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2월 32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Jan 08. 2022

역광에 비친, 너의 새해 얼굴

만나지 않고 만나는 시절,우린 어떻게 '함께'일 수 있을까




지난 가을,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담당 에디터를 여태 만난 적이 없다. 그와 관련된 이들도 메일, 그리고 전화로 몇 번 이야기는 주고받았지만, 얼굴을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메일 박스에 쌓여간 이야기는 지금 이곳에 흘러 넘치는데, 그들은 어디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러고보면 지난 2년 잡지의 마감, 리포트 취재를 위해 연락을 하고 인터뷰를 했던 사람은 모두 비대면, 와이파이를 경유한 컴퓨터 스크린 너머에서였고 그런 ‘만남'에 기억은 별로 자라지 못한다. 그 중 몇몇은 미안하게도 이름 조차…어느새 가물가물하다. 

며칠 전 종종 주문하는 덕에 핫도그집 사장님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었는데, 그들과 난 형식적인 인사 조차 나누지 못했다. 만나지 않고 만나는 시절, 우린 어떻게 ‘만남'을 할 수 있을까. 한 해 모든 인연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절, 문득 지난 시간이 무심하게 스쳐갔다.




얼마 전 레터를 발행하며, 코로나 이후, 자택근무와 텔레워크를 말하는 시절의 ‘워크 라이프'를 이야기하며, 난 왜인지 나와 같은 사람, 오래 전부터 방 안에 노트북을 켜고 회사가 아닌 카페에서 서너 시간 업무를 하는, 소위 프리랜서, 그들의 ‘오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사라지고 ‘뉴노멀’로 새단장을 하는 오피스가의 이야기를 하며 난 어쩌면 그곳에 없는 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하는 방식이 다변화되고 회사가 꼭 회사가 아니게 되고, 말하자면 ‘일하는 곳'이 곧 회사와 다름없는 시절의 전환 속, 어김없이 ‘어색한 기시감’을 느껴버리는 사람들. 동시에 재택 근무가 결코 자유롭지 않고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소원해졌다는 뉴스는...‘어느 나라 이야기인가' 싶은 사람들. 

업무의 디지털화, 부업의 확대, ‘프리 어드레스'란 신조어마저 등장하며, ‘이러다 모두가 프리랜서가 되는 거 아냐'싶은 시절에, 각자의 사정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프리랜서'였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그렇게 나만 없는 세상. 혹은 보이지 않는 시간. 두 번의 회사원 시절을 지나 프리랜서로 활동중인 도쿄의 코타니 씨는 한 인터뷰에서 “필요한 건‘보이게 하다, ‘보이게 하다'가 중요해요'”라고 이야기했다.



