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전쟁

8

by 류재민

봄이 왔다. 얼었던 눈이 녹고, 그 자리를 비집고 곳곳에 키 낮은 꽃이 피었다. 꽃 무리 위로 나비와 벌이 날아들고, 나뭇가지에 잎들이 새살 돋듯 돋았다. 둥지에서 잔뜩 웅크렸던 새들도 짹짹거리며 날며 봄의 기운을 궐에 전했다.

왕과 중전은 손을 잡고 후원 뜰을 거닐며 춘삼월 정취를 만끽했다. 한 달 전 불어닥친 ‘인사 파동’은 뚜렷한 증좌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종결 처리됐다. 왕과 중전뿐만 아니라 수인으로서는 큰 산을 넘었고, 화인도 그쯤에서 물러나는 전략을 취했다.

문제는 대비전이었다. 민 대비는 몇 달 새 벌어진 일들이 뭔가 못마땅했다. 이결의 미심쩍은 행태부터 중전에 기댄 왕의 돌발 행동, 화인과 수인의 권력 다툼에 자신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기분에 언짢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한꺼번에 돌파할 뾰족한 수도 없어 잠자코 때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밖에 엄 상궁 있느냐?”

제조상궁 엄 씨가 문을 열고 대비전에 들어섰다.

“날도 풀렸으니, 태왕사에 다녀와야겠다. 채비를 갖추거라.”

태왕사는 궐에서 가장 가까운 산에 있는 절이었다. 태상왕이 나라를 다시 세운 걸 기념해 지었는데,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아담해 암자 같았다. 이곳의 주지는 일연이었는데, 태상왕 재위 때 책사였다. 태상왕 부인인 민 대비는 계절에 한 번씩 이곳에 들러 일연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는 걸 낙으로 살았다.

대비의 사찰 행은 요란하지 않았다. 엄 상궁과 나인 둘만 대동했다. 대웅전 불전 앞에 가져간 공양물을 시주하고, 미륵불상 아래 삼배를 올렸다. 일연은 대비 방문 소식을 듣고 사미승에게 찻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마마, 겨울은 어찌 무탈하게 보내셨나이까?”

막 대웅전을 나오는 대비에게 일연이 합장하며 안부를 물었다.

“스님 기도 덕분에 부처님께서 은덕을 베풀어 주십니다.”

대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일연은 그녀의 얼굴 한쪽에 수심이 드리운 걸 금방 알아차렸다.

“아직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일연이 대비를 다(茶)방으로 안내했다. 태왕사에 오면 으레 하는 순서였다. 사미승이 차를 내왔다.

“첫물 녹차이옵니다.”

사미승은 반듯하게 깎은 머리에 앳된 얼굴이었는데, 대비에게는 낯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언제 출가했느냐?”

사미승을 바라보는 대비의 눈길은 그윽했다.

“지난겨울이 막 시작했을 때 들어왔습니다.”

일연이 대신 대답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엄동 설한에 출가를 했을꼬. 그래, 나이는 몇 살이나 됐느냐?”

“속세 나이로 올해 여덟살이옵니다.”

사미승 나이를 들은 대비는 왕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궐 안의 왕도 올해 여덟 살이 됐다.

“누구는 대궐에서 진수성찬에 호의호식하고, 또 누구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산속 절간에서 겨우살이를 했구나.”

대비의 음성은 왠지 쓸쓸하게 들렸고, 일연은 그 소리를 읽었다. 일연은 왜 대비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할 것 같았다. 사미승이 나가자 방에는 두 사람만 온전히 남았다.

“마마,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지요?”

대비는 일연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마시려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거야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 아닙니까.”

“맞사옵니다. 계절은 인간을 속이지 않습니다. 철마다 모습은 달라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지요. 허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속이고, 헐뜯고, 없애려고까지 듭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대비는 일연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뜸을 들이나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렇습니까?”

“욕심 때문이옵니다.”

일연의 입에서 나온 ‘욕심’이란 말이 대비에게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란 감정을 가진 미물이고, 미물에게 욕심은 절로 생겨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 대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속물이라고도 하지요.”

일연은 대비 의중을 확실히 알았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음 말을 이었다.

“욕심을 버린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지체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죠. 지금 마마처럼 말입니다.”

대비는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일연이 마치 자신의 속을 꿰뚫고 있다고 느꼈다.

“제가 스님 손바닥 위에 있는 미물 같아 보입니다.”

대비는 살짝 고개를 숙였고, 일연은 대비의 행동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승이 무람없이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이다.”

