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초등학교에 갔다

직업교육 하러 갔다가 사인 공세를 받았다

by 류재민

2023년 11월 17일. 내가 사는 도시에도 첫눈이 내렸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뭐가 오겠거니 했는데, 비 대신 눈이 왔다. 나는 아침부터 부산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 강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청주에 볼일이 있다며 차를 끌고 나갔다. 아이들 밥을 먹여 등교시킨 뒤 부랴부랴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학교까지 거리가 멀어 택시를 타야 했는데, 금방 잡히지 않았다. 꼭 바쁜 날은 그렇게 된다. 카카오 택시도 안 잡히고 속만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아내는 왜 하필 오늘 출장을 갔나’ 괜한 원망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천운처럼 택시 한 대가 잡혔다.


뛰듯이, 날 듯이 택시는 달렸고, 덩달아 내 심장도 내달렸다. 오전 9시부터 시작인데, 10분 전에 도착해서 강사 등록과 안내를 받으라는 공지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겨우 시간에 맞춰 학교에 다다랐다. 학생들은 이미 교실에서 담임선생과 대기 중인 상태였다.


수업은 4학년을 대상으로 했는데, 6반과 3반, 2반, 1반 순으로 오전 내내 이어졌다. 40분 수업에 10분 휴식.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은 여러 번 했지만, 초딩은 처음이다. 그래서 얼마나 시끄럽고, 난장판이 될까 짐짓 걱정했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려와 달리 아이들의 집중력 질풍노도의 청소년들과 달랐다. 오히려 질문도 잘하고 에너지 넘치는 생동감에 수업 내내 힘이 솟았다.


한 반 수업이 끝난 뒤 다음 반 수업을 들어가려는 순간, 어느 학생이 담임 선생님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눈 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 아이들이 창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교실에 들어가기 직전, 갑작스러운 광경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나도 가서 같이 첫눈을 구경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나는 선생이고, 쟤들은 학생인데. 체통을 지켜야지’ 하면서도 나도 첫눈을 보고 싶었다. 무리에 슬쩍 끼어 볼까 하려는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발견했다. “얘들아, 선생님 오셨다. 모두 제자리에!”


나는 그렇게 올해 첫눈을 감상하지 못한 채 학급 반장의 ‘공수, 선생님께 인사’ 구령에 맞춰 허리를 깊게 숙이고 수업을 시작해야 했다. 서글펐다. 왜 하필 오늘이람!!


6반에 이어 3반의 수업이 끝났을 때, 아이들이 복도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눈이 또 오나, 싶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펜과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선생님! 사인해 주세요!”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내가 뭐라고 사인을? 당혹감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줄을 서 있는 아이들은 진심이었다. 손흥민이나 김연아, BTS 팬 미팅 장에 온 아이들처럼. 기자회견 영상과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 같은 걸 보여줬는데, 아이들은 연예인처럼 느껴졌나 보다.


뭔가 모를 감동은 둘째 치고, 시간이 없었다. 단 10분의 쉬는 시간 동안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2반 수업도 들어가야 했으니. 결국 10명 넘는 아이들이 사인을 받지 못했다.


“선생님, 한 시간 뒤에 다시 올게요. 꼭 해주셔야 해요.” 아이들은 이 말을 남기고 자신들의 교실로 돌아갔다. 그걸 지켜보던 2반 학생들은 수업을 10분 미리 끝내달라고 했다. 사인을 받으려고 한단다. 웃기다. 정말 내가 뭐라고.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내가 뭐긴 뭐인가 보다. 정성껏, 그러나 부지런히 속도를 내 사인을 했다. 이렇게.


‘착하고 건강하게 파이팅! 2023. 11. 17. 디트뉴스24 류재민’


사인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남자애나 여자애나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옆에서 느껴졌고, 이름이 뭐니?라는 질문에 수줍게 입을 떼는 녀석들의 음성은 떨렸다. 사인 종이를 받아 든 아이들은 무슨 보물을 얻은 듯,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돌아갔다.


첫눈 오던 날, 나는 아들 같은 아이들에게 '기자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지막 1반 수업까지 마친 뒤 사인을 미처 받지 못하고 돌아간 다른 반 친구들까지 복도에 서서 일일이 맡은 바 ‘소임’을 다 했다. 감개무량했다. 첫눈이 오는 날, 나는 맑은 눈과 맑은 심장, 맑은 정신을 가진 미래의 꿈나무 기자들과 초등학교에 있었다.


내가 오늘 아이들에게 전달한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여러분,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천안 성성초 4학년! 파이팅!’ 사인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덧: 학교는 다르지만, 내 아들도 초4다. 자식 같은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내 직업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한 4시간이 첫눈처럼 지나갔다. 아들! 아빠 오늘 연예인 대우받았어. 멋지지 않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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