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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2월 32일

우연이거나 필연이거나, EBR

세상은 왜인지 내 안에 미로가 되어 있었다, 우연히도 나로 태어나

by MONORESQUE




카페 모리츠플라츠에서 아도이를 인터뷰했다. 홍대 언덕길 카페에서 책에 관한 두 번째 외부 미팅을 가졌고, 계절이 바뀐 그곳에서 다시, 지난 달 한 번 좌초된 방송의 회의를 왜인지 처음으로 했다. 아마도 보다 전, 책을 위한 취재를 마치고 (아마) 세번째 만난 편집자와의 자리에서 난, 확인하지 않은, 어쩌면 못한 메일을 가슴 한 켠 품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며 왜인지 열어보지 못한,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 메일의 내용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바깥의 찬바람을 맞으며 자꾸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두 번 편집자가 바뀌고 연락을 받았던 강연은 돌연 취소되고, 시간이 흘러 다시금 좋은 제안을 받았지만 그 방송은 폐지가 되고. 어쩌면 난, ‘잘 굴러가지 않는 일’의 세월이란 걸, 알아버린 걸까. 어느덧 마흔 초입. 바람이 또 한번 거셌던 지난 월요일, 처음으로 방송 촬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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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누마 신타로 씨의 두 번째 책방 '츠키비()'와 책방이 입주한 '보너스 트랙', 그리고 도쿄의 책방 마을 시모키타자와


긍정은 힘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불안의 시작이다.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벌어지지 못한 좋은 일은 배의 아픔이다. 10년 넘게 일을 하며, 네 번이나 서로 다른 직장을 오가며, 때로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난 언제 한 번 희망이랄지, 낙관이란 이름으로 내일을 대비해본 적이 없다. 생각이 많은 탓에 머릿속은 단 1초도 쉬는 법이 없(었)지만, 그건 대부분 지금에 대한 정리,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정리, 그리고 내일에 대한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만의 계획, 그리고 또 정리였다. 그렇게 주저하는 오늘과 오늘. 건축가 안도 타다오는 ‘한 발 나가지 않으면 카운트펀치를 먹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난 그저 추운 겨울 날, 한 발을 나서기 위한 한 벌이면 충분했다. 최대한 나의 자리에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바람부는 겨울날, 가장 따뜻한 건 외투 주머니의 구석이고,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좋은 일은 내 곁에 도착해 있곤한다. 메일의 내용은 츠타야 면접의 불채용 알림이었다.


e0076481_62393076a2e19.jpg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시그니쳐 파란 사과는. 비록 지금은 덜 익고 씁쓸한 맛이 날지 몰라도, 그렇게 남아있는, 잘 익은 빨간 사과에서 볼 수 없는 희망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


사실 생각을 한들, 대부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일산으로 이사했다는, 실은 벌써 5년 전이라는 방송국은 주변이 허허벌판, 바람 만이 세찼고, 다 못 본 대본을 차 안에서 보겠다는 계획은 다 자지 못한 잠에 밀려 가방 속에 잠자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서 입어봤던 옷들은 준비해준 옷들로 갈아입고, 틈틈이 보려던 대본 담긴 태블릿은 꺼내지도 못하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조금 길어 유아인 무신사 티저 시절 머리를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거울을 보니 오래 전 유행했던 쉼표 머리가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난 더 말을 못했는데, 병원에서 나온 뒤 난 왜인지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그제야 떠오르는 말들에 난, 그저 그 만큼은 괜찮다 생각했지만, 그런 말들이란 왜 꼭 모두 다 끝이 난 뒤 떠오르는 걸까. 여전히 난 나와 나 사이의 시차에 이따금 놀라곤 한다.


https://youtu.be/5ySp-QYT4l8


아도이와의 인터뷰로 알게된 모리츠플라츠에서, 열어보지 못했던 메일을 끙끙대던 그 카페에서 두 번의 해가 바뀌고 다시 마주하게 된 내 책을 들고, 난 말하고 또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건 그냥 어설픈 실패일까. 아니면 진행중 아픔일까. 세상에 생각대로 굴러가는 일은 아마도 별로 없고, 그만큼 난 괜찮지만 또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 오는 4월의 두 번째 주, 방송에 출연합니다. 보(지마)세요. 매번 하지만 이제 그곳에 갈 때면 떠오를 기억이 하나 생겨버렸고, 그렇게 난 때로, 어제를 살아간다.


FIMO_1647680791090.jpg 어느덧, 1년 그리고2개월. 결국 실패인지 성공인지는, 내가 살고있는 동안에 알 수 없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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