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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걸

우리는 모두 그녀를 모른다고 말했다

by MONORESQUE

제니(아델 에넬)는 의사다. 벨기에 리에주 지역의 조그마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며 생활한다. 밤 늦게까지 일하고 일이 끝나면 방문 진료도 한다. 그러니까 꽤나 착실한 의사다. 적게 벌어 적게 쓰는 것처럼 보인다. 별 거 없이 평온하고 고요한 생활이다. 하지만 추위가 스산하게 밤을 죄어오던 어느날 그녀는 벨을 외면한다. 문을 열어주려고 일어나는 인턴 의사 줄리안(올리비에 보노)을 말린다. 진료가 끝난지 한 시간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원리와 원칙을 지키는 그녀에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튿날 그녀는 끔찍한 비보를 듣는다. 한 흑인 소녀가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모니터 화면의 소녀는 제니의 병원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급박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좌우를 돌아보며 응답을 애타게 구한다. 제니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린다. 마감 시간이라는 병원의 규칙이 한 소녀의 간절한 외침을 거절했다.


제니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게 그녀를 죽게 한 것만 같아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녀는 결국 스스로 수사를 하기로 한다. 죽은 소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환자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본 적이 없냐"고 묻는다. 원리, 원칙에 따랐던 일이 엄청난 죄의식이 되어 돌아왔다. 사람들은 말한다. "몰라요, 없는데요, 본 적 없어요". 밤 길을 혼자 걷다 외롭게 죽어간 한 흑인 소녀를 모두가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니는 포기하지 않는다. 폭력배의 위협에도, 수사에 방해가 된다고 만류하는 형사의 말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좋은 병원의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하고 수사를 지속한다. 결국 소녀의 죽음에 얽힌 의문은 밝혀진다. 친 언니가 나타나 소녀의 이름도 알게된다. 사건은 종결된다. 그럼에도 다르덴 형제는 계속 묻는다. 이 소녀를 본 적이 있나요?


다르덴 형제의 질문은 단순히 소녀의 살인 사건만을 향하지 않는다. 제니의 병원에는 사회의 부조리한 제도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더러 방문한다. 여권을 보여달라고 할까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불법 체류자, 다리가 아파 사회 보장 카드 갱신을 받으러 가지 못하는 노인 등. 원리와 원칙이 규정한 틀 바깥에서 아파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감정을 외면한 세상과 무관심으로 가득찬 사회가 고발된다. 제니는 발작을 하는 환자 앞에서 당황하는 줄리안에게 "흔들리지 마, 휘둘리지 마'라고 말했었다. 감정을 억누르라는 소리였다. 이렇게 감정이 제거된 세상에서 제2의, 제3의 피해자가 나온다. 소녀의 외침을 외면한 건 제니 뿐만이 아니다. 소녀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은 건 우리 모두다. 우리는 모두 그녀를 모른다고 말했다.


소녀의 죽음으로 심히 충격을 받은 제니는 이불을 들고 와 병원에서 밤을 지샌다. 밤새 울릴지 모를 벨 소리, 전화 소리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다. 죄가 없음에도 애를 쓴다. 윤리의 문제다. 다르덴 형제는 우리의 윤리를 저격한다. 무관심 속에 폭력이 있을 수 있고, 원리, 원칙에 가려진 감정이 누군가의 희생을 낳을 수 있음을 얘기한다. 다르덴 형제의 비판 의식은 여전히 날이 서다. 그래서 일견 따뜻한 결말로 보이는 엔딩은 뒷목을 서늘하게 한다. 죽은 소녀의 언니와 포옹을 나누고, 다리가 불편한 노인에게 도움을 건네는 제니. 이들의 모습 위로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리가 시끄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그치치 않는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무관심의 소리로만 들렸다. 소녀를 보지 못했다고, 그런 소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다르덴 형제는 끝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 소녀를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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