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Sep 28. 2022

'독서'가 된 책방,
미래를 팔다

책 읽는 일상도 살 수 있나요? 도쿄의 작은 책방, 후즈크에 fuzkue




질량 보존의 법칙이 아직 이곳에 존재한다면, 남은 건 이제 희망일까. 코로나가 시작하고 우린 수 많은 걸 잃었고, 또 아마 무언가를 얻었다. 많은 것들이 취소되거나 멈춰선 시절, 내일은 새삼 기다림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당연하고 평범해 보이지도 않던 작고 작은 일상은 와중에 보지도 못한 가치로 빛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내일은 가까이 또 멀리, 이곳에 있지만 있지 않아, 우린 무한의 기다림에 빠져버렸는지 모른다. 지켜지지 못하는 약속, 지연되는 만남, 기약없는 기다림. 우리가 정말 잃은 건, 어쩌면 ‘내일’이었을까. 



책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때로는 밥도 먹고 가끔은 전시를 보거나 심지어 잠을 자고. 지난 몇 년 장르를 넘나들며 다종다양한 책방이 등장한 것도 이젠 대수롭지 않지만, 도쿄의 작은 책방 ‘후즈크에’는 시간을 판다. 책방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판매용 책이 그곳엔 없고, 오직 책을 읽는 시간, 독서의 행위 만이 그곳에 이뤄진다. 이름하여 ‘책을 읽을 수 있는 가게, ‘후즈크에(fuzkue)’이다. 책을 읽는다는 게 뭐 특별한 일도 아닌데, 지금이라도 어디서든 읽을 수 있는 게 책인데, 도쿄에는 오직 그를 위한 가게, 그런 책방이 있다. 이곳에서의 하는 일이라면 오직 독서, 당연스레 책의 페이지를 그저 넘기는 일이다.

심지어 코로나가 시작하고 많은 가게들이 ‘하지 못함’ 속 ‘할 수 있는 것’, 말하자면 임시대책이거나 임기응변을 발휘할 때, 이 책방은 설마, 미래를 팔기 시작했다. 돌연 끊겨버린 손님 발길을 만회하려 책방들이 온라인에서 분투하는 시절, ‘후즈크에’가 시작한 건 가상의 힘을 빌려 오늘을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약속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사지 않고 읽는 가게라면 가능한 일일까. 도쿄도 시부야구 하츠다이(初台)에 위치한 ‘후즈크에’는, ‘언젠가 가게될 fuzkue권’이라는, 디지털 예매권을 팔기 시작했다. 그게 아마 코로나가 시작하고 두 번째 봄, 2020년 4월의 어느 무렵이었다. 


막연한 내일이 아닌, 

아주 조금 앞의 미래



모든 게 부정형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간이었다. 보고 싶었던 밴드의 라이브 공연은 여전히 막힌 하늘길에 애지감치 포기를 했고, 준비하던 일들은 줄줄이 연기되거나 없던 일이 되었다. 일본엔 다시 한 번 긴급사태선언이, 한국에선 하양 곡선을 그리던 확진자 수가 또 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어느 하나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일상의 시작, 그 1일은 사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방문을 꼭꼭 닫고 최대한 집안에서 24시간을 해결하는 일. 당장 오늘을 살아내기에 애를 쓰면서도 정작 그 오늘을 마주하지 못하고 보내버리는 작은 비극. 어쩌면 그 시절의 가장 애로사항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인한 우리 모두의 ‘결정 장애‘였는지도 모른다. 기다림만이 지체되는 시간에 내일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고, 내일이 온 줄도 모르고 내일이 그렇게 스쳐만갔다.

하지만 코로나 벼랑 길, 발발 떨던 오늘 그 어느 구석에 도착한 이 티켓은, 어딘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가게될 후즈크에권’이라는, 도쿄의 작은 책방이 팔기 시작한 이 예매권은 돈으로 가질 수 ‘있는’ 앞으로의 오늘’에 다름 아니었다. 부정이 아닌 긍정형.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오늘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가게될 미래의 하루를, 이 티켓은 그렇게 약속한다. 책방의 주인 아쿠츠 타카시는 티켓을 소개하며 ‘아주 작은 기다림’이란 말을 했는데, 난 티켓으로 손에 넣은 그 언젠가의 미래가 왜인지 실감이 났다.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을 살고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아주 조금 앞의 기다림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니까 내일이라는 막연한 예정형보다, 미래라는 기다림의 희망형. 이 문장의 모든 말들이 당시의 내겐 소중히 느껴졌고, 아주 조금 앞의 미래를 산다는 것. 작은 기다림 하나를 구매하는 일. 그리고 다시 한 번 기다림을 간직하는 행위. 이건 곧 내일을 희망하는 일이었고, 그렇게 믿음을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새삼스럽게도 우리에겐 아마, 이런 게 필요했다.



