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빠른 78년생’ 입니다만

'만 나이'와 '한국식 나이'에 대한 견해

by 류재민

우리나라는 연고와 나이, 학연을 꽤 중시하는 사회입니다. 어딜 가나 첫 만남에서 ‘몇 살인지’ ‘어디 사는지’ ‘어느 학교 나왔는지’가 대화의 시작입니다. 그게 뭐라고 말이죠. 이런 대화는 여성보다 남성 집단에서 경향성이 두드러진다고 봅니다. 어쩌면 군대문화가 생활 속에 뿌리내린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빠른 78년생입니다. 저희 때만 해도 생일이 빠른, 그러니까 1월이나 2월에 태어난 아이들은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8살 아이들과 1학년을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친구 사이’로 지냅니다. 그런데 대학 이후부터 묘한 상황이 생깁니다.


재수나 그 이상을 하면 같은 ‘학번’이라도 ‘형’이고 ‘누나’입니다. 그거야 나이가 더 많으니까 어쩔 수 없는데요. 문제는 ‘후배 학번’입니다. 한두 학번 아래의 후배들이 재수나 삼수하면 저랑 나이가 같거나 많겠죠. 그럴 땐 대개 제게 “선배”라는 호칭을 쓰고, 저는 그들에게 존대말을 합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죠.


가장 어려운 게 한 학번 후배입니다. 본인은 8살에 학교에 들어가 저랑 동갑이라며 맞먹으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땐 ‘빠른 78’인 줄도 모르고 학년이 높으니 “형, 엉아”라고 불렀던 녀석들이. 쥐어팰 수도 없고 말이죠.


이런 현상은 사회에 진출하면 심화합니다. 직장이나 거래처를 다니다 보면 ‘또래’와 마주하는 경우가 생기는데요. 여기서는 학년도 학번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나라 나이’가 우세종입니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으면 ‘어른 행세’를 하려는 사례도 있고요.

학창 시절 친구가 다른 친구를 소개했을 때, 나이가 저보다 많으면 호칭 사용이 난감해집니다. 족보가 꼬일 대로 꼬이는 겁니다. 다들 이런 경험 한번 쯤 하지 않으셨나요?


이게 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는 ‘K(Korea)-나이’가 낳은 폐단입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보시죠.


어린이 백신, 만 나이 vs. 연 나이 �:5~11세 아동에게 코로나19 백신을 놓기 시작할 때 만 나이를 적용할지 연 나이를 적용할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어요. 결국 만 나이를 적용했지만 생일이 지난 2010년생은 성인과 같은 용량으로 백신을 맞을 수 있고, 생일이 지나지 않은 2010년생은 어린이용 백신을 맞아야 해서 혼란이 커지기도 했고요.
임금피크제, 만 나이 vs. 세는 나이 �:임금피크제는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월급을 깎는 제도인데요. 한 회사에서는 회사와 노동자가 임금피크제 적용 나이를 두고 싸우다 법원까지 가기도 했어요: 회사 “당연히 세는 나이지!” vs. 노동자 “만 나이로 해야지!”
자동차 보험, 만 나이 vs. 세는 나이 �:자동차 보험 중 나이가 26세 이상일 때 가입할 수 있는 특약이 있는데요. 보험 약관에는 만 나이로 적혀 있지만 가입 과정에서 세는 나이로 잘못 전달돼, 보험금 지급을 두고 갈등이 생기는 일도 종종 있었어요. 2022년 4월 13일 《뉴닉》 <만 나이 통일, 어떻게 될까?> 중

그래서 새 정부는 나이 세는 법을 ‘만 나이’로 통일한다는데요. (무슨 조선시대 ‘도량형’ 통일도 아니고.) 다만, 청소년보호법과 병역법은 신중한 입장입니다. 술·담배를 사거나 병역판정 검사를 받는 나이는 당분간 ‘연 나이’인 19세로 유지한다고 합니다. 대통령직 인수위는 올해까지 법을 어떻게 바꿀지 준비한 다음 국회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출처: 뉴닉

만 나이로 바꾸는 것에 국민 여론은 어떨까요? 호불호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잘 됐어 �:나이 계산법 때문에 발생했던 민원이나 분쟁도 줄어들고 사회·행정 서비스를 이용할 때 느꼈던 불편함이 많이 없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와요. 이미 다른 나라들은 만 나이를 표준으로 삼은 상황이라, 우리나라도 이김에 빨리 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요.
글쎄 �: 대부분 굵직한 법에는 이미 만 나이로 적혀 있어 크게 달라질 것 없다는 의견도 있어요. 일상에서는 세는 나이에 익숙한 만큼, 법이 바뀐다고 사람들이 일상에서 바로 만 나이를 쓸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요.
걱정돼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 잡은 사회적인 합의를 한 번에 바꾸려는 시도가 오히려 더 큰 혼란이 될 거라는 얘기가 나와요. 또 청소년보호법·병역법에서 여전히 만 나이를 적용하지 않는 등 예외 사항이 있으니, 문제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의견도 있고요.

저희 부모님 시절에는 호적 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해요. 과거에는 지금보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역병이 돌면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 제 어머니도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릅니다. 이모 역시 이런 이유로 정년에서 득을 봤다고 합니다.


요즘은 1월에 태어났든 2월에 태어났든 똑같이 8살에 입학합니다. 그래서 ‘빠른 년생들’의 족보 싸움은 서서히 사라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나 제도에는 사각지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만 나이’ 통일 역시 오랜 시간 굳어져 온 사회적 합의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토론과 공감대 형성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나이에 있어 불공평함을 느껴선 안 되니까요. 그리고 하나 더. 툭하면 “너 몇 살이야?”라고 나이 많은 자랑질을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이런 분들도 같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상단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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