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들은 ‘고민’을 달고 산다. 창작 그 자체가 고통이지만, 그 고민의 시간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잦다. 그래, 글은 ‘고민’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고민하지 않고 나오는 글은 없다. 혹여 그런 글을 쓴다고 해도, 읽는 사람에게 감동이나 감흥 같은 감정은 불러일으키진 못 하리라. 그래서 고민을 어떻게 하느냐,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글의 성질은 달라진다. 하다못해 일기도 막상 연필이나 펜을 잡으면 쉽게 쓰지 못하는 것도, 글이 가진 ‘심리적 고민 유발’ 성분 때문 아닐까.
AI시대가 열리면서 나 같은 ‘글로 생활자’도 위기에 직면했다. 어느 날 아침 뉴스에서 AI가 시집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AI는 곧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쓸 것이고, 희곡도 쓸 것이다.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능수능란하게 짤 것이다.아뿔싸. 이미 ‘챗(Chat) GTP’는 기사도 쓰고, 책도 쓰고, 논문도 쓰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 과학화와 정보화가 가속화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건 나 같은 문과 출신들에게는 ‘들리는 얘기’ 인 줄만 알았는데.
AI는 점점 ‘글’이라는 공간적 영역으로 침투해오고 있다. 아니, 내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이미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왔는지 모른다. 로봇은 갈수록 똑똑해져 인간이 쓴 글보다 더 고급스럽고 재밌는 글을 쓸지도 모른다. 나는 그동안 감수성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라고 믿었다. 로봇 같은 기계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런데 아니었다. 문학이든 비 문학이든 ‘글’은 로봇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그 도전에서 패한다면, 글쟁이들은 대체 뭘 해 먹고살아야 하는 걸까. 고민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 한쪽 구석에 밀려나 있던 외로움이란 감정이 툭 튀어나왔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사람들은 손에 쥔 핸드폰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핸드폰을 보는 사람의 숫자와 비교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 종이책을 보는 대신, 웹툰이나 웹소설 같은 전자책을 보는 학생과 청년들도 늘어가고 있다. 나도 한때는 웹소설을 써보기도 했고, 에세이 전자책을 내보기도 했다. 반응은 신통치 않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서툴고 부족한 내 글솜씨 탓 일 게다. 고민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사숙고했다면, 글을 쉽게 쓰진 못했으리라. 폭넓게 경험하고, 깊이 있게 배우고, 전문성을 갖춰 유려한 문장을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한 줄의 글도 함부로 쓰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기자나 작가나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다 쌀독이 텅텅 비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도 못 할 짓이다. 글을 쓰는 ‘노동’의 시간만큼 ‘벌이’를 하지 못하면 쓸 수 있는 기회조차 잃을 수 있다. 어떻게든 대가를 받아야 하고, 그 대가를 토대로 정성껏 글을 써야 좋은 글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래야 마징가 제트든, 태권브이든 로봇과 대결에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AI시대 전투력을 기르는 일은 결단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투력을 기르기 위해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AI처럼 ‘학습’을 하는 셈이다. 고무적인 건, 그런 행동과 행위가 우울증이나 무기력을 이겨내는 ‘처방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처방전 덕분에 기자로서의 글쓰기도, 작가로서의 글쓰기도 버텨낼 힘이 되는 것이리라. 물론,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고민을 하며 쓰기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강철 기계에 저항할 힘을 기르는 것, 그것이 AI 시대에도 끄떡없는 글쟁이가 사는 법 아니겠나.
고민의 총량이란 내가 했던 시도의 총합이므로, 내 전문성 및 숙고의 결과를 파는 것입니다. 이는 시간의 축적도 있지만 이해와 지식의 총합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의 해박함을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결여돼 있으면 노동을 팔아야 하는데, 노동은 AI가 가져갈 테니까요.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원류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드는 작업이지, 예전처럼 여기 우리 제품이 있다고 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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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상이지만 마음이 힘들 때가 있다.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나, 친구나 동료, 이웃, 가족과 갈등을 겪을 때 불쑥불쑥 그런 감정이 든다. 그럴 때면 걱정과 근심에 한숨만 늘어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인군자처럼 참고 견딘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말처럼 쉬우면 그는 그야말로 ‘성인군자’이리라.
어떤 날은 술로 풀고, 어떤 날은 산책이나 운동을 하러 가고, 또 어떤 날은 먹는 것으로 그 순간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어떻게든 간다. 문제는, 아무 일도 아니었구나,라는 걸 꼭 그 시간이 흘러간 뒤에 자각한다는 것이다. 나 혼자만 그 시간을 헉헉거리며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알고 보면 나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닌데.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나는 곧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문제들이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 달라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회복했을 뿐이었다. 우리에게는 모두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런 시간을 허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때 혼자 있는 시간은 우리를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여유를 선사한다. **
나는 암만 고민해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애쓴다. 다행히 ‘나만의 시간’이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니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법을 깨달았다. 마흔의 중반에서 만난 달리기는 더없이 좋은 고민 해결의 친구가 됐다.
주말과 휴일마다 운동장을 뛴다.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1시간여를 뛰고 나면 아무런 잡생각도 나지 않는 게 좋다. 내 정신을 지배했던 근심과 걱정을 잊을 수 있어 그만이다. 그렇게 뛰고 나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다.
잠들기 전이나 새벽녘도 혼자만의 시간은 갖기에 적당한 시간대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앉아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루를 마감하거나 시작하는 루틴을 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단 10분 만이어도 충분하다.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집중력은 더 고조된다.
새벽 명상을 하고 나서부터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느낌이다. 하루의 시작도 개운해졌다. 명상한답시고 앉아 있다 도로 잠들던 날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