대비는 살며시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일연에게 조언을 바라는 눈치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친다는 뜻이지요. 마마, 불의 성질을 이용하십시오. 화력이 강하면 물도 당해낼 재간이 없사옵니다.”

일연의 말은 대비를 향해 곧게 뻗어왔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 나오는 빛은 섬광처럼 반짝거렸다.

대비는 궐로 돌아오는 내내 ‘불로 물을 다스린다’라는 일연의 말을 곱씹었다. 불은 화인을, 물은 수인을 칭하는 것까진 짐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걸 실행하느냐가 대비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노승께서 내게 화두를 던졌군. 그래, 거센 불길로 물을 증발시켜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는 뜻이겠지. 증거가 없다면 타버린 재라도 증거로 삼으면 그만이다.’


민 대비는 궐로 돌아오자마자 이결을 불러 세웠다. 평소보다 차갑고 가라앉은 대비 눈빛에 이결은 본능적으로 긴장하며 무릎을 꿇었다.

“내금위 정예들을 데리고 다시 이윤의 사저로 가거라. 이번엔 ‘조사’가 아니라 ‘색출’이다.”

강도가 높아진 대비의 명에 이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마, 이미 한 차례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나이다.”

“나오지 않았으면, 나오도록 만들어야지.”

대비는 일연이 말한 ‘불’의 성질을 떠올렸다. 화인이 물을 끓여 증발시키게 하려면, 그들이 달려들 수 있는 확실한 미끼가 필요했다.

“이태겸이 단식을 풀고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에게 다시 사냥개의 목줄을 쥐여줄 생각이다. 너는 이윤의 서가 깊숙한 곳에 이것을 넣어두고 오너라.”

대비가 문갑에서 꺼내 던진 건, 다름 아닌 선왕의 독살설과 관련된 거짓 밀지였다. 수인이 화인을 몰아내기 위해 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내용이 담긴, 정교하게 꾸며진 조작된 증거였다.

“마마, 그것은 없는 죄를 만드는 일입니다.”

민 대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문갑의 모서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없는 죄라도, 쓰임이 있으면 죄가 된다.”

그리고 더 설명하지 않았다. 추가 설명이 필요하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결은 손에 든 밀지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이것을 이윤의 집에 두는 순간, 중전은 물론이고, 그녀를 지키려는 어린 왕의 노력도 모두 잿더미가 될 것이었다.

“가거라.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다’라는 소리를 한다면, 그때는 네 목이 불길 속에 먼저 던져질 것이다.”

이결은 밀지를 소매 안에 조심스럽게 숨겨 대비전을 나왔다. 그는 대비전을 나서며 깨달았다.

이번 명은 사람 하나를 죽이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싸움을 시작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번 시작한 싸움은, 아무도 끝까지 책임지지 않을 거란 예감도. 그러자 품속에 숨겨둔 은침이 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불러왔다.

*

왕은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등불 하나가 서책 위를 비추고 있었다. 왕은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글자를 읽고 있었다. 입술만 아주 조금 움직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라.”

왕은 다음 줄에서 멈췄다. 눈썹이 살짝 모였다.

“…근본이…니라.”

중전은 맞은편에 앉아서 수를 놓고 있었다. 바늘이 오르내리는 소리만 났다. 왕은 서책을 내려다보다 다시 같은 글자를 보았다. 이번에도 우물거렸다. 중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바늘을 천에 꽂아두고 손가락을 뻗었다. 종이에 적힌 한 글자를 짚었다. 왕은 그 자리를 따라 눈으로 훑었다.

“…근본이로다.”

왕은 조용히 읽었다. 중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느질을 이어갔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왕은 다시 글자를 읽었다.

“…군왕은, 백성을….”

이번에는 틀리지 않았다. 중전의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에는 등불 타는 소리와 실이 스치는 소리만 남았다. 그 모습을, 기둥 뒤 어둠에 선 이결이 보고 있었다. 왕과 중전 사이에는

명령도 없고, 시험도 없고, 옳다거나 그르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틀리면 고쳐주고 고치면 다시 읽었다. 이결은 품 안의 밀지를 떠올렸다. 한 장으로 사람의 목숨을 바꿀 수 있는 밀지, 그리고 왕의 눈앞에 있는 서책. 같은 종이인데 무게는 전혀 달랐다. 이결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지키려는 건 나라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듯.

대비가 준 밀지는 품 안에서 화로 숯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짜 밀지는 살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주었으나, 가슴팍에 닿는 은침은 뼈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 타 죽을 것인가, 얼어 죽을 것인가. 그 극단의 온도 사이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왕의 천진한 웃음을 떠올리며 이윤의 사가로 향했다.

