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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l 26. 2017

내 사랑

오드가 사랑이 되기까지

오드는 그림을 그린다. 어둠에 갇혀 온몸으로 애를 쓰며 그린다. 영화 <내 사랑>이 처음으로 건네는 건 어느 여자의 어두운 현실이다.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서 애달픔에 마음이 시려왔는데 역시나 영화는 애달프다. 첫 장면만으로, 그녀의 고통스러운 그림만으로 영화는 이미 할 말의 절반 이상을 한다. 몸이 불편해, 정확히 말하면 발을 절어 부모와 떨어져 이모와 함께 지내는 그녀는 남자에게도 버림 받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내 편, 아이는 몸이 기형이라 산매장됐다. 그렇다. 그녀는 버림받은 인생이다. 그러니 사는 게 녹록할 리 없다. 돈만 밝히는 오빠는 빚을 메우러 엄마의 집을 매각했고 오드의 흔적은 그와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기댈 곳이 없다. 연약한 손 하나, 애쓰며 그려내는 오지 않을 세상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이 영화의 잔인함이 미웠고 동시에 그럼에도 그림을 그리는, 그런 그녀를 비추는 영화의 순박함이 사랑스러웠다. 영화의 원제는 '오드', 한국 제목은 '내 사랑.' 영화는 오드가 사랑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오드가 사랑이 되기까지는 험난하다. 우선 그녀는 밖을 나가는 게 고역이고 어딘가에 가서 일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집을 나선다. 재즈 클럽을 운영했던 아빠의 기억을 더듬으며 클럽에 가 미숙한 춤을 추고, 들렀던 식료품 가게에서 본 하우스 메이드 모집 공고를 손에 넣어 갈 길을 탐색한다. 영화는 외톨이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의 아픔을 들이민다. 오드의 삶이, 오드의 현재가 그렇게 말한다. 장애는 어찌할 수 없다. 오드의 현재도 어찌할 수 없다. 방법이 무엇일까 궁리해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는 또 한 명의 외톨이 에버렛을 등장시킨다. 기적같은 순간이 벌어진다. 이 영화는 실화다. 그러니까 진짜 기적이 일어난다. 고아원에서 자라 물고기를 잡고 고아원에서 일하는 에버렛은 자신만의 공간이 중요한 인물이다. 그것이 그가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어찌하지 못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둘은 만나고 에버렛은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며 자신의 삶을 이탈한다. 거기서 마주하는 건 사랑이며, 거기서 찾아오는 건 기적이다. 영화는 너무나 순진하고 순박해서 다소 바보같지만 사랑은 절실하다. 둘은 거기서 살기로 한다.



기적은 또 한 번 찾아온다. 에버렛의 집에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오드의 그림은 어느 여자에 눈에 의해 발견되고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하우스 메이드로 에버렛의 삶에 기생했던 오드는 독립적인, 하지만 혼자가 아닌 오드로 다시 태어난다. 그럼에도 영화는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건 다가갈 수 없는 세상의 대리체에 불과하고 그래서 그녀의 기쁨엔 한계가 있다. 그녀의 그림에 새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녀가 마주치는 동물에게 빠짐없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사람과의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한계의 기쁨을, 그 완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영화다. 실화는 실화 나름의 절절함이 있지만 영화는 영화 나름의 마법같은 순간이 있다. 나는 저는 다리를 이겨가며 묵묵히 걸어가는 오드의 모습에서, 외롭기 그지없고 고독의 한복판을 걸어나가는 오드의 모습에서 마법같은 순간을 느꼈다. 끝이 없이 펼쳐진 설원과 쓸쓸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누가 뭐래도 오드의 편인 게 틀림없다. 영화는 그렇게 숙명적인 순간을 연출한다. 늘어져 버린 양말 한 짝과 구멍 투성이인 양말 한 짝.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건 어쨌든 양말 한 켤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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