그런데 사실 이 티켓의 상세 내역이란, 여느 상품권이나 선불 티켓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2천엔 짜리가 1장, 4장, 10장 세트로 판매되고, 유효 기간은 10년, 좀 길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티켓은 산술적 가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가령 상품권이 돈과 상품의 직접적 거래 관계라 한다면, 아쿠츠 씨의 이 티켓이 판매하는 건 결코 값으로 책정하기 힘든, 아니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차적 재화적 가치라면 책방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티켓이 소구하는 건 무엇보다 미래, (돈으로) 보장된 기다림,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 다름아닌 희망이었다. 달리 이야기해보면 그 무렵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고도 실감하지 못한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아득해진 내일을 다시 기다리는 마음. 아쿠츠 씨의 이 티켓이 이렇게나 특별힐 수 있는 건, 그 무렵 희미해진 현실의 감각을 새삼, 상기시켜주어서가 아닐까. 

희망이란, 미래와 내일이란 형태를 갖지 않은, 눈으로, 손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바보같게도 우리의 일상이란 그와 같은 ‘보이지 않음’을 증명해줄 무언가를 늘, 필요로 한다. 당장 코앞의 내일은 몰라도 책을 읽으러 집밖을 나서는 하루란 얼마든지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조금, 확신할 수 있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해보면 2014년 도쿄 하츠다이에 처음 문을 연 ‘후즈크에’는, 책을 팔지 않는 책방, 그리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가게이다.


책이 아닌, 

책과의 시간을 파는 가게



'미래를 파는 책방.’ 어딘가 동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문장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책방을 쉽게 상상을 할 수는 없다. 다만 '후즈크에'라면 가능하다. 근래 들어 다종다양의 심리스(seam-less)적 변화가 기존의 책방을 몰라보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후즈크에’는 단연 유니크하다. 우선, 이곳은 책을 팔지 않는다. 아쿠츠 씨가 좋아하는 책들(주로 남미 문학)이 진열되어 있어도, 소위 비매품. 볼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책방이 집중하는 건 (다른) 책방에서 산 책을 읽는, 바로 독서의 환경이다. 조금 부연을 하면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쾌적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후즈크에’는 제공한다. 오픈 당시의 콘셉트가 ‘혼자서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단 걸 돌아보면, 여기서 중요한 건 별로 책이 아니라 엄연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느긋하게 책을 읽고 싶어도 그게 기분 좋게 이뤄지는 곳이 좀처럼 없어요. 주변 소음에, 여타 방해물에 몇 번이나 실패를 하다, 독서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쿠츠 씨는 오래 전부터 이런 '책을 집중해 읽고 싶은데 어디에도 그런 곳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고민을 했고, 그렇게 책방 아닌 책방 ‘후즈크에'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성공하지 못한 독서의 시간이 이 책방을 만들어낸 셈이다. 책방, 그 후의 시간이 그곳에 그렇게 흐른다. 



그래서 ‘후즈크에’는 오직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에 집중한다. 애초 책을 읽을 수 있는 가게란 아리송하기만 하지만, 그렇다면 책을 읽을 수 없는, 방해된는 일상의 요소들을 하나둘 떠올려 지워보면 보다 쉽게 그려질 수 있다. '후즈크에'는 ‘책을 읽다’ 그 조용한 행위에 장해가 되는 것들을 철저히 차단하며 독서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꾸려간다. 말하자면 일종의 소거법에 의한 설계이다. 그래서 여기엔 판매용 책 대신 지켜야 할 룰, 규칙이 여럿 있는데, 가령 수다 금지, 노트북 사용 자제, 가급적 혼자 방문과 스마트폰의 적절한 사용 등. 돈을 내고도 바짝 긴장을 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아쿠츠 씨는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내용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몇 시간이고 공부를 하거나 수다를 떨고, 맘껏 소리를 내도되는 카페를 떠올린다면, 크게 오산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란, 아마도 이런 곳이었다. 그에 더해 전직이었던 킷사뗑 운영 경험을 살려 아쿠츠 씨가 직접 커피도 내리고, 간단한 요리도 제공, 심지어 칵테일과 몇몇 위스키 등 알코올 음료도 마실 수 있다. 즉, 책을 읽다 커피가 생각나거나 허기가 질 때, 술이 마시고 싶어 질 때도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아쿠츠는 이를 ‘독서의 의식주’, 달리 말하면 ‘책을 읽는 시간의 인프라’를 갖추는 일이라 말한다. 


