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절대 늦지 않지만, 왠지 항상 늦을 것 같아!
앞으로 글에서 필자는 '고구마', 아내는 '토마토'로 서술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부부간의 내밀한 이야기라서 공개되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필자의 입장에서만 적히는 이야기에 대해 아내가 반박할 여지를 어디에서도 주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의 아내가 어딘가에서 나를 응원해줄 독자보다 '겁나게' 가까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런데, 이미 내 이름이 드러난 상황에서 고구마로 쓴다고 해서 누가 나를 고구마로 생각할까...?)
필자가 고구마인 것은 파마를 하고 나면 아내가 '고구마'를 닮았다고 해서 필자가 스스로 지은 별명이며, 아내가 토마토인 것은 최근 필자가 다이어트식으로 먹는 것이 고구마와 토마토라서, 아내가 직접 고른 별명이다.
고구마 : ... 그래서, 나는 고구마로 쓸라고. 자기는 뭐로 할래?
토마토 : 응? 난 그럼, 토마토!
고구마 : 토마토? 왜?
토마토 : 어. 오빠, 고구마랑 토마토 먹잖아.
고구마 : 아... 그, 그래... (이런 단순한 이유라니!) 난 또, 방울토마토 귀여워서 그러는 줄?
토마토 : ㅋㅋ 아냐. 근데 나 어릴 때 토마토 병명도 있긴 했어.
고구마 : 아? 그래? 왜?
토마토 : 약간 홍조가 있어서.
고구마 : 어? 그래? 잘 모르겠는데?
글에 적을 별명을 이야기하다가, 아내를 만나고 5년 만에 어릴 적 별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별 거 아니다. 사채를 끌어 썼다거나(!), 결혼을 했었다거나(!!), 장성한 아들이 있다거나(!!!), 사실은 남자라거나(!!!?)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뜨끔했다.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결국은 다 알 수 없구나.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는 없다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한다기보다는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노력하는 것이지 않나. 과연 나는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었던 걸까. 괜히 눈치가 보였다.
물론 토마토는 원래 고구마와는 달리 냉장보관이 원칙인지라 겁나 쿨하게 신경도 안 쓸 테지만.
아마 아버지는 채석장에서 근무하셨던 것 같다. 어릴 때는 탄광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크고 나서 보니 전남에, 그것도 시골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이 가능한 탄광은 없었다. 비슷하게 채석장이 옆 옆 마을 근처에 있으니, 대략 거기서 일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그게 대략 30여 년 전이니, 근로기준법의 후광이 전혀 미치지 않던 시절이었다. 고로 아버지는 보통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출근을 하셨다. 퇴근은 최소 해가 진 후였으니, 근무시간이 최소 12시간은 넘었으리라. 월급을 갈색 봉투에 받아오시던 시절이었다. 물론, 노동의 합당한 대가만큼 그 봉투에 담겨있을 리는 없었다.
아버지는 당연하게도 옛날 사람이시다. 요즘 ‘꼰대’라고 불리는 그 세대보다 더 윗세대니까, 옛날 사람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 여러 가지로 나 역시 어렸을 때이고 지금처럼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전인지라, ‘다정다감한 아빠’라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원래 아버지란 무섭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부의 내밀한 이야기에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성격 조성에 일조한 환경을 핑계의 근거로 제시하기 위함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버지는 채석장 근무를 위해 새벽 5시(혹은 그 전)에 기상하셔서 출근 준비를 마치셨다. 회사 출근이야 이제 나도 하고 있으니, 기상 시간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두 가지였다.
첫째. 아침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 한다.
둘째. 식구들은 식사를 할 때 다 같이 해야 한다.
감이 오시는가? 나는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어야 했다. 심지어 세수를 하지 못하고 먹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하지만 아침을 먹고 별로 할 일이 없어 바로 등교를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세수를 하긴 했나 보다.
그런 이유로 거의 매일, 학교에 맨 먼저 등교하는 학생은 나였다. 심지어 중학교 때에는 숙직이었던 선생님이 늦잠을 자는 동안, 못 같은 걸로 학교 문을 따고 들어갔다가 보안업체가 출동하는 경험도 한 적이 있었다.
"문을 뭐던지 따냐! 커서 도둑놈이라도 될거여!?"