이결은 내금위 병사들을 멀찍이 세워두고 혼자서 서가로 들어갔다. 얼굴 근육은 잔뜩 긴장됐고, 손에 든 가짜 밀지는 덜덜 떨렸다. 서가는 비어 있었다. 이윤은 부인과 함께 온양으로 온천을 떠난 중이었다. 이결은 종이 냄새가 짙게 밴 서가를 천천히 둘러보며 가짜 밀지를 숨길 곳을 물색했다. 그러다 한구석에 모아둔 서찰에 시선이 쏠렸다. 왕이 이윤에게 보낸 편지였다. 어린 왕이 서툰 글씨로 장인에게 편지글을 찬찬히 읽어갔다.

‘부왕, 무남독녀 외동을 구중궁궐로 보내놓고 얼마나 걱정이 많으십니까. 제 비록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대비마마의 위세에 꺾여 있지만, 부부의 연을 맺은 이상 지켜낼 것이니 너무 심려 놓으세요. 바람이 찹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댁내 행복과 평안을 빕니다.’

글자는 삐뚤빼뚤했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서출이긴 하지만, 부모를 허망하게 잃은 왕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결은 ‘가족’이라는 애정과 증오 사이에서 마음이 요동쳤다. 자신 역시 부친과 관계가 순탄치 못했고, 방탕한 생활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온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이결은 은침 주머니를 잠시 꺼내 본 뒤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편지를 보관해 둔 서찰 사이에 밀지를 숨겼다. 다만 밀지 모서리에 대비만이 소유한 연화 무늬 소인(小印)을 희미하게 찍어 뒀다. 그것은 대비전의 비밀 서찰이나 하사품을 봉인할 때만 쓰는 것으로, 오직 대비의 서랍 속에 보관해 내금위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물건이었다. 훗날 조사가 이루어질 때, 이 흔적은 이 밀지가 이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비전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음을 증명할 증좌가 될 것이었다. 서가를 나온 이결은 내금위 병사들과 궐로 돌아와 대비에게 임무 완료를 알렸다.

다음 날, 이태겸이 기다렸다는 듯 금부 관리들을 이끌고 이윤의 집을 들이닥쳤다. 막 온천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던 이윤은 문을 부술 듯 쳐들어온 이태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영상 대감. 허락도 없이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허락? 허락이라 하셨소?”

이태겸은 독 안에 든 쥐를 보듯 히죽거렸고, 그 모습을 본 이윤의 얼굴은 벌개졌다.

“이걸 보여드리면 허락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이태겸은 금부도사 직인이 찍힌 ‘가택 수색증’을 펼쳐 보였다.

“아니, 별안간 가택수색이라니! 이유가 뭡니까.”

이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태겸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이태겸은 대꾸하지 않은 채 서가가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을 뒤져봐라. 안을 살펴보면 필시 역모를 도모하려고 했던 증좌가 있을 것이다.”

이태겸의 말이 떨어지자 금부 관리들이 우르르 서가로 몰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뿔뿔이 흩어져 서찰들을 훑고 털었다.

“역모라니! 대관절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난 역모를 꾀한 적도 없고, 그럴 일도 없소. 뭔가 잘못된 것이오. 당장 수색을 멈추지 못할까.”

이윤은 금부 관리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때였다.

“증거가 나왔다!”

누군가 서찰 밑에서 이결이 숨겨둔 밀지를 가지고 나왔다. 이태겸은 밀지를 받아들고 안의 내용을 세심하게 살폈다. 글을 읽어가는 눈이 광기에 찬 듯 번뜩였다. 이윤은 그 눈빛에 섬뜩함을 느꼈다.

“내 전하를 뵈러 가야겠소. 여봐라, 당장 가마를 준비하라.”

이윤은 황급히 입궐 채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태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감은 전하를 뵐 수 없소. 이 밀지가 서가에서 나온 이상 대감이 갈 곳은 궐이 아니라 금부 옥사입니다. 여봐라, 저 대역죄인을 추포하라.”

이태겸의 지시에 금부 관리들은 이윤의 사지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한 다음 오랏줄로 묶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냐. 놓거라 이놈들아. 내가 누군 줄 모르더냐. 난 이 나라 좌의정이자, 국모의 아비다.”