“책을 읽으며 지내는 사람을 이미지화 했을 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설계한 감각이에요. 책을 읽는 사람의 행복한 시간이 먼저 있었고, 이후는 브레이크 다운하는 작업이었죠." 


소거법의 뺄셈 이후, 로직의 덧셈이 더해진다.



가게를 꾸리는 입장에서,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다소 생경한, 앞뒤가 바뀌었거나 전후가 틀린 상황의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하지만, 이렇게 책과의 시간을 위한 자리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에 최적화된 책방이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가시화의 작업이 곧 ‘후즈크에’를 완성해가는 방식인 것이다. 사실, ‘후즈크에’에서 2, 3천 엔을 지불하고 보내는 시간이란 잘 정돈된, 맛있는 디저트와 음료가 갖춰진 어느 호텔 라운지에서도 가능할 일이다. 혹은 아늑한 오후 너와 나의 방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라는 건 함께일 때 비로서 드러나고, 여기엔 책을 읽는 내가 아닌 너, 타인의 고요한 시간이 함께한다. 방해되지 않는 타인과의 조용한 오후가 책장과 함께 흘러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가게'라 에써 명명하게 드러나(내)는 시간, 그리고 공간이 이곳에 있다. 보이지 않지만, 손에 잡을 수도 없지만 책을 경유해 만끽하는 편안한 시간의 체험을 '후즈크에'는 제공, 그려내고, 푸드 메뉴가 하나둘 테이블에 놓이며 만들어지는 책과 너와의 시간을, 우린 그곳에서 만난다. 그 시절 우리가  잃고, 또 기다리던 장면, 순간, 그리고 그 일상을. 

코로나가 시작되고 모두가 우왕좌왕 하던 가운데 후즈크에가 ‘미래의 티켓’을 판매할 수 있었던 건, 이렇게 오랜 시간 숙련된 ‘보이게 하다’의 작업, 그 결실은 아니었을까. 도쿄에선 지금, 형태도 없는 독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그 시간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독서의 구실을 설계하다



책을 팔지 않는 책방, ‘후즈크에’의 ‘보이게 하다', 이 가시화의 작업은 코로나 이후 왜인지 더욱 활발해진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배달을 하거나 테이크아웃에 허둥댈 때, ‘후즈크에’는 집에서의 독서, #자택후즈크에 란 걸 시작했다. 책을 팔지 않는 책방은 과연 팬데믹 시대 무얼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쿠츠 씨가 떠올린 건 하츠다이의 가게 ‘후즈크에’를 그대로 집 안에 데려오려는 시도였다. 물론 이건 그닥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줌술자리랄지, #온라인콘서트, #함께영화봐요 등 코로나 초기, 우린 수많은 할 수 없는 집밖의 일상을 해시태그를 달아가며 집 안에서 즐기기 시작했으니까. SNS 속 #를 달고 등장한 일상의 조각들은 만남을 잃은 시절, 그럼에도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암호’와도 같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와 같은 ‘온라인 대체 일상’들이 대부분 일시적, 일회적으로 어느새 끝나버린 것과 달리, ‘후즈크에’가 제안한 ‘집에서의 독서’는 세월의 흐름을 따라, 시대의 변화에 맞춰 확장하고 변용되어 갔다. 