착실히 일찍 등교한 죄로, 장래희망이 변호사에서 절도범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억울했지만, 한 마디도 대들지 못했다. '숙직하시는 분이 학생들이 와도 문을 안 열었으니, 직무유기 아닙니까!!' 정도는 외쳤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거의 20여 년 전인데 학교 보안시스템이 엄청 뛰어났던 것이다! 교육청 +1점)
어쨌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중학교까지 10여 년을 그렇게 살고 나자 나는 뭔가 엄청 규칙과 계획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어째서 그렇죠?'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그 세상에서 벗어나면 더 늦잠 자고 늑장 부리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나의 경우, 매일 아침 내가 학교에 가기 전과 학교 수업하기 전 엄청난 시간이 있었다. 즉, 아침 6시부터 9시까지가 아무런 목적도, 감시도, 급할 것도 없는 온전히 내 자유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갔다가 (나는 토끼는 아니지만 뭔가 내면의 음률이 느껴진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도 내게는 학교에 가기까지 3시간이란 여유가 있다. 그 여유기간 동안 준비물을 챙기고, 혹시 못한 숙제를 하거나 예습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케이블 TV가 없던 시절이라 그 시간대에 방송에 나오는 것은 뉴스뿐이었다. 그때 케이블 TV나 인터넷이 있었다면, 내 인생이 바뀌었겠지!) 배가 아프면 화장실을 가도 되었고 옷을 천천히 고를 수도 있었으며 가방 먼지를 털거나 자전거 안장을 닦거나 자전거 운전대를 완벽한 +자로 맞추는 헛짓거리도 할 수 있었다. (완벽한 +자가 되지 않으면 왠지 자전거가 슬슬 옆으로 간다! 분명하다! 안전불감증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난 여유가 있었다.
바로 그런 여유를 겪은 내 유년 시절이 내 MBTI가 '계획형 96%'가 된 것의 환경적 요인으로 강하게 작용했다. 물론, 태생적으로 느긋한 성격이라던지 귀신처럼 잘 들리는 알람 소리, 무슨 일이든 차례를 중요시하는 것 등은 유전적 요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장한 나는 무슨 일이든 조금 '먼저' 서두르는 사람이 되었다. 예를 들어, 영화 상영 시간이 8시라면 난 최소한 7시 반까지는 영화관에 입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술 약속이나 퇴근 후, 혹은 주말의 약속은 최소한 3일 전에는 잡아야 한다. 닥쳐서 잡는 약속이나 번개 따위는 내 사전에서 매우 희미한 글자다. 오늘 퇴근해서 내일 입을 옷을 고르면서 옷을 벗고, 벗은 옷을 빨래 바구니에 넣으면서 언제 빨래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리며, 언제 갤지 미리 생각한다.
반면, 토마토는 일상에서 그런 세세한 계획들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토마토는 약간 나와 반대의 성향이다. 그렇다고 매일 늦거나 미루는 타입은 아니다. 어찌 보면 기분파, 혹은 행동파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음먹으면 바로 처리해버리는 능력자랄까.
고구마(나) : 음. 빨래를 보아하니, 오늘은 아니고. 내일 아침에 예약 돌려놓고 저녁에 퇴근해서 건조기 돌리면 자기 전에 딱 갤 수 있겠어.
토마토(아내) : 그냥 지금 돌려. 내가 돌릴게.
고구마 : 아, 아냐. 내가 지금 돌릴게.
약간 이런 식인데, 내가 적극적으로 토마토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반박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것을 하지 않고, 약간은 '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니, 이유는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이유라는 것이 그저, '내 마음의 준비'라는 극히 개인적인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나는 반역하지 못하고 대부분은 토마토의 의견을 따른다.
그런데 얼마 전, 토마토가 사무실에서 있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사무실 다른 직원이 남편 흉을 하도 보기에, 맞장구를 쳐 주느라 내 흉을 조금 봤다고.
고구마 : 그래서, 무슨 흉을 보았는 데에~?
토마토 : 아니이~ 뭐, 나느은~ 따로 흉을 볼 것은 없고오~
고구마 : 응. 그래서어~?
토마토 : 아니이~ 무어~ 우리 남편은~ 아침에 일어나면 준비 다 끝내고 앉아서 TV 본다고~
고구마 : ㅋㅋㅋㅋ 아, 그거야?
토마토 : 응~ 따로 흉볼 게 있어야지이~ ♡
고구마 : 응~ 그래잉~ 괜찮아~ 나도 너 흉 많이 봐~
토마토 : 뭬얏!?
고구마 : 근데, 다 내 편은 안 들어주더라...
토마토와 나는 같은 직장에 다닌다. 사무실이 달라서 중간에 차를 갈아타고 헤어진다. 그런데 일단 내 사무실이 조금 더 멀고, 길이 조금 복잡하며, 주차 공간이 협소하다.
위에 했던 말이 기억나는가? 그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나는 간단히 말해서 '주차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최대 1시간은 일찍 출근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토마토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딱! 9시 출근 시간에 맞춰서 사무실 문을 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나름 우리 갈등의 씨앗이 될 줄이야.
