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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Nov 02. 2024

밀리환초

갇힌 섬 1


파도는 평화롭게 잔잔했다. 짠 내 섞인 해풍이 섬을 향해 불어왔다. 섬은 조용했다. 떠밀려 온 밀물이 바위에 부딪혀 철썩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연안에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떼 지어 헤엄치고, 해변 바위틈에는 게와 낙지가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느리게 움직였다. 돌 틈에는 새까만 다슬기와 회갈색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일광욕을 즐기는 듯했다.

저 멀리, 배가 들어오는 방파제 앞으로 여섯 명의 사내가 걸어왔다. 맨 앞에서 걷는 사내는 황토색 모자를 썼고, 같은 색의 군복차림이었다. 대강 아홉 자나 되는 듯 키가 컸고, 다부진 몸매에 근육질 체형이었다. 눈매는 뱀처럼 쫙 찢어졌고, 얼굴에는 칼자국 모양의 흉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그는 일본 육군 보병 제107연대 3대대 소속인 이토 고이치 소좌였다. 이토는 석 달 전 본국에서 훈련 도중 갑작스러운 동원령에 대원 스무 명과 군함을 타고 떠밀리듯 이곳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이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 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사카이 대좌에게 대략 본국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고,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언지만 개략적으로 들었을 뿐이다. 본국의 가족들에게 안부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온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섬은 고요하고 적막해서 전쟁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토의 뒤로는 해진 천을 덧대 만든 누더기 차림의 사내들이 서너 보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왔다. 사내들 손에는 호미와 망태기, 대나무 작살이 들려 있었다. 이들은 조선에서 끌려온 인부들이었다. 이토와 달리 체구가 작달막했고, 핏기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초점을 잃은 듯한 눈은 멍했고,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했다. 이토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향해 연신 손짓을 해댔다.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이토의 재촉에 인부들의 발걸음은 잠시 빨라지는 듯하다 이내 속도가 줄었다. 일행 중 하나는 부상을 입은 듯 왼 다리를 절었다. 까맣게 탄 얼굴을 한 열 서넛 먹은 소년이 부축해 겨우 걷는 정도였다. 일행이 연안에 다다랐을 때, 이토는 인부들을 두 조로 나누었다.

“너랑 넌 육지에서, 너와 너, 그리고 넌 바다로.”

인부들은 아무 말 없이 지시에 순응했다. 절름발이 사내와 그를 부축했던 소년은 갯벌에서 낙지와 조개를 잡았고, 나머지 셋은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았다.

바다는 열대어들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쏜살같이 움직이는 고기들을 대량으로 사냥하기란 쉽지 않았고,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도 수 분에 불과했다. 수중 사냥 조가 차례대로 물속으로 잠수했다. 동시에 갯벌 조도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섬에서 끼니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바다에서 나오는 어패류가 전부였다. 섬 자체가 염분과 산호초로 둘러싸여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숲속에는 나무조차 없어 토끼나 노루 한 마리 살 수 없었다. 설상가상, 1944년 6월 미군이 마셜 제도 대부분 섬을 점령한 뒤부터는 사실상 식량 보급이 끊긴 상태였다. 식수도 구하기 어려워 석회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먹었지만, 그 역시 양이 넉넉지 않았다. 부족한 식량과 노역에 시달린 징용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피부는 가죽밖에 남지 않았고, 저마다 늑골과 갈비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풍토병에 걸리거나 기아에 허덕이던 이들은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남은 자들은 바다 생물에 의지해 겨우 연명했는데, 그조차 일본 군속들 입으로 먼저 들어갔다.

이토는 무료한 듯 허공을 향해 긴 하품을 했다. 해안에는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모래밭을 때리는 호미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환초(環礁)의 하늘 위에 태양이 작열했다. 잔잔했던 파도가 서서히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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