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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그 후의 세계

<그 후>를 보았지만 여전히 나는 홍상수의 그 후가 보고싶다

by MONORESQUE

예고없는 등장이다. 영화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흑백의 주방을 비춘다. 웅장하고도 외로운 선율이 울리는 가운데 남자가 아무렇지 않은 듯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별 거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이 별 거 없는 일상의 풍경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다른 세계에 입장한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홍상수 감독의 스물 한번째 영화 <그 후>의 시작이다. <그 후>를 처음 알았을 때, 영화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 후'의 '후'가 궁금했다. 홍상수 감독은 항상 실체, 본질,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와 현실 이면의 곳을 느끼게 하는 작업을 해왔었다. 그리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이전의 세계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질 만큼 거창했고 종교와 신 곁에 다가선 듯한 인상도 줬다. 그래서 <그 후>의 '후'가 중요할 것 같았다. 말로 다 할 수 없고,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어쩔 수 없음에 매달려온 감독이 당도한 대답이 무엇일지 알고 싶었다. <그 후>는 홍상수 감독이 자신의 세계에 던지는 물음과 대답이다.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요)은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나와 짙은 어둠 속을 걷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오프닝의 웅장하고도 미칠듯이 슬픈 멜로디가 그를 뒤덮는다. 그는 어느 지하도 아래로 내려가는데 그 아래 존재할 것 같은 어떤 무섭고도 다가가선 안되는 세상이 감각을 기묘하게 에워싼다. 영화는 시간을 뒤섞는다. 순서에 상관 없이 장면이 편집되고 이야기의 흐름을 개의치 않고 장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영화에 현실과 현실이 아닌 세상, 실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공존한다는 것이고, 봉완은 그 실체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봉완은 괴롭다. 영화는 '요즘은 운동도 하지 않고'란 아내의 말 뒤에 달리기를 시작하는 봉완을 보여주는데, 이 달리기가 아내의 말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가 현실과 실체 사이에서 부딪히며 앓고 있다는 거고, 그래서 괴롭다는 사실 뿐이다. 봉완은 벤치에 앉아 소리내어 울먹인다. 봉완은 홍상수 영화의 세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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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중요한 대화 신 두 개가 등장한다. 하나는 봉완이 처음 출근한 아름(김민희)과 중국집에서 나누는 대화고 두번째는 봉완이 내연녀 창숙(김새벽)과 술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다. 아름은 묻는다. 왜 사는냐고. 봉완은 모른다고 답하고 아름은 다시 또 묻는다. 모른다는 것. 알 수 없다는 것. 세상은 실체의 껍데기다. 우리는 껍데기 속에서 밥을 먹고 똥을 싸며 잠을 잔다. 하지만 봉완은 그 실제의 알맹이를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뻔뻔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봉완의 아내는 그에게 뻔뻔하다고 말하고 창숙은 그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거짓말은 어쩔 수 없이 등장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와 철학가인 것 같은 사람의 초상화가 걸린 사무실에서 아름은 종교를 믿는다는 걸 에둘러 믿음에 관해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홍상수 감독의 대답이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은 마치 자신의 영화를 공격이라도 하듯 아름의 입을 빌려 발언한다. 실체가 알 수 없다는 건 그저 게으른 게 아니냐며. 뭐라도 믿을 것을 찾아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니냐며. 홍상수 감독은 분명 대답을 찾아냈다. 아니 대답과 조우했다. 그랬을 거다. <그 후>의 '후'는 실체의 눈물 이후 바라본 세상과 현실이다.


<그 후>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과 꽤나 다르다. 그의 인장과도 같은 반복과 차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찌질하고 비루하다고 표현되는 남자는 여전히 등장하지만 <그 후>가 주목하는 건 그런 파편적이고 껍데기 같은 게 아니다. 영화는 찌질함과 비루함의 이면, 그 원초적인 본연의 어떤 것을 담아낸다. 단, 이 반복과 차이는 후반부 딱 한 차례 등장한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방식이었던 반복과 차이를 다시 한번 가져와 대답을 풀어낸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름과의 또 한번의 대화에서 나온다. 창숙과의 관계를 끝냈다며 말하는 봉완은 아내가 딸을 영국의 고급스러운 파란색 원피스를 입힌 채 데려왔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냥 살자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름다움. 여기서 아름다움은 미적인 수사가 아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실체가 현실에 발현한 이미지며, 닿지 못하는 실체를 받아들이며 의지하는 하나의 삶이다. 아름은 봉완에게 편안해 보인다고 말한다. 죽음을 목도했고(극장전), 삶의 어둠을 겁내 문 앞에서 돌아나왔던(생활의 발견) 홍상수의 영화는 끝내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니까 <그 후>는 어찌할 수 없어 살아가는 삶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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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세계는 어찌할 수 없음의 대명사였다. 실체는, 본질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떠한 것으로도 담아낼 수 없어 그저 알 수 없는 모양의 그림만을 그릴 뿐이었다(해변의 여인). 반복과 차이의 사이에서 실체를 가늠해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선 두 번의 죽음이 아름의 입을 통해 두 차례 반복될 뿐 아름다움과 믿음의 말이 흘러 넘친다. 아름은 지금의 홍상수다. 그녀는 믿음으로 실체의 껍데기를 버텨낸다. 눈이 내리는 밤 택시 안에서 책을 읽다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현실에서 길어낼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눈은 실체가 현실에 떨구는 실체의 눈물이자 아름다움의 조각들이다. 더불어 봉완의 눈물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이 영화에서 두 차례 울부짖는다. 홍상수 감독은 이 눈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웅장하며 슬픈 음악이 흘러나오고 보는 이는 실체가 현실에 부딪히는 애씀을 느낀다. 이처럼 삶에 최선을 다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그렇다.


나는 <카메라의 클레어>가 <그 후>보다 먼저 오기를 바랬다.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카메라는 홍상수의 눈일 거라 생각했고, 거기서 자신의 모든 걸 다시 한번 드러낸 뒤 <그 후>의 이후를 그릴 것 같았다. 그는 <그 후>보다 <클레어의 카메라>를 먼저 찍었다. 하지만 <그 후>는 <클레어의 카메라>보다 먼저 다가왔다. 실패한 실체의 세상을 우리는 먼저 마주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살아간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 어찌할 수 없음을 부단히도 그려왔다. 하지만 그 세상,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엔 분명 아름다움이란 게 있고 우리의 본성, 천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영화는 희망을 찾아낸다. 봉완의 애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아름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대답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카메라는 인물로 발현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지점이다. 그동안 실체를 훑으며, 그 언저리를 사유하며 삶의 어찌할 수 없음을 얘기했던 감독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김민희)의 몸을 빌려 실체를 얘기한다. 시점이 바뀌었기에, 방식이 바뀌었기에 실체는 더 선명해졌고, 본질은 더 깊숙히 다가왔다. 홍상수 감독은 밤에 해변에서 실체와 마주했다. 본질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 후>는 <밤의 해변에서>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 후>는 실체의 언저리에, 조각들에, 봉완에 이별을 고하는 영화고, 동시에 아름다움과 믿음에서 대답을 찾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봉완과 아름의 영화다. <그 후>를 보았지만 여전히 나는 홍상수의 그 후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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