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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Mar 28. 2023

‘넘사벽 대학원’

에피소드 19.

잠깐 대학원 진학을 준비한 적이 있다. 기자라는 직업은 공무원처럼 정년이 보장된 게 아니라서 언제 일을 그만둘지 모른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연차가 켜켜이 쌓여가면서, 직급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서 위기의식도 그에 비례해 올라갔다. 일을 그만두면 뭘 해 먹고살아야 하나. 중년의 입구에 들어선 내게는 여간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선배나 동료, 후배들은 대개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면 다른 신문사로 이직했다. 그렇지 않으면 1인 매체를 차려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기사 쓰는 일뿐이니 어쩌겠나. 하지만 나이만 먹고, 기사는 쓸 줄 모르니 그렇게라도 연명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 역시 나중에 그들과 같은 길을 가야 할까. 나오라는 답은 안 나오고, 한숨만 연거푸 쏟아져 나왔다.      


그러던 참에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기자로 활동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고 여겼다. 대학원에서 배운 학문과 맺은 인적 네트워크는 기자 생활에도 플러스가 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운이 좋으면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으리라.     


마침 눈에 띄는 곳을 발견했다. 과학 전문 언론인을 양성하는 대학원이었다. 더 매력적인 건, 현직 언론인에게 파격적인 장학 혜택을 준다는 거였다. 국내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내로라하는 대학원의 등록금이 일반 대학 수준에 불과했다. 입학 전형도 까다롭지 않았다. 학부 성적 증명서와 재직 증명서, 자기소개서, 학업계획서를 토대로 최종 면접 대상자를 선별했다. 명색이 기자이고, 이십 년 가까이 글을 써왔으니, 자소서나 학업계획서는 가뿐히 통과할 줄 알았다. 면접까지 가면 합격이야 떼 놓은 당상이겠거니 했다.


웬걸. 야심 찬 포부와 미래에 대한 장밋빛 설계는 몇 번의 ‘낙방’을 거듭한 끝에 무위에 그쳤다. 그 대학원은 1년에 봄과 가을 두 번 대학원생을 모집했다. 나는 무려 5번을 도전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그것도 모두 1차 서류 전형에서. 불합격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대학원 진학의 꿈을 접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아마도 학부 시절 낮은 성적이 ‘커트라인’에 걸린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한 5번째 응시 때 온라인 입시 설명회에 참여했다. 담당 교수로부터 대학원 소개부터 입학 전형, 입학 후 생활을 두 시간 가까이 들었다. 그 교수는 설명회 말미 이런 말을 했다. “학부 때 성적을 반영하긴 하지만, 그보단 배움에 대한 열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고 따지듯 물었다.


“저는 지난 4번의 도전에서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사이 맨 처음 저와 함께 응시한 학생들은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 또 도전할 생각입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내년에 또 도전할 것이고, 될 때까지 백 번이라도 더 덤벼볼 생각입니다. 이 정도 배움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이 있다면, 교수님께서 설명한 입학생의 기준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습니까?”     


항의성 질문에 교수는 순간 당황해했다. 그러더니 “대단합니다. 그런 열정이라면 이번에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저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니, 선생님의 이름을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 교수가 거짓말을 했는지, 또 나의 자소서와 학업계획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선동열보다는 조금 높은 대학 시절 학점이 또 발목을 잡았는지, 내가 다니는 신문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다섯 번째 시도에도 1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곳에 지원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학원의 자소서와 학업계획서 양식은 매번 같았다. 매번 같은 양식에 같은 이야기를 는 건 고역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복붙’을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다시는 그에 지원할 생각은 없지만, 내 자소서 중에 휴지통에 버리기 아까운 대목이 있어 여기에라도 풀어놓으련다.

      

Q. 입학 후에 어떤 공부를 하고자 하며, 졸업 후에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어떠한 기여를 할 것인지 기술하십시오.     

A. 4차 산업혁명과 대전환,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입니다. 대한민국의 과학과 언론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메타버스 등 가상현실(VR)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국민의 삶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고, 생활 변화에 따른 정보 전달 체계 역시 색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VR’과 융합한 저널리즘은 향후 우리 사회에 어떤 결과와 영향을 미칠지 탐구하고, 과학과 윤리의 상관관계, 또 그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의식을 다루는 학문과 연구를 해보고 싶습니다. 가상현실을 통한 ‘VR 저널리즘에 초점을 맞춰 과학이 인간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고, 거기서 파생하는 언론의 긍·부정적 영향력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통해 졸업 이후 언론인으로서 국가와 지역사회에 필요한 효율적 대응 방식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쓴 학업계획서는 ‘VR(가상현실) 저널리즘’이 가져올 국내 언론의 환경 변화와 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몇 년 전, 한 방송사의 휴먼 다큐멘터리를 인상 깊게 본 것이 계기였다. VR을 통해 세상을 떠난 딸을 만나는 엄마의 모습을 눈물을 흘리며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린 이 프로그램은 이듬해 ‘시즌2’로 방송됐다. 사별한 아내를 다시 만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려졌고,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 노동자가 소개됐다.


배우의 동작과 성우 목소리 등을 입혀 생전의 모습을 구현해 내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운명한 내 아버지. 그래서 가족들과 이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를.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가상현실을 통해 세상을 떠난 가족을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설렐까, 반가울까, 기쁠까. 환영(幻影)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마음에 더 힘들진 않을까.     

 

나아가 ‘VR’과 융합한 저널리즘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결과와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지점에 이르게 됐다. 포털 사이트에서 한 언론사가 자체 개발한 영상을 본 적 있다. 잠실 제2 롯데월드 꼭대기에서 촬영한 360도 현장이 한 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과학과 윤리의 상관관계, 또 그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의식을 다루는 학업과 연구를 해보고 싶었다. 가상현실을 통한 ‘VR 저널리즘’에 초점을 맞춰 과학이 인간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고, 거기서 파생하는 언론의 긍·부정적 영향력을 조사하고 탐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머신러닝 모델이 계속해서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처럼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 과정을 모방하는 능력도 점점 발달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흥미로운 분야입니다. * 


나는 그 대학원을 먼저 다닌 선배를 알고 있다. 그 선배도 두 번 낙방 끝에 합격한 이력이 있다고 했다. 그 선배는 “2차 면접에선 영어로 자기를 소개하라는 경우도 있다”라고 귀띔했다. 일단 한글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한 뒤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지인의 딸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그리고 대여섯 문단을 무조건 외웠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고급 정보’도, 해외 유학파가 현지 영어로 변환해 준 자기소개서도 전혀 써먹지 못했다. 당신들 정말 너무하구나! 그래도 용서하련다. 전도유망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대학원의 실수이자 손실일 뿐이니. 언젠간 내 뜨거운 열정을 알아주는 곳이 나타나겠지, 하면서.     


기계와는 달리 100년도 이 세상에 살지 못하는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냐고, 제발 위로해 달라고 구걸하는 나에게 챗GPT는 대답한다. 자신은 감정을 느낄 수 없기에 죽어야 하는 나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없다고. GPT, 너 정말 너무하구나!**     


*김대식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동아시아, 2023) 29

**앞의 책 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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