(진대연)와 그의 아내이자 카후쿠의 연극 속 소냐 역의 유나(박유림) 역시 한 차례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적이 있다. 아이를 잃었다는 공통의 아픔? 그에 더해 다국어를 사용하는 카후쿠 작업에 유나의 소리가 아닌 손을 사용하는 수화까지. 세상에 우연은 사실 이렇게나 흔한 걸까. 아니면 그저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요즘 영화에 무슨 부감이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세토우치 바다와 이어지는 그 하늘 높은 곳의 카메라는 분명 우리가 보지 못한 것, 보지 못하고 지나쳐 온 무언가, 너와 나의 깊숙한 어느곳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쓰레기 집하장)서 쭉 가면 평화의 공원’으로 이어져요. 원폭 돔에서 위령비를 잇는 직선을 평화의 축선이라 불러요.’ 너의 눈도 나의 눈도 아닌 그 어딘가의 눈. 유나가 소냐의 손을 빌려 바냐 아저씨가 된 카후쿠에게 전한 마지막 문장은, ‘신은 알아주실 거에요’였다.
이야기 곳곳 우연이 ‘도사리는’ 영화에서 가장 가시적인 암시 혹은 조짐의 단서라면, 바로 영화가 품고있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일 것이다. 실제로 차를 타고 녹음된 테이프를 들으며 작업하는 카후쿠의 스타일 탓(덕)에 영화 속 ‘바냐 아저씨’는 빈번히 재생되는데, 최대한 거리를 두고 '극중 극'과 극을 사고하려 해도, 자신을 비우고 역할을 입는 작업 방식을 실천하는 영화 속 시간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와 번번이 부딪히고 만다. 카후쿠가 교통 사고를 입은 시점이랄지, 타카츠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행을 한 뒤 무대에서 경찰에 연행되는 뒤늦게 ‘발견된 시점’이랄지, 그곳엔 늘 사고를 예견하는 체호프의 말이 있다. 가령 ‘(총을 쏜 뒤)안 맞았어? 또 실패한거야? 젠장. 에이 젠장.’ 이 말의 전조.
또 한 번의 카후쿠와의 술자리에서 타카츠키는 같은 이유, 핸드폰으로 자신을 몰래(그리고 노골적으로) 찍는 남자의 행위에 발끈해 말이든 행동이든 폭력을 행사하는데, 술집 밖에 정차된 카메라 화면 안에 우린 그를 확인할 수 없고, 영화는 그런 찜찜함을 남기고 자리를 떠난다. 그러니까 보지 못하고 지나온 장면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타카츠키는 바냐를 연기하고 있고, 때마침 세레브랴코프를 향해 총을 쐈지만 실패한 대목이다. ‘대체 뭔 짓을 한거야 나는. 무슨 짓을 하는거야.’ 마치 보지 못하고 지나쳐온 장면을 채워넣듯 바냐가 좌절하는 대목에, 이를 지난 밤 타카츠키의 불안 그 자체였던 기이한 행동과 분리할 수 있을까. 유일하게 ‘오케이’를 받은 장면에서 타카츠키는 경찰의 등장에도 의연하고, 카후쿠를 향해 깊숙이 인사를 한 뒤 ‘퇴장한다.’
물론 이 역시 1차원적 짜맞추기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와 같은 일이 모두 카후쿠 앞에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이후 영화가 보여주는 건 곤경에 빠진 타카츠키가 아닌, 미사키와 홋카이도로 떠나는 카후쿠의 길 잃은 방황같은 것. 그러니까 또 한 번 ‘그 후’의 시작. 무대에서 타카츠키에겐 카후쿠가 이야기하던 ‘텍스트가 던진 물음’이 도착했던 걸까. 그는 곧 바냐 아저씨이기도 했을까. 그렇게 카후쿠를 위한 '징표'가 되어줬을까. 영화가 타카츠키를 통해, 바냐 아저씨의 말을 관통해 카후쿠의 몸으로 도착한 건, 미사키의 엄마가 잠들어 있는 고향 카미쥬니타키무라의 무덤이었다. 우연과 우연을 반복하며, 지나쳐온 시간과 뒤늦게 조우하며, 우연엔 늘 시제란 없고, 이 영화엔 이상한 ‘윤회’의 계절이 흐른다.
오토를 잃고 미사키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두 여자의 사라짐과 등장, 두 개의 시간 축, 그리고 두 개의 사건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프닝 크레딧을 기점으로 카후쿠의 인생은 오토의 죽음과 함께 일단락, 페이드-아웃되고, 미사키의 등장으로 다시 시작, 페이드-인한다. 그에 더해 영화가 원작으로 하고있는 소설의 단편집 타이틀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하루키는 소설집 앞글에서 이 제목은 헤밍 웨이의 ‘Men without Women’를 연상케 하지만, 헤밍웨이가 ‘남자들 뿐인 세계’, 혹은 ‘여자를 제외한 남자들’을 이야기했다면, 자신의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말 그대로 ‘여자를 잃은 남자’, 보다 즉물적인 문자 그대로 ‘여자가 떠나버린 남자’ 또는 ‘떠나려 하는남자’라고 강조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라는 인간의 현재, 그런 모티브’일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이는 곧 본 소설이 어떤 상실, 혹은 결여, 그런 구멍에 기인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여자란 상실이 불러일으킨, 혹은 자아낸 파동, 파열음, 진폭과 같은 게 이 소설의 시작이자 곧 하마구치 영화의 출발점이다. 그런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떠나감'이 그들을 이야기하게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갑작스런 상실은 하마구치 영화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어 그려지기도 했다. 성별은 다르지만 바쿠를 잃어버린 료헤이 곁의 아사코랄지, 여행 후 실종되어버린 ‘해피 아워’의 쥰코. 그리고 자꾸만 반복되는 ‘2년 후’나 ‘3년 후’와 같은 ‘오랜만’이란 시제. 동일본 대지진에 어쩔 수 없이 뿌리를 두고있는 하마구치의 영화는 큰 '사건'이 있었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귀를 기울이고, 얼마 남지 않은 변화의 상흔을 쫓으며 성립한다. 그의 영화에 (시간을 초월한) 우연이 자주 출몰하는 건 그런 단절된 시공간을 이으려는 애씀은 아닐까.