이윤은 추포를 거부하며 몸부림쳤지만, 떼로 덤벼든 관리들의 완강한 힘에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마당에는 이윤을 금부로 압송하기 위한 우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윤은 아무렇게 풀어 헤쳐진 상투와 저고리, 버선 바람으로 마차에 실렸다. 이윤의 추포가 마무리되자 이태겸은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으며 마당에 침을 칵 뱉고 대문을 나갔다. 뒤늦게 따라 나온 이윤의 부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흙먼지를 날리며 멀어져가는 마차를 향해 곡소리를 냈다.

이윤의 체포 소식은 번개처럼 궐로 전해졌다. 대비는 소식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말로 중전을 폐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중전은 아버지가 금부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옆에 있던 어린 왕은 중전의 눈물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중전은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그러곤 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당부했다.

“전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시옵소서. 이제부터는 전하께서 저와 제 아비의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중전의 말을 들은 왕은 고개만 끄덕였다. 왕은 두려움보다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쑥 올라오는 걸 느꼈다.

“부인, 염려 마세요. 제가 중전과 장인을 지켜드릴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어린 왕의 얼굴에 결기가 서렸고, 중전은 왕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민 대비는 이결이 가져온 밀지를 받아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결이 밀지에 찍어놓은 연화 무늬 소인은 발견하지 못한 눈치였다. 이결은 그것이 훗날 중전과 이윤을 살릴 ‘진짜 증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대비는 밀지를 가지고 편전으로 향했고, 긴급 어전 회의가 열렸다. 밀지에는 이윤이 어린 왕을 시해한 뒤 군사들을 동원해 왕좌를 차지하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화인과 수인 모두 밀지를 확인했고, 수장을 잃은 수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결은 편전 기둥에 숨어 회의를 지켜봤다.

“전하, 역모를 꾀한 대역죄인 좌의정 이윤에게 참형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태겸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왕에게 고했다. 왕은 침묵했다. 이번에는 화인들이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이윤의 참형을 읍소했다. 왕이 이태겸과 화인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없소. 좌상은 중전의 아비이자, 제 장인입니다. 저를 시해할 만한 연유가 없습니다.”

왕은 또박또박 말했지만, 뒤에서 듣고 있던 대비는 속으로 웃었다.

“주상, 이윤의 집에서 역모를 도모하려던 증좌가 나왔습니다. 필체도 좌상의 것이 맞고요.”

대비는 이 말로 왕을 압박했다. 대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인들이 또다시 입을 모아 이윤의 참형을 주청했다. 맞은 편에 있는 수인은 어쩔 줄 몰랐다. 그때 이억이 나섰다.

“전하, 모함이옵니다. 좌상 대감은 그럴 분이 아니란 걸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조사한 후에….”

그때 대비가 이억의 말을 끊었다.

“수인은 지금 역적을 옹호하는 것인가. 주상, 서둘러 용단을 내리세요. 이윤을 따르는 군사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용단을 내리라는 말은 지시에 가까웠다. 왕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이결을 쳐다봤다. 왕과 눈이 마주친 이결은 눈을 깜박거렸다. 왕은 그것이 무언의 신호처럼 보였다. 왕은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왕이 갑자기 왕좌에서 내려와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왕의 돌발 행동에 서늘했던 편전 공기가 묘하게 변했다. 내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왕의 상태를 살폈다. 대비도 놀란 표정으로 발을 걷고 달려왔다.

“어서 어의를 부르거라, 어서!”

대비의 명령에 나인 둘이 재빨리 편전을 빠져나갔다. 왕은 계속 비명을 지르며 배를 잡고 편전 바닥을 뒹굴었고, 당황한 신하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의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무얼 드셨기에 탈이 나셨답니까.”

대비는 왕의 배를 쓸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 아픕니다. 숨도 쉬기 어렵습니다.”

왕은 식은땀을 흘리며 헐떡거렸다.

“안 되겠다. 어의가 올 때까지 지체하다 변고가 날 듯하다. 주상을 업고 서둘러 내의원으로 가거라.”

대비의 말에 이결은 재빨리 왕을 일으켜 업고 내의원으로 내달렸다. 왕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이상 회의는 진행할 수 없었다. 대비는 왕이 쾌차한 뒤 다시 회의를 열겠다며 대신들을 물렸다. 대신들은 하나둘 퇴청했고, 편전에는 대비와 이결만 남았다.

“이 중차대한 순간에 무슨 변고냔 말이냐. 쯧쯧.”

대비는 기가 찬 듯 혀를 찼고, 이결은 말없이 대비의 심기를 살폈다. 다행히 대비는 왕이 일부러 그랬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아픈 척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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