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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이전의 생

그냥 달리기만 해도 되는 세상이 있었다

by MONORESQUE

엄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어떤 세상일까. 그리움에 이끌려 걷는 푸근한 길일까. 아니면 미움을 억누르며 울부짖는 아픔의 세계일까. 키타노 다케시 감독의 <키쿠지로의 여름>을 보고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 아이 마사오는 혼자다. 아빠가 세상을 뜬 지 오래라 혼자고, 엄마는 일하러 나가서 혼자다. 할머니가 돈부리, 오니기리를 만들어 주지만 혼자다. 기껏 찾아온 여름 방학에 친구들은 온 데 간 데 없어 혼자고, 그러니까 혼자다. 그가 혼자가 아니게 된 건 어느 정체 불명의 남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이 남자는 수상하다. 말로 치고받는 아내가 있지만 정처없이 돌아다니고 있어 수상하고, 직업이 없는 것 같아 또 수상하다. 엄마 찾아 떠나는 마사오의 길에 선뜻 따라가겠다는 것 역시 수상한다. 하지만 이들은 아픔도 슬픔도 없는 어느 세계를 유영하기 시작한다. 순수하고도 완전했던 어떤 세계로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계의 작은 세포들과 마주한다. 기적같은 순간이다.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주는 건 히사이시 조의 슬프면서도 맑은 멜로디 뿐이지만 둘은 거침없이 슬픔도 아픔도 없는 세계의 길을 이어간다. 가장 아름다운 로드 무비 중 한 편이다.


마사오는 정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이 소년에게 너무나 버겁다. 그는 땅을 보고 또 보면 엄마가 나타나기라도 할 듯 바닥만 응시한다. 하지만 이 소년에겐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은 아직 덜 자라고 미성숙해 서툴지만 그만큼 세상에 대범하다. 용기가 있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고,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태연한 자세가 일종의 묘한 기운을 낸다. 마사오는 수상한 남자의 말대로 잘도 행동하고 경륜장에서는 우승 말을 맞추는 재치도 발휘한다. <키쿠지로의 여름>은 마사오의 영화다. 제목의 여름은 마사오의 여름이다. 하지만 영화는 어느 순간 이 여정이 수상한 남자의 길, 그의 인생, 나아가 우리 모두의 어떤 연약한 세계의 길임을 드러낸다. 이 순간이 기적적이고 아름답다. 세상 한 쪽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세계가 기지개를 켜는 듯하다. 수상한 남자는 아마도 어릴 적 마사오와 마찬가지로 엄마를 잃었을 거고, 그 아픔에 현실에 어울리지 못한 채 살았을 거다. 그래서 수상한 남자는 마사오의 뒷면이다. 길가에 우거진 수풀, 풀숲의 개구리, 그리고 바다와 개천의 식물 등. 영화는 세상 한 곁에 조용한 작은 세계를 응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 작은 세계의 주인이다. 히사이시 죠의 음악이 응원한다. 세상에 이런 노스탤지어를 체험한 건 처음이다.


<키쿠지로의 여름>은 흉폭한 영화다. 겉으론 착하고 예쁜 영화처럼 포장을 하고 있지만 여기엔 착한 키타노 타카시 반대 쪽의 나쁜 요소가 두루 있다. 폭력, 야쿠자, 그리고 실패한 인생같은 것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순수하고도 착하며 상처 하나 없는 것들로 표현한다. 엄마에 대한 마음 덕택이다. 무덤덤하지만 친밀감이 배어나는 기타노 타케시의 얼굴은 이 세계의 기운을 지휘한다. 그는 직함으로서뿐 아니라 연기로도 이 영화를 연출한다. 말 끝마다 '나쁜 자식', '바보 자식'을 내뱉지만 이렇게 착한 욕설은 처음 듣는다. 그리고 찾아오는 어떤 슬픈 순간. 엄마가 생활하는 요양원에 찾아갔다 얼굴만 보고 바로 뒤돌아 나온 수상한 남자는 새 가정을 찾은 엄마에 실망한 마사오의 마음을 달래준다. 이미 지나온 이의 아직 당도하지 않은 이를 향한 배려의 세계다. 길가에서 만난 돼지와 대머리 남자, 그리고 시와 노래를 쓰며 유랑하는 거렁뱅이 남자를 우격다짐으로 시켜 게임을 함께 하고, 돼지 남자에게선 천사의 종이 달린 열쇠고리를 빼앗아 선물 하기도 한다. 돌이킬 수 없음과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의 동거다. 나는 이 불편할 것 같은 세계를 천사의 자장에서 그려내는 영화의 애씀에 눈물이 났다. 엄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애씀의 세계였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누구도 다시 걸을 수 있는 세계. 우리는 거기서 태어났다.


영화가 소중한 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를 응시할 때인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이 반복과 차이에서 바라보는 본질의 세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바람에 흔들리는 스산함 속에서 비쳐내는 이질의 세계같은 거 말이다. 그리고 키타노 다케시 감독은 방학이란 터울을 치고 어느 세계를 걷는다. 나아가 뛴다. 카메라는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을 터벅터벅 걷는 마사오와 남자의 뒷모습을 자주 비추고, 날개가 달린 베낭을 매고 뛰는 마사오를 함께 좇는다. 계속 걸음으로 인해, 달리고 또 달림으로 인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세계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이 대목이 또한 애달프다. 영화는 마지막에, 그러니까 정말 마지막 신에서야 수상한 남자의 이름을 알려주는데 그 울림이 진하고도 강하다. "키쿠지로지 뭐야, 이 자식아". 한참을 멈춰있었다. 이제서야 그는 자신을 드러냈다. 본인은 정작 태연하고 자약했지만 보는 이는 지나간 세계가 안타까워, 너무 커버린 자신이 안쓰러워 나아가지 못했다. 이 영화는 거짓말 투성이다. 키쿠지로가 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쇠고랑을 찰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거짓말을 써서, 애써 거짓말이라도 해서 우리를 착하고도 여린 세계로 들여놓는다. 영화의 힘이란 이런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이기에 천사가 찾아오고, 천사의 종이 울릴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는 영화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고 그 세상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어쩌면 키타노 타케시는 가장 여린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상처로 무뎌진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그게 우리 삶의 한 켠이라면 그건 그대로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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