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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민 Jul 31. 2020

#내것 #03 - 방콕 티셔츠

방콕의 미친 디자인은 세상 둘도 없이 매력적이다

방콕에 갈 때마다 싸구려 옷가지들을 산다. 길거리 리어카에 잔뜩 쌓인 민소매티(농구 저지처럼 생긴 옷)와 ‘몸빼 바지’는 안 사면 서럽다. 예뻐서라기보다 서울에는 절대 없을 것 같아서 산다. 레드불 로고 앞에서 황소 두 마리가 성교 중인 티셔츠를 방콕에 오지 않고서 구할 방법은 없다. 큼지막한 타이 문자가 이국 감성을 뿜뿜 발산하는 티셔츠를 파는 곳도 지구상에 방콕밖에 없다. 푸마를 뒤집어 놓고 ‘PUMA’를 ‘COMA’로 쓴 것도 본 적 있다.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2012년 방콕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할 일은 있었지만 시간을 내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어서 실컷 놀다 왔다. 종일 숙소에서 글을 쓰다가 늦은 오후 어슬렁거리면서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해가 떨어지면 친구와 만나 술집 탐방을 다녔다. 현지 친구가 “주말에 뭐 해?”라고 묻더니 짜투짝 시장에 가자고 했다. 어차피 귀국하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이니까 미리 가는 셈 치고 따라나섰다.


짜투짝 시장에서 살 아이템은 뻔했다. 티셔츠다. 그곳 티셔츠들은 수쿰빗 지역과 확연히 다르다. 수쿰빗의 티셔츠들이 ‘외국인 갬성’이라면 짜투짝의 티셔츠들은 로컬 감성에 충실하다. 태국의 독특한 디자인 감성은 공통적으로 흘러도 어딘가 왠지 모르게 다르다. 무엇보다 짜투짝에는 품질 선택권이 많다. 한두 번 빨면 목이 명치까지 내려와 하염없이 섹시해지는 싸구려 제품부터 기분 좋게 도톰한 원단까지 다양하다.


짜투짝의 북새통을 뚫고 걷다가 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만져보니 원단이 나쁘지 않았다. 가격은 7~8천 원 정도로 꽤 비싼 편이었다. 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사각형 안에서 배트맨 박쥐가 날개를 쭉 펴고 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귀가 미키마우스였다. 이런 이종교배는 미처 상상해본 적이 없다. ‘미키배트’ 정도로 불러야 할까? 아니면 ‘배트마우스’? 브루스 웨인에게 콜이라도 때려봐야겠다.

올 1월 태국에서 한 달짜리 축구 대회를 취재했다. 첫 한 주일은 부리람, 나머지 3주는 방콕에서 머물렀다. 평소 좋아하는 방콕에 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할 일은 많아도 일단 시작하면 관성과 요령이 붙기 마련이다.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게 프로페셔널 아니겠나. 정작 방콕의 3주일에는 ‘일할 때’만 있고 ‘놀 때’가 없었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보면 거대한 나태지옥이 나온다. 방콕에서 지내는 내내 나는 나태지옥이라도 빠진 줄 알았다.


그래도 짬은 생겼다. 의무감에 꾸역꾸역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 자주 갔던 맥주집이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처음 여기서 호가든을 마신 게 대충 10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서늘한 저녁에 부담 없이 맥주를 즐기기 적당한 곳이었다. 그때 현지에서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 또래가 이곳을 좋아했다. 같이 운동하는 친구라며 곱상하게 생긴 현지 청년을 데려왔다. 물어보니 연예인이라고 했다. 다음날 지상철(BTS) 안에 설치된 광고 화면에서 청년이 요거트를 선전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옛 추억이 깨끗이 삭제되었다. 메뉴를 아무리 뒤져봐도 1만 원 이하 맥주가 없었다. 방콕까지 와서, 고급 리조트도 아닌데, 맥주 한 잔에 1만 원을 넘게 내야 한다니 김이 샜다. 포기하고 직원을 불러 태국 수제 맥주 중에서 추천해달라고 했다. 330ml짜리 한 병을 앙증맞게 가져왔다. 계산서를 보니 한 병에 1만2천 원이었다. 갑자기 하노이가 그리워졌다.


방콕의 물가가 몽땅 그렇진 않다. 내가 갔던 곳은 통로(Thong Lor)라는 동네로 방콕 최고 부촌이다. 로컬 슈퍼마켓의 장보기 물가, 외국인의 발길이 드문 동네 맥줏집과 식당은 여전히 서울보다 저렴하다. 동시에 2020년의 방콕이 역동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2018년 기준 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7천 달러다. 대한민국이 2000년에 기록했던 숫자와 같다. 방콕은 이제 우리가 아는 ‘물가가 싸서 FLEX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 짜투짝을 가지 못했다. 그곳 티셔츠들은 여전히 독특하고 매력적이었으면 좋겠다. 짜투짝 바로 위로 ‘방수(Bang Sue) 그랜드 스테이션’이 한창 공사 중이다. 2021년 완공 예정으로 유명한 훨람퐁 중앙역을 대체할 예정이다. 고속도로에서 힐끗 보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짜투짝 시장의 착한 가격도 이제는 기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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