나는 개인적으로 주차를 건물 근처 주차장에 하고 싶다. 가깝고 안전한 자리. 퇴근하고 금방 차로 갈 수 있고, 혹시나 중간에 차에 가야 할 일이 생겼을 때(아...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편한 위치. 게다가 그다지 특별한 일은 없더라도 조금 일찍 출근해서 커피도 한 잔 여유 있게 타 먹으며 차분하게 오늘 무슨 일을 어떻게 어떤 순서로 처리할지 생각해보고 싶다. 게다가 실제로 결혼해서 우리가 함께 출근하기 전까지는 실제 그렇게 했다. 학교에 다닐 때보다야 늦지만 입사 초기에는 거의 7시 반 전에 출근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결국 둘 중 한 명이 맞춰야 한다면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이가 더 많고, 내가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래서 아내의 출근 희망 시간에 최대한 맞춰 준비를 한다.
그런데 왜 아내가 일어났을 때, 내가 준비를 끝내고 TV를 보고 있냐고? 그건 도저히 이성으로는 어쩔 수 없는 느낌적인 느낌의 결과다.
아마 난 이미 인이 박인 모양이다. 어머니 말로 '인이 백혔다'라고 하는건데, 약간 세뇌당한 상태와 비슷한 느낌이다. 마치 뇌리에 낙인이 찍힌 것처럼, 도저히 마음 편히 아슬아슬한 시간의 줄다리기를 할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난 일단 화장실을 가야 하고, 씻고, 옷을 골라 입고, 콩이 배변패드를 갈아주고, 콩이 간식을 챙겨주고, 콩이 눈곱을 떼줘야 한다. 지금까지 평균적으로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대략 한 시간 정도다.
토마토는 출근 준비를 하는데 도시락을 싸는 것을 포함해서 30분 정도 걸린다. 즉, 내가 아무리 느긋한 성격이라 준비가 오래 걸린다고 해도 내가 30분만 일찍 일어나면 된다. 하지만 나는 거의 한 시간 먼저 일어난다.
그 인이 박인, '여유로움'을 부리려고, 30분을, 그 좋아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일찍 일어난다. (부언하자면, 난 절.대. 아침형인간이나 새벽형인간이 아니다. 주말에 별 일이 없다면 보통 12시 이전에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늘, 30분을 쫓기듯 준비하는 토마토를 보면서 '에휴.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면 천천히 해도 될 텐데'라며 혀를 차기도 하고, 한 번은 '토마토야, 미안한데. 나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그러는데, 그래도 8시까지는 출발할 수 있게만 해줘.'라고 하기도 했다. 그 뒤로 토마토는 최대한 8시 전에 출발할 수 있게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안개가 많이 끼거나 차가 조금 막히거나 신호가 여러 번 걸리면 난 뭔가 기분이 안 좋았다. 기분이 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라 한 번은 토마토가 '이럴 거면 그냥 각자 출근해!'라며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그 뒤로는 최대한 감정을 숨겨보려고 했지만, 아마 삐어져 나온 모양이고, 토마토는 여자의 직감으로 눈치채버렸나보다.
나는 오로지 나만 참고 배려해주고 맞춰준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있어서 주변에 토마토 흉을 봤었다. (물론, 그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진 않았다. 결혼했지만, 난 여전히 혼자인가!?) 그리고 미련하게도, 당연히 토마토에겐 불만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최소한 내가 느끼기로는 한 번 토마토의 화를 겪은 이후로는 거의 그런 감정을 드러낸 적도 없었으니까. (아. 감정을 숨기기란 참. 기침과 사랑만 감출 수 없는 건 아니었나보다.)
토마토는, 그렇게 먼저 준비를 다 마치고 자기를 깨우는 나를 보면서, 자기가 후다닥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TV를 보는 나를 보면서 서운함을 느꼈나 보다. 마치 무언의 시위를 하듯, 자신의 느린 준비에 묵언의 압박을 하는 것처럼.
어릴 때, 어딘가를 나설 때면, 아버지는 항상 준비를 먼저 끝내고 대문 한 발짝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잠깐의 기다림과 함께 '뭐더고 이라고 느리고 있다냐!'라며 호통을 치셨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보기 싫었으면서, 왜 난 그때의 아버지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을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었지만, 이번 글을 빌어 토마토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먼저 준비를 하는 것은, 토마토에게 어떤 불만이나 짜증의 표시가 아니라고. 그저, 내 안에 오래도록 인이 박인, 나만의 '여유로움'을 찾는 모습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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