‘해피아워’에서 우카이란 남자는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 그 관계의 질서를 시험하듯 등장했다 사라졌는데, 여자들만의 이야기로 흘러가던 영화는 그 순간 이상한 불협화음을 뱉어냈다. 여자와 남자라는 완전한 듯 불안한 긴장감의 관계가 새삼 그곳에 새겨진다. 여자와 남자, 그건 하루키 소설에서도, 하마구치 영화에서도 좀처럼 쉽게 함께하지 못하는 불길함의 상징이고, 오른쪽 눈의 도움으로 녹내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카후쿠와 오토처럼, 함께여서 알게되는, 다시 혼자가 되며 드러나는 세계가 불안하게 그곳에 존재했다 사라진다.
오토의 이야기 속 여학생은 방 안에 여러 징표를 남기는데, 어쩌면 미사키란 오토가 남긴 그런 징표의 하나가 아닐까. 이야기의 나머지를 채워주던 타카츠키 역시 그와 같은 징표는 아니었을까. 살인을 했지만 세상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고, 하지만 그녀는 야마가 집 앞으로 돌아가 유일하게 달라진 변화,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향해 소리 없는 고백을 한다. ‘내가 죽였다.’ 현실도 아닌 픽션 속 그 말의 주어는 누구였을까. 검증되지 않은, 알 수 없는 죽음이 반복되고, 어쩌면 카후쿠는 오토가 남긴 가장 마지막 징표는 아니었을까. 실체 없는 우연이 휘몰아치는 거리에 카후쿠의 빨간 사브가 아직 길을 달리는 중이다.
어둠이 짙은 밤, 세단 지붕 위로 빨간불 두개가 빛난다. 차 안에서는 금연이라 했지만 하룻밤을 꼬박 세운 카후쿠와 미사키는 나란히 차내에서 담배를 피고있다. 루프트 창을 열고 연기를 뱉어내느라 취한 다소 인위적인 동작이지만, 무엇보다 아름답고 그만큼 영화의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속도 감속도 부드러워 중력을 잊을 정도의 운전, 때로는 운전하고 있는 사람의 존재조차 잊게하는 아늑함. 너에게서 나를 본다는 것,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건 어쩌면 이런 감각일까. 결코 혼자서 가질 수 없는 것, 금새 지나갈 거란 불안 곁에 존재하는 것. 둘은 끝내 미사키의 고향, 아픈 과거가 묻어있는 오래 전 집까지 찾아가 두 눈으로 그곳의 오늘을 확인하고, 그건 곧 카후쿠의 과거, 나아가 이름 모를 죽음과 그에 얽힌 이들의 아픔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사키는 공중에 뻗었던 담배 불과 같이 또 하나의 담배에 불을 붙여 집이 있던, 아마 엄마가 잠든 그 자리에 살며시 놓는다. 어떤 아픔의 윤회가 흘러가는 자리. 오토의 이야기 속 그녀는 야마가의 침대에 누워 자위를 하는 자신이 꼭 강바닥에 붙어 흔들리기만 전생의 고귀한 칠성자어와 같다고 했는데, 이런 우연의 일치가 가져다주는 알 수 없는 긍정은 무엇일까.
영화 초반부터 떠돌던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타카츠키가 떠난 그곳에 극은 어느새 마지막 대목을 상연하는 중이고, 다국어를 사용하는 카후쿠의 연극이 막을 닫는 건 소리가 없는 소냐의 손의 언어이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에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곳에 하나의 이야기는 문을 닫지만 세상에 달라진 건 무엇 하나 없고, 그럼에도 ‘불길한 무엇으로 변해버린’ 아무렇지 않은 현실은 소리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연이 우연을 반복하고 아픔이 아픔을 밀어내며 그렇게 운명을 살아가는 시간에, 카후쿠가 아닌 미사키의 빨간 사브 세단이 히로시마가 아닌 부산의 거리를 달린다. 그 곁의 유나 집에 있던 리트리버는 또 하나의 내일의 상징이었을까. 그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리고 상상해볼 수 있는 건, 미사키는 이 차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오늘이, 그런 우연의 내일이 그곳에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은 차 하나의 비밀을 품고. ‘drive my car.’ 하마구치가 다음 영화로 ‘우연과 상상’을 만든 건 또 하나의 내일을 알리는 '징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