코로나로 인한 임시 방편, 업무 효율을 위한 방책, 시절의 변화에 부응해 시작된 프리랜서도, 이도 저도 아닌, 지극히 개인적 사정에서 프리랜서가 된 나의, 어쩌면 너의 경험에서 이야기하면, 프리랜서란 현실상 자유의 ‘프리'보다 ‘슈가 프리'거나, ‘카페인 프리'의 '프리', 모든 게 텅 비어있는 상태로서의 ‘프리'에 가깝다. 출퇴근 시간도, 업무 스타일도, 계약직이라면 정해진 기간이야 있겠지만, 언제 어디서 ‘일'이 시작될지 예측 불가능한 패턴의 라이프는 어느 무렵 ‘일’의 자리를 써넣어야할지 매번 난감하고 만다. 일과 일상의 분리가 보다 좋은 질의 삶을 위한 방안처럼 얘기되고 있지만, 애초 그렇게 분리해야 할 일이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프리랜서란 삶 속에 일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애씀에 가깝고, 그렇게 일은 곧 일상, 일상을 마련하기 위한 절대 조건일 때가 안타깝게도 빈번하다. 그야말로 무엇도 규정하지 않는 ‘프리랜서'란 말 그 자체가 ‘무엇도 규정할 수 없는 삶을 만들어버렸다.’ 휴가 한 번, 약속 한 번 맘대로 잡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일생. 이건 비단 한두번의 투정이 결코 아니고, 숫자가 지워진 달력이 걸린 방에 숫자를 갖지 않은 시계가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는 인생의 풍경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다. 1년 365일을 살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다. 회사에 다녔다면 무언가 연말 정산 비슷한 업무들을 처리하며 아마도 하지 않았을 ‘텅 빔'에 대한 고뇌가 연말 한 해가 저물어가는 즈음 어김없이 비집고 들어온다. 기억을 떠올려 한 해를 돌아보려 해도 어제가 그제인 것 같고 올해의 일인줄 알았더니 알고보면 몇 해 전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란 어김없이 ‘오늘'에 충실한 동물인걸까 싶기도 하지만(그저 나의 기억력 탓?), 또 한 번의 ‘내일'을 위해 지금 나에겐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오늘의 나를 설명해주는 무언가, 너에게 나를 기억하게 해주는 무언가. 올해는 수첩을 (비대면) 아마죤에서 구입한 탓에 ‘day-free’, 1년을 365일로 쪼개놓지 않은 버젼이었는데, 이건 어쩌면 코로나 시절을 반영한 우연일까. 아니, 그보다 세상이란 결국 ‘오늘의 합계', 내게 주어진 건 고작 ‘오늘' 단 하루라는 걸까. 그렇게 매년 마지막 밤, 어제는 늘 알 것 같지만 아득하고, 내일은 가까이 있는 것 같아도 결국 텅 비어있을 뿐이다.


2021년 개그맨 '하라이치'와 함께한 카운트다운, 그리고 2022 아직 오지 않은 날을 기다리는 시간은...


계획을 세운다. 하지 못할 일들을 계획한다. 하지도 못할 일을 뭐하러 궁리하나 싶기도 하지만 계획을 위해 수첩을 뒤지는,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상상하는 '부러 생겨난' 시간을 좋아한다. 요즘같이 생활 패턴이 엉망일 때면 그 계획인란 나의 머리 밖을 나와보지도 못하고 끝이 나지만, 계획을 한다. 그리고 이건 오늘에 대한 변명...이라기 보다 두려움을 잊기 위한 주문에 월등히 가깝다. 그러니까 그 정도의 루틴이 나에게도, 프리랜서의 5년을 살고있는 내게도 작동한다. 오직 내일을 살기위한 계획. 오늘과 오늘을 연결해주는 ‘기다림.’ ‘아무것도 없음'을 가시화하기 위한 장치. 그렇게 난 연락이 뜸해진 너를 잊지 않기 위해 수첩에 메모를 하고, 글을 쓰는 것처럼 하루를 살고 하루를 사는 것처럼 글을 쓴다. 지난 해 ‘이 책이 끝나면 여름이 끝나있을까' 생각했던 날의 데자뷰와 같이, 그렇게 어제를 반복하고 나아가는 한 걸음. 

매년 연말이면 어느새 지난 수첩을 뒤지고 있는 건, 이런 나도 모를 나의 ‘습관'이었을까.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있는. 올해는, 아니 지난 마지막 날엔 ‘천재들의 일과'라는 신년에 어울릴 법한 타이틀의 책을 뒤적이고 있었고, 대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런 구절을 만났다. 


“매일 글을 쓰면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안심하게 되고, 나쁜 일은 어느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다음 날 다시 쓰기 시작할 때 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건 그것. 다음 날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제를 잊지 않는 것. 그 날의 온기를 기억하는 것. 산다는 건, 단절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나와 너를 놓치지 않으려는 애씀의 반복은 아니었을까. 어느새 멀어진, 뜸해진 너와 나의 시간에 아직 이름은 없고, 오지 않은 날들을 떠올리며 난 두고온 ‘오늘'을 생각했다.


https://youtu.be/p9ZKu1y6Jmg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내일을 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