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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민 Aug 04. 2020

#내것 #04 - 톰포드 뿔테 안경

무려 금속 코받침이 달려있다

1995년 일본에서 1년 동안 실컷 놀다가 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했다. TV 뉴스에서 박영식 교육부 장관이 “이제부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라고 발표했다. 국가적 결단과 달리 내 입에서 ‘국민학교’라는 말이 떨어지기까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국민학교 4학년 신체검사 날이었다. 시력 검사대 앞에서 숟가락(처럼 생긴 것)을 손에 쥐었다. 이걸로 밥을 먹으면 서너 번 만에 한 공기를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른쪽 눈을 먼저 가렸다. 왼쪽 눈으로만 보자 숫자, 그림은커녕 세상이 흐릿했다. 깜짝 놀라서 오른쪽 눈을 체크했다. 멀쩡하게 잘 보였다. 다시 왼쪽 눈. 안 보였다. 오른쪽 시력 1.0, 왼쪽 시력 -1.0. 이런 일이 가능한가?


부등시. 양쪽 시력의 차이가 큰 현상을 ‘부등시’라고 부른단다. 왼쪽 시력이 떨어지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양쪽 눈으로 보면 멀쩡하게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야구를 할 때 타율이 떨어진 이유는 역시 나의 능력 저하가 아니라 부등시 때문이었던 걸로 판명되었다. 그때 나는 인생 첫 안경을 맞췄다. 어머니가 크게 상심하셨다. 당신의 눈에 작은아들은 아직 ‘꼬물꼬물’ 상태였기 때문이리라.


나쁜 쪽은 계속 나빠졌다. 좋은 쪽도 덩달아 나빠졌다. 이것도 근묵자흑일 줄이야. 결국 지금 나는 안경 없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얼마 전 안경을 맞추러 안과에서 시력을 측정했다. 양쪽 모두 마이너스 어쩌구였는데 굳이 기억하지 않았다. 마이너스 1이든 10이든 어차피 안 보이긴 마찬가지다. ‘잘’이란 부사는 무의미하다. 


40대 중반이 되자 스마트폰의 글자들이 조금씩 좌우로 퍼지기 시작했다. 회식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쥐고 인상을 쓰자 후배 꼬맹이가 “편집장님, 어머 어떡해 ㅎㅎㅎㅎ”라며 놀려댔다. 아까 말한 안과에서 “왜 이런 거죠?”라고 물었다. 의사는 무표정으로 “노안이에요”라고 대답했다. 분명히 살아 움직이는 인간인데 ARS 응답기계인 줄 알았다. 노안, 입니다. 다시 듣고 싶으면 별표, 취소하시려면 우물 정자를 누르세요… 별표만 계속 누를까 보다 확.

아내와 함께 이스탄불 여행을 갔었다(2015년? 2016년?). 아무 생각 없이 두리번거리다가 안경 코너에서 뿔테 안경을 발견했다. 뿔테인데 금속 코받침이 달려 있었다. 누가 봐도 톰포드임을 강렬히 주장하는 디자인이었다. 얼굴에 척 걸어보니 꽤 괜찮았다. 아내도 마음에 들었는지 사라고 보챘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300달러대였던 것 같다. 잘 모르겠다. 299달러일 수도 있고, 399달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샀다. 이토록 동양인의 낮은 콧등을 배려한 뿔테 안경과 만나기란 쉽지 않다.


2년 전, 하노이에서 귀국 중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고 보딩브리지 연결까지 끝나자 승객들이 부리나케 일어나 통로를 가득 메웠다. 네 시간이나 담배를 참은 나도 항상 이른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스마트폰을 켜고 카톡을 확인하는데 앞에 있던 아저씨가 자세를 바꾸다가 어깨로 내 얼굴을 살짝 가격했다. 안경이 거짓말처럼 똑 부러졌다. 나는 지금까지 안경이 부러져서 버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양반이었다. 명함을 주면서 연락하라고 했다. 새것으로 내놓으라고 진상을 펴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소심한 내게는 그럴 배짱이 없었다. 톰포드 매장을 가니 국내 구매 제품만 A/S가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동네 안경점에 가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고쳐달라고 맡겼다. 일주일 뒤 뿔테로서의 기능만 발휘할 뿐 부러진 곳의 상처가 남은 상태가 되어 안경은 내게 돌아왔다.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내자 곧바로 7만 원을 보내왔다. 


톰포드 뿔테 안경은 메인 아이템의 자리에서 물러나 집에서만 쓰는 신세로 강등되었다. 흉볼 사람이 없으니 내친김에 코받침 패드를 주문해서 붙여봤다. 뿔테 안경은 무거워서 항상 ‘기름기름’했던 콧등에서 중력에 취약한데 하얀 패드가 그 문제를 해결해줬다. 겸사겸사 콧등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었다. 이대로 착용하고 외출할 수는 없지만, 집에서 쓰기엔 안성맞춤 상태가 되어 매일 나와 함께 지내고 있다.


안경을 곱게 쓰는 성격 덕분에 지금 나는 안경이 다섯 개나 된다. 얼마 전 드디어 돋보기안경까지 장만했다. 독서할 때,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 아주 편해졌다. 레이밴 금테인데 철 지난 모델인지 적당한 가격에 잘 골랐다. 만듦새를 보면 가품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정든 톰포드 뿔테 안경이 섭섭해할까 봐서 골고루 착용하며 소파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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