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왜인지 내 안에 미로가 되어 있었다, 우연히도 나로 태어나
카페 모리츠플라츠에서 아도이를 인터뷰했다. 홍대 언덕길 카페에서 책에 관한 두 번째 외부 미팅을 가졌고, 계절이 바뀐 그곳에서 다시, 지난 달 한 번 좌초된 방송의 회의를 왜인지 처음으로 했다. 아마도 보다 전, 책을 위한 취재를 마치고 (아마) 세번째 만난 편집자와의 자리에서 난, 확인하지 않은, 어쩌면 못한 메일을 가슴 한 켠 품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며 왜인지 열어보지 못한,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 메일의 내용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바깥의 찬바람을 맞으며 자꾸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두 번 편집자가 바뀌고 연락을 받았던 강연은 돌연 취소되고, 시간이 흘러 다시금 좋은 제안을 받았지만 그 방송은 폐지가 되고. 어쩌면 난, ‘잘 굴러가지 않는 일’의 세월이란 걸, 알아버린 걸까. 어느덧 마흔 초입. 바람이 또 한번 거셌던 지난 월요일, 처음으로 방송 촬영을 마쳤다.
긍정은 힘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불안의 시작이다.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벌어지지 못한 좋은 일은 배의 아픔이다. 10년 넘게 일을 하며, 네 번이나 서로 다른 직장을 오가며, 때로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난 언제 한 번 희망이랄지, 낙관이란 이름으로 내일을 대비해본 적이 없다. 생각이 많은 탓에 머릿속은 단 1초도 쉬는 법이 없(었)지만, 그건 대부분 지금에 대한 정리,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정리, 그리고 내일에 대한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만의 계획, 그리고 또 정리였다. 그렇게 주저하는 오늘과 오늘. 건축가 안도 타다오는 ‘한 발 나가지 않으면 카운트펀치를 먹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난 그저 추운 겨울 날, 한 발을 나서기 위한 한 벌이면 충분했다. 최대한 나의 자리에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바람부는 겨울날, 가장 따뜻한 건 외투 주머니의 구석이고,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좋은 일은 내 곁에 도착해 있곤한다. 메일의 내용은 츠타야 면접의 불채용 알림이었다.
사실 생각을 한들, 대부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일산으로 이사했다는, 실은 벌써 5년 전이라는 방송국은 주변이 허허벌판, 바람 만이 세찼고, 다 못 본 대본을 차 안에서 보겠다는 계획은 다 자지 못한 잠에 밀려 가방 속에 잠자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서 입어봤던 옷들은 준비해준 옷들로 갈아입고, 틈틈이 보려던 대본 담긴 태블릿은 꺼내지도 못하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조금 길어 유아인 무신사 티저 시절 머리를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거울을 보니 오래 전 유행했던 쉼표 머리가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난 더 말을 못했는데, 병원에서 나온 뒤 난 왜인지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그제야 떠오르는 말들에 난, 그저 그 만큼은 괜찮다 생각했지만, 그런 말들이란 왜 꼭 모두 다 끝이 난 뒤 떠오르는 걸까. 여전히 난 나와 나 사이의 시차에 이따금 놀라곤 한다.
아도이와의 인터뷰로 알게된 모리츠플라츠에서, 열어보지 못했던 메일을 끙끙대던 그 카페에서 두 번의 해가 바뀌고 다시 마주하게 된 내 책을 들고, 난 말하고 또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건 그냥 어설픈 실패일까. 아니면 진행중 아픔일까. 세상에 생각대로 굴러가는 일은 아마도 별로 없고, 그만큼 난 괜찮지만 또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 오는 4월의 두 번째 주, 방송에 출연합니다. 보(지마)세요. 매번 하지만 이제 그곳에 갈 때면 떠오를 기억이 하나 생겨버렸고, 그렇게 난 때로, 어제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