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대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건 찰나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보료를 움켜쥐며 편전이 떠나갈 듯 소리를 높였다.
“조작이다! 누군가 감히 내실에 침입해 소인을 훔쳐다 가짜 밀지를 만든 게 분명하다! 주상은 어찌 이리 비열한 함정에 속아 넘어가신단 말입니까!”
비명에 가까운 대비의 항변에도 편전 안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왕을 압박하던 대신들 눈빛이 갈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증거는 명확했고, 왕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왕은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나 대비 쪽을 향해 돌아섰다.
“마마의 말씀대로라면 사태는 더욱 엄중해집니다. 대비전 안방까지 도둑이 들어 나라를 뒤흔들 위조 밀지를 만들어낼 동안, 마마께서는 무엇을 하셨단 말입니까? 궐 안 기강이 이토록 처참히 무너졌다면, 그것이야말로 마마께서 이 나라를 보살필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아니옵니까.”
왕의 일갈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승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승정원 직인이 찍힌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전하, 승정원에서 보관 중인 좌상의 친필 서찰과 이번 밀지를 대조한 결과입니다. 겉모양은 흡사하나 필법이 전혀 다릅니다. 이 밀지는 위조된 것이 확실하옵니다!”
편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대비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던 화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였고, 수인은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왕은 당황해 입술을 파르르 떠는 대비에게 따지듯 물었다.
“마마,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대비는 고개는 숙이지 않았지만, 입을 꾹 닫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왕은 내금위장에게 어명을 내렸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대비마마를 처소에 유폐하라.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누구와의 접촉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대비가 내금위 군사들에 의해 끌려나가듯 자리를 뜨자, 편전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왕의 힘을 확인한 대신들이 이번에는 화살촉을 더 깊은 곳으로 돌렸다.
“전하! 밀지가 조작되었다면 선왕의 갑작스러운 승하 또한 의문투성이 옵니다! 당시 내의원 기록과 처방을 재조사하여 진상을 밝혀야 하옵니다!”
화인과 수인 할 것 없이, 대비에게서 왕으로 말을 갈아타려고 시도했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옥좌에 앉은 왕은 그들의 아귀다툼을 맑고 선명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결 역시 편전 공기가 바뀌었음을 직감했다. 대비의 몰락과 신료들의 태세 전환에 이결은 쓴웃음을 지었다.
편전 밖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선왕 독살설을 앞세운 수인과 화인은 서로를 물어뜯으며 우르르 내의원으로 몰려갔다. 오 년 전 약탕관 기록과 먼지 쌓인 검안서들이 그들의 손에 갈가리 찢기며 권력의 새로운 명분이 되어 흩날렸다. 그 소란의 한복판에서, 왕은 가장 조용한 곳으로 이결을 불러들였다.
“가까이 오라.”
왕의 목소리는 내의원의 소란이 닿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무릎을 꿇은 이결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품 안 은침을 살짝 만져졌다. 선왕의 부인이었던 경희왕후. 선왕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존재는 세상에서 버려졌지만, 이결은 아직 그녀의 쓰임새를 안다. 그리고 윤영식의 아들 사월이 왕좌에 앉기까지 자신과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의원의 저 광대들이 찾아내려는 진실은 가짜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대비를 죽일 독약이 필요한 것뿐이지. 하지만 넌 저들과 다르지 않은가.”
왕이 천천히 몸을 숙여 이결과 눈을 맞췄다. 여덟 살 아이의 눈망울이라기엔 너무도 깊은 심연이었다.
“그날, 약탕기를 다룬 자가 어의 말고 필시 누가 또 있을 것이야. 그게 누군지, 그걸 알고도 입을 닫은 자들은 누구인지, 네가 찾아야겠다.”
이결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모든 걸 걸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손을 품 안에 집어넣어 은침을 꺼내 놓았다. 독에 절어 빛을 잃은 침이 비루하게 굴렀다. 이결은 이 독이 어떻게 쓰였는지, 왜 경희왕후가 이 침을 지닌 채 궐 밖으로 밀려나야 했는지 아직 그 전말을 다 알지 못했다.
