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하는 여름과, '올타임 진행형'의 책 만들기
우연과 상상은 생각하면 할 수록 이어져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확실히 말로서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실재하는 세계와 픽션의 경계면 같은 곳에 우연도, 상상도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상상이라는 건 없기 때문에 상상하는 측면이 있지만, 우연은 극히 드문, 거의 없을 것 같지만서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즉, 우연은 그 경계면의 ‘있다’쪽에, 상상은 ‘없다’쪽에 있고, 그런 현실과 픽션이 서로를 교란하게 하는, 나아가 넘어서기 위해 이 두 개는 표리일체의 역할을 하고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인터뷰 중_TOKION
요즘은 거의 대부분 꽤나 뒤늦게 영화관에 가 개봉 영화를 보는 편인데, 아마도 가장 먼저 이 영화를 기다렸을 1인으로서 ‘우연과 상상’을 본 건 개봉을 하고 2주가 지나서였다. 길게 만들기로 어느새 유명해진 하마구치 류스케의 단편 3 편을 모은 단편집이었지만, 40 곱하기 3, 적지 않은 러닝타임으로 완성됐고, 이 작품은 하마구치가 장편(그에 더해 상업 영화)을 작업하기 위한 페이스 조절, 동시에 자신의 영화 세계를 진폭시키기 위한 실험의 단편(単片)들이기도 하다. 하마구치는 첫 상업 영화 ‘아사코’를 만든 후, 압도적으로 부족한 시간을 경험한 뒤 ‘앞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 제작의 호순환을 위한 단편 영화’를 이야기했고, 배우와 배우 사이 무언가가 벌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그의 영화는 압도적으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난, 보다 며칠 전 보았던 홍상수의 ‘소설가의 영화’ 속 준희의 영화를 떠올렸는데, 이런 게 아마 우연일까.
사실 우연이라면 바로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업됐을 ‘우연과 상상’은 보다 내밀하고 작게, 하지만 그래서 보다 과감하게 현실로서의 우연, 거의 현실 곁에서의 상상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과격한 줌업을 동반한 두 차례의 클로즈업. 착각을 우연의 자리로 끌어 놓는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단편이라 더 크게 울리는 파장. 아무튼, 난 하루키의 여자, 나를 잃어버린 나의 스토리가 짙게 드리워진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우연을 충실히 상상하는 바로 다음작, ‘우연과 상상’이 더 맘에 들었는데, 어쩌면 이를 영화와 영화가 되려하는 것, 그 경계면의 안과 밖이라 말해볼 수 있을까.
‘우연과 상상’은 ‘마법’, ‘보다 불확실한 것’으로 시작하고, 여주는 머리를 짧게 잘라 알아보기 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꽁트가 시작한다’의 츠무기란 걸 이내 알아차렸고, 후루카와 코토네. 왜인지 맥스웰 CF에 나왔을 것 같은 상대 남이 누굴까 답답했는데, 집에 돌아와 오래 전 사둔 브루타스 4-1/2월호를 펴보니 메인 화보에 떡 하니 도착해 있었다, 나카지마 아유무. 우연 혹은 상상. 어쩌면 이건 시차의 현실인 걸까. 그렇게 우연을 기다리는 맘은 늘 조급하고, 상상을 떠올리는 시간은 늘 내 것이 아니게 느껴질까. 그렇게 난 또 언제쯤 다음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게될까. 내가 계획할 수 없는 것, 그렇게 보다 더 불확실한 것. 삶은 늘, 아슬아슬이다.
계기라는 건, 시간이 흘러 무언가를 완료한 뒤 그만큼의 시차를 두고 완성되는 말일까. 다분히 딱딱한 어감에 자주는 쓰지 않지만, 회사를 나오고 벌써 수 천일, 크고 작은 계기의 순간은 적지 않게 지나간다. 그리고 대부분 그건 나의 마음 상태, 몸의 컨디션, 혹은 그 날의 기분에 따라 행동이 되기도, 되지 않기도 하는데,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 계기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건 ‘일단은 시작.’ 어찌됐던 가장 첫 번째의 실천이다. ‘시작은 반’이란 말은, 그런 의미에서 그만큼 틀리지 않다.
코로나가 시작하고, 몇월 며칠에서의 시작인지도 모르는 날들을 수 백일 보내며, 지금을 기록하자 생각했다. 겉으론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에 때로는 어제를 돌아보고, 가끔은 알 수 없는 내일을 기다리며, 어찌됐든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묶어, 또 한 번의 자기 출판을 완성했다. 제목은 ‘13월의 아침.’ 이미 4년 전, 당시엔 퇴사 후 불안에 모으기 시작한 글들을 엮어 불완전한 동시에 울퉁불퉁한, 이름부터 구멍을 품고있는 ‘도너츠 홀’을 만들었는데, 그만큼 힘은 덜 들었지만 여전히 버거웠고, 그 때와 다르지 않게도 헛점은 투성이다.
다만, 이야기하고 싶은 건, 온전한 문과계 인간으로서, 산보다 바다를 보는 사람으로서, 고작 워드와 약간의 이미지 툴 만을 갖고 만들어낸 한 권이고, 그렇게 부족함을 숨기지 않은, 하지 못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이야기라는 팩트이다. 그저 변명처럼 들릴 뿐일까. 불확실성의 시대, 종이를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맘에 POD 출판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고, 역시나 변명일지 몰라도 내겐 최선의 선택이라 느껴졌다. ‘마침내’ 그런 타이밍이 도착했다.
책정보, 13월의 아침 : 네이버 책 (naver.com)
말과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절, 오직 필요한 만큼의 이야기가 되고 싶어, 잊혀지고 싶지 않고 잊고 싶지 않아, 또 한 번의 책을 만들었다.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하지만 지난 코로나 2년, 세상은 어쩌면 그런 오늘같은 내일을 알려주었고, ‘13월의 아침’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세상, 이곳에 남은 유일한 희망을 기다리는, 너와 나만 아는 시절에 대한, 가장 진솔한 트리뷰트라 생각하고 싶다. 아직도 오지 않은 어느 아침을 기다리는. 오직 화자만의 이야기가 메아리치는. 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그러고 싶은. 13월의 아침. 지금은 며칠인가요. 일단은 부끄끄에서만, 판매중입니다.
그리고 때로 계기를 마무리 해주는 건, 그곳에 찾아온 또 하나의 계기이곤 하다.
뒤이어 이야기는
그리고… 내일은 당연히 찾아오지 않는다
29 역광에 비친, 너의 새해 얼굴
로, 끝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