가령, 행동 제한이 완화되기 시작하며 집이 아닌 곳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쿠츠는 ‘자택’이란 말을 지우고 보다 넓은 의미의 ‘시간’을 가져와 #후즈크에시간 으로 그를 대체했다. 보다 광의의 ‘후즈크에的 시간’을 제안한 셈이다. 이번엔 거리의 ‘후즈크에’를 온라인을 경유해 나의 집, 그리고 시간으로 데려왔다. 아쿠츠는 그 무렵 “이동이 점점 늘어나는 요즘 다양한 장소에서 책을 읽는 일상을 생각하면 보다 ‘열린 언어’(開けた言葉)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꽁꽁 닫아두었던 방문을 살며시 열고 밖을 살피는 것과 같이, 자택 안에 움츠렸던 독서의 시간은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후즈크에시간 란 꼬릿말을 달고 SNS 상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나의 방에 너의 방에도, 그리고 또 다른 어딘가에도 '후즈크에'의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역으로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가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어쩌면 '후즈크에'는 가게가 아니기도 한 걸까. 달리 말해 '아니여도 된다'는 이야기일까. 애초 '후즈크에'가 시작된 건 '최적의 독서 환경'을 위함이었고, 이는 곧 '최적의 독서'가 이뤄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후즈크에'的이라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 경험으로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기다리는 것처럼. '후즈크에'는 책을 읽는 편안한 시간, 자리, 그리고 환경으로 드러나는 가게이기도 하다. 아쿠츠는 이후 '책을 읽을 수 있는 음악으로 친구이자 뮤지션 newson과 CD를 발매, 단골 커피숍 Obscrura의 도움을 받아서는 원두 콩을 개발, 판매하기도 시작했는데, 코로나가 시작하고 '후즈크에'가 잃어버린 건, 아마 책을 읽는 계기, 독서를 하게하는 일상의 이런저런 동기들은 아니었을까. 바이러스에 허둥대느라 책 읽을 여유 조차 잃어버리는. 아쿠츠는 코로나 3년을 지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후즈크에가 결국 제공해왔던 건 역시 '독서를 하기위한 구실'이었던 것 같아요." 해시태그를 하나 적으며 '책을 읽자'고 다짐하는 순간, 트위터의 누군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지난 밤 읽다 덮어둔 책을 떠올리는 일, 그리고 곁에 누군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덩달아 왜인지 독서가 하고 싶어지는 마음. 일상이란 대부분 물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바라볼 떄 수많은 물거품은 무수한 작용과 반작용의 소용들이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독서의 스위치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해요. 해시태그도 그렇지만 '지금부터 책 읽을거야'의 기분을 갖게하는 계기가 바로 '후즈크에'라 생각하게 됐어요. 가게를 예로 말하면 혼자가 아니라 곁에 누군가 독서를 하고있다는 건, 어딘가 보호를 받고 있다는 감각을 주잖아요. 나의 독서가 긍정된다는 기분을 내가 아닌 타인의 독서가 젼해준다고 생각해요. 그런 '함께'란 감각과 동시에 독서를 시작하는 스위치를 제가 제공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굳이 점포에 매일 필요가 없겠다 판단한 거죠."


'자택후즈크에'가 '후즈크에시간', 책을 읽을 수 있는 음악과 커피로 확장하는 사이, 아쿠츠는 하츠다이에 이어 시모키타자와(下北沢)와 니시오기쿠보(西荻窪)에 각각 2호점과 3호점을 열었고, 그렇게 공간, 시간을 초월해 보다 더 일상에 다가선다. 그리고 이건 아마, 방역을 위해 우리 일상이 문을 닫았던 시간, ‘후즈크에’는 보다 더 널리, 많은 곳에 존재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이 보장되는 가게, 그곳에서 안과 밖,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느 책방의,

부러 약속하지 않는 미래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건 내 일상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단골 카페가 코로나로 영업을 멈춰 갈 수 없게 되는 건 나의 일상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치고 또 끼치지 않을까. 물리적 형태의 재화를 매개하지 않는 아쿠츠 씨의 책방, '후즈크에'의 소위 '코로나 극복기'는 책방, 나아가 가게와 함께하는 일상이 의미하는 바를 새삼 감각, 생각하게 한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했든 '후즈크에'는 가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에 얽매이지 않으며 존재하고, 그렇기에 가게의 문을 열고 나와 흘러가는 우리의 일상, 하나의 책방이 우리 삶 안에 관계하고 작용하는, 말하자면 현실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의미를 드러낸다. 물론 이는 그의 책방이 애초 '책을 사다'라는 일회성 행위로 끝나는 방식의 비즈니스가 아닌, '책을 읽다'라는 비교적 지속성을 가진 행동을 기반으로 한 모델의 장사이기 때문이지만, 코로나로 돌연 멈춘 일상에서 우리가 그리워했던 건 바로 이와 같은 '지속하는 일상'의 현재형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보다 직접, 실감할 수 있는.