“그것이 지난번 아직은 열어보지 말라고 했던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왕은 이결의 대답에 짧게 생각한 뒤 다시 말했다.
“네 손에 있는 그것의 출처는 묻지 않겠다. 다만, 그 침을 검게 물들인 독의 정체는 알아야겠다. 그것이 선왕을 죽인 것과 같은 종류인지, 아니면 그분을 궁 밖으로 내쫓기 위해 누군가 치밀하게 설계한 덫이었는지.”
왕의 시선이 이결의 눈동자 깊숙이 박혔다. 왕에게 은침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도, 혹은 대비를 폐위시킬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네가 가진 그 침과 대조할 내의원 밀기(密記)를 찾아내라. 독이 어떻게 쓰였는지, 그 독이 누구의 손에서 흘러나왔는지 하나하나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내 앞에 가져오라. 이것만이 우리가 이 위태로운 왕좌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다. 이건 명이다.”
이결은 바닥에 이마를 댔다. 이제 그는 대비의 사냥개나 왕의 칼이 아닌, 오 년 전 멈춰버린 진실의 장막을 걷어내야 하는 추적자였다.
“명, 받들겠나이다. 기필코 독의 실체를 밝혀 경희왕후 마마의 억울함과 이 궐의 검은 진실을 찾아내겠나이다.”
이결의 대답이 떨어지자 왕은 비로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 비친 뜰의 아지랑이가 왕의 얼굴에 겹쳐 앉아, 시야가 잠시 어질거렸다.
*
처소에 유폐된 대비는 위기를 빠져나갈 비상구를 궁리했다. 하지만 화인과 수인 모두 자신에게 등을 돌리면서 난국을 타개할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대비는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비는 엄 상궁을 은밀히 불러 서찰 한 통을 건넸다.
“태왕사 주지에게 주고 오너라. 너와 내 목숨이 달린 일이니, 보는 눈이 없어야 한다.”
엄 상궁은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받아들었다.
한밤중, 엄 상궁은 젖은 수건처럼 축 처진 몸을 이끌고 궐 서쪽 쪽문을 나섰다. 유폐된 대비전의 정적을 뚫고 나온 그녀의 손에는 땀으로 눅눅해진 서찰이 쥐어져 있었다. 대비가 마지막 지렛대로 선택한 태왕사 주지, 그에게 닿는 길만이 자신들이 살 유일한 길임을 그녀는 직감했다.
밤바람이 날카롭게 뺨을 스쳤으나 엄 상궁은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태왕사로 향하는 가파른 산길에 들어섰을 때, 나뭇잎과 부엉이 우는 소리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짐승의 발소리라기엔 너무도 정교하고, 바람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거기, 누구요!”
엄 상궁이 비명 섞인 목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복면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결이었다. 그는 내의원에서 독의 흔적을 쫓던 중, 대비전에서 나온 엄 상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야심한 시각에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가. 손에 든 건 또 무엇이고?”
이결의 채근하듯 물음에 엄 상궁은 숨이 차올랐다.
“이, 이것은…그저 불전에 시주할 것이다.”
엄 상궁은 서찰을 소매 깊숙이 숨기며 뒷걸음질 쳤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사이 이결의 검 끝이 그녀의 목울대를 겨눴다.
“그것이 전하의 왕좌를 흔들 것이냐, 아니면 마마의 무덤을 팔 것이냐.”
이결은 엄 상궁 손에서 서찰을 낚아챘다. 봉인된 서찰 끝에는 대비의 연화 무늬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엄 상궁은 오늘 밤 태왕사에 다녀온 겝니다. 거기서 주지에게 이 서찰을 무사히 전하고 왔다고 대비께 고하세요. 그것이 엄 상궁께서 살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엄 상궁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나 부리나케 궐로 돌아갔다. 이결은 엄 상궁에서 빼앗은 서찰을 펼쳐보았다. 서찰을 본 이결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천지가 경악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결은 섬뜩했다. 만약 서찰이 태왕사 주지 손에 닿았다면, 궐은 걷잡을 수 없는 피바람이 불어닥칠 터였다. 그는 서찰을 품속에 넣고 황급히 왕의 침소로 향했다.
