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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27. 2017

따뜻한 우연이 비친 날

나를 산다는 것은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산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짐은 왜 이리 연약한가. 눈물까지 흘리며 다졌던 마음인데 왜 자꾸 흔들리나. 어제 많은 게 떨어졌고, 설마 했던 것마저 떨어졌다. 애써 일으켜 세웠던 마음은 어디 간 데 없고, 난 또 울고야 말았다. 한 시간도 넘게 멍하니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엄마도, 누나들도 고기 구워놨다고 밥 먹으라고 불렀지만 난 나갈 기분이 아니었다. 마음에 기력이 없었다. 그렇게 저녁이 흘렀다. 신문을 보고 운동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용케도 그랬다.


핸드폰의 사진을 봤다. 전에 쓰던 핸드폰의 메모리 카드를 끼워놓아 못보던 사진이 많았다. 신사동 사진, 잃어버린 반지 사진, 지워버리고 싶은 태국 출장 사진, 그리고 곰돌이 어릴 때 사진. 지나간 시간이 스쳐갔다. 그립고 아팠다. 돌이킬 수 없음에 한숨이 났다. 그리고 어느 영화의 포스터가 있었다. 언제 저장해놨지도 모르는 <태풍이 지나가고>의 포스터. '토다토닥 괜찮아 다시 꿈꿔봐도' 위로의 말인 줄은 알면서도 쉽게 마음이 녹아들지 않았다. 그냥 자기로 했다. 일단 이 말을 품에 안고서.


머리가 조금 아팠다. 나가고 십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다 오줌만 싸고 도로 누웠다. 넷째 누나, 막내 누나, 엄마가 차례로 와 밥 먹으라고 했고, 곰돌이 소리도 들렸다. 막내 누나는 병원 체육대회에서 받은 상품권을 내 곁에 두고 갔다. 어쩔 수 없이 주방에 가 밥을 먹었다. 오뎅 국과 두부부침, 계란 후라이를 먹었다. 엄마는 나가서 바람 쐬고 오라고 하셨고, 넷째 누나는 또 용돈을 주고 갔다. 내가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누나들도 다 애쓰고 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지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밥을 다 먹었다.


결심이나 다짐, 각오보다 삶을 움직이는 건 어쩌면 따뜻한 우연, 누군가의 고운 마음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강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지쳐 쓰러질 때도 있으니까. 엄마와 누나들, 고구마 그리고 어느 영화 포스터의 우연이 나를 구했다. 나는 내것이기도 하지만 온전히 나만의 것은 아니다. 나를 산다는 것은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산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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