'자택후즈크에'를 '후즈크에시간'으로 확장하며, 아쿠츠 씨가 새로 추가한 건 또 하나 있다. 바로 '후즈크에시간'을 보다 더 '보이게 하기' 위한 매개로 지도를 만들었는데, 블랙 배경에 파란색 세계 지도가 그려져있고, 독서를 하는 사람이 지도 위 노란 불빛을 하나씩 피우며 서로의 독서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내가 있는 곳을 클릭하면 그 자리에 노란색 불빛이 켜진다. #자택후즈크에 에, 지도라는 이미지가 하나 더해졌을 뿐이지만, 그만큼의 감각이 독서의 시간으로 체험된다. “독서라는 행위를 지도 위 점재(点在)하는 빛으로 보이게 하자고 생각했어요. 별 거 아닐지 모르지만, 독서가 피운 빛을 통해 온화한 이어짐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아쿠츠는 이렇게 말했다. 켜진 빛은 6시간 후 사라지고, 각자의 독서 시간은 그렇게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함께일 수 있다. 혼자이지만 고독하지 않은 것, 곁에 없지만 함께라는 것. ‘후즈크에’는 세 곳 모두 10석. 쾌적한 독서 환경을 위해 좌석 간 거리는 충분하다 하는데, 이 지도를 그런 ‘거리감의 일상’, 그의 구현이라 느낀다면, 나의 과도한 해석, 망상일까. 보이지 않는 걸 본다는 건, 애초 가장 주관적 일상의 현재형일지 모른다.



코로나로 영업에 영향이 생기기 시작하던 2020년 3월, ‘후즈크에’는 홈페이지에 매일의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부분의 상점들이 ‘OO까지 휴업입니다’와 같이 일방적 공지를 전했던 것과 달리, 매우 애매모호, 두루뭉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로 안내를 했다. ‘비가 그쳤거나 문을 열어도 될 것 같은 날에 문을 엽니다’랄지, ‘만들 수 있는 거라면 상황에 따라 만들어드려요’와 같이.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매우 무책임한, 불성실한 말들이다. 하지만, 당장 내일도 내다볼 수 없는 시절 약속은 얼마나 약속일 수 있을까. 코로나 시절을 보내며 우리의 수많은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불확실함의 시대, 약속의 역할, 가치란 새삼 다시 쓰여져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떤 약속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때란 감각이 있어요.” 아쿠츠는 2021년 4월 영업 상황을 업데이트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데, 만남이 곧 위험이 되기도 하는 시절, 약속은 곧 지켜야 하는 의무, 부담, 삶의 짐이기도 하다. 

다만, 약속이, 여전히 만나게 될 거라는 기다림과 설렘으로 존재한다면, 지금 그를 이루어주는 건 오히려 약속하지 않을 자유, 약속하지 않는 약속은 아닐까. 때로 최선의 약속이란, 그저 서로의 근황을 함께하는 일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언젠가 가게 될 fuzkue권’은 장당 2500엔, 유효 기간은 10년이지만, 꼭 10년이 아니기도 하다. 아니어도 된다. 아쿠츠는 “티켓을 샀다는 사실, 그리고 본인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면 문제 될 거 없겠죠”라 이야기했다. 무어라 단정하지 않는 것. 어차피 내일이란 불확실하고, 코로나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건 무엇보다 지금, ‘오늘을 산다’는 소중함이었다. ‘약속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조금 앞의 미래를 공유하는 것. 목적을 가진 독서는 지치기 마련이고, 내일을 쫓는 오늘은 살아내기 바쁘다. 아주 조금 앞의 미래를 파는 그 책방의 티켓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책 읽는 것처럼 살아가는, 목적을 갖지 않는, 또는 서두르지 않는 시간, 즉 ‘fuzkue的 하루’를 새삼 제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내일'을 향해. 

코로나 언덕을 넘으며, 그저 책을 읽는 시간이 흘러간다. 도쿄에선 요즘 ‘책 읽는 내일’을 돈으로 살 수가 있다. 그렇게 내일이, 그곳에 있다.




모든 사진의 출처 ©fuzkue 2021, 2020년과 21년, 서면과 줌, 모두 두 차례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