중전과 막 잠자리에 들었던 왕은 이결의 부름에 일어나 불을 밝혔다.
“들어오너라.”
이결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왕과 중전에게 납작 엎드려 엄 상궁에게서 빼앗은 서찰을 내밀었다. 왕은 중전과 함께 등불 밑에서 서찰을 읽어내렸다. 그들 역시 이결과 마찬가지로 읽는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대비마마께서 어찌 이런 일을….”
중전은 혀를 내둘렀고, 왕은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오히려 잘 되었소. 이 서찰이 대비마마의 수족을 자를 결정타입니다. 대비께서 이 서찰이 태왕사 주지에게 전달됐다고 믿는다면, 제대로 올가미에 걸리는 겁니다. 그나저나 자네가 큰 공을 세웠네.”
왕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결의 손을 잡았다. 밤바람에 손은 차갑게 굳었지만, 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중전도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이결이 왕에게 전한 서찰 내용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태왕사 주지께 이릅니다. 주상과 중전의 춘추가 미령하여 그간 국사를 대신 돌보았는데, 간악한 붕당의 무리가 연합해 이 늙은이를 능멸하고 대비전에서 한 발 짝도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쪼록 주지승께서 도처의 승병을 모아 입궐하기 바랍니다. 일주일 뒤, 궐 서쪽 문을 열어놓겠습니다. 무능한 대소신료와 왕과 비를 내쫓고 나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구국의 길에 부처님의 은덕을 발휘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대비는 승병을 동원한 무력 정변을 준비한 것이다. 서찰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대비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민 대비는 그런 줄도 모르고 유폐된 처소에서 반역의 성공을 확신하며 차를 마셨다. 엄 상궁이 돌아와 전한 ‘거짓 보고’를 듣고 거병(擧兵)의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대비전의 밤은 기묘한 활기로 가득 찼다. 유폐된 처소의 적막한 공기조차 민 대비의 흥분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민 대비는 경경히 빛나는 촛불 앞에 앉아,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가장 화려한 당의를 꺼내 입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여전히 궁궐의 중심이었고, 흔들림 없는 권력자의 자태였다. 그녀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비녀를 고쳐 꽂으며, 곧 서쪽 문 너머로 들려올 말발굽 소리를 상상했다.
“이 나라의 주인은 핏줄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의 것이다.”
대비는 나직하게 읊조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엄 상궁이 찻물을 더 떠왔을 때, 대비는 그녀가 전한 ‘거짓 보고’—태왕사 주지에게 거병 요청 서찰을 전달했다—를 한 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 그녀에게 정복이란 이미 정해진 결과였고, 남은 간 왕좌로 돌아가 무능한 대소신료와 어린 왕을 몰아내는 일뿐이었다.
약속한 자정, 궐 서쪽 쪽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비는 누구의 비호도 받지 않고 스스로 문턱을 넘었다. 등불을 든 엄 상궁이 뒤를 따랐으나, 대비의 눈은 오직 어둠 속에서 나타날 승병들의 깃발만을 기다렸다.
“들리느냐. 저 멀리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대비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들리는 건 자신의 거친 심장 소리와 숲을 뒤흔드는 소슬바람뿐이었다. 환희로 일렁이던 대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든 건 순식간이었다. 문밖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태왕사 주지도, 승병의 무리도 아니었다. 횃불을 치켜든 이결을 필두로 수백 명의 내금위 군사들이 성벽처럼 대비를 에워쌌다.
“아니, 너희가 어떻게! 주지승은 어디 있는 게냐!”
대비의 카랑카랑한 소리에 이결은 대답 대신 길을 터주었다. 군사들 사이로 왕과 중전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 왕의 손에는 땀과 독기에 절은 서찰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왕은 대비가 승리를 확신하며 썼던 역모의 증거를 그녀의 발치에 던졌다.
“마마, 기다리던 부처님 은덕은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대신 염라왕께서 지옥 불에서 보낸 서찰이 먼저 도착했군요.”
대비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판 무덤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음을 깨닫는 순간, 그녀가 걸친 화려한 당의 위로 스산한 밤이슬이 피처럼 맺혔다.
“주상, 어찌 감히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대비의 마지막 사자후에도 왕의 눈빛은 깊은 심연처럼 고요했다. 왕은 대비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리고 일찍이 그녀가 자신에게 가르쳤던 비정한 논리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 나라의 주인은 살아남는 자의 것이라 하셨지요. 마마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오늘, 이 궐에서 살아남은 자는 저와 만백성, 그리고 진실뿐입니다.”
대비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들이 달려들자, 왕은 포승줄을 물리며 마지막 예우를 갖추게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살려두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화려한 차림으로 왕좌를 호령하던 권력자의 위엄은 사라지고, 역모의 증거 앞에 떨고 있는 죄인만이 남았다.
대비는 양쪽에서 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금부로 압송됐다. 한때 ‘왕은 묻는 자리가 아니라 정해지면 따르는 자리’라고 호령하던 그녀는, 이제 자신이 정한 죽음의 길로 비참하게 끌려가며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상실감을 맛봐야 했다. 대비의 오랜 웃음이 멈춘 자리에는 난투와 피바람 대신, 어린 왕이 선포한 새로운 질서가 내려앉고 있었다.
*
대비가 옥사에 갇힌 후 대소신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왕에게 참형을 주청했다. 그러나 왕은 결정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다. 선왕의 독살설 조사가 끝난 이후에 함께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들은 선왕의 독살을 주장하면서 왜 증좌를 내오지 못하는 것이오?”
왕은 조회시간에 기다렸다는 듯 선수를 쳤다. 화인과 수인 모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마마, 내의원을 샅샅이 뒤지고, 어의를 신문했지만, 독살설을 증명할만한 건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선왕께선 지병으로 승하한 것 같사옵니다.”
이태겸은 기가 잔뜩 죽은 목소리로 아룄다. 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것이 무슨 말이오. 언제는 독살을 강하게 주장하더니, 이제 와선 지병이라니! 경들은 지금 이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능멸하려는 것인가?”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신들을 향해 호통쳤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편전에 든 모든 대소신료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경들이 선왕의 승하한 이유를 밝히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찾아내겠소. 역모를 주동한 대비의 신변은 그 이후에 처리할 테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아시겠소?”
왕의 기세에 눌린 대신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결이 선왕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전까지 대비는 목숨을 연명했다.
이결은 마음이 급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정 대신들의 태도는 바뀔 게 뻔했다.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며 왕을 압박하려는 건, 대비가 유폐되고 옥사에 갇힌 후에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바꿔 말하면,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지키고 가문을 지키는 유일한 생존방식이었다. 그래서 하루속히 은침과 선왕 독살설의 관계를 입증해야 했다. 이결은 경희왕후를 다시 찾았다. 은침과 선왕 죽음의 내막을 알고 있을 유일한 목격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가에 도착했을 때, 왕후는 부재했다. 여부살이를 떠났다고 했다. 이결은 곧장 길을 나섰다. 한시가 급했다.
남산 기슭에는 진달래와 개나리, 철쭉 같은 봄꽃이 흐드러졌고, 나비와 벌이 살랑이는 봄바람을 이리저리 타고 다니며 완연한 봄날 풍경을 자아냈다. 하지만 선왕의 묘 곁에는 초막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조정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선왕의 유해를 왕릉이 아닌 남산에 묻었고, 비석하나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거기가 왕의 묘소라는 걸 알지 못했다. 이결이 선왕의 묘소에 도착했을 때, 왕후는 잿밥을 차려놓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소복에 붙었던 검불이 바람결에 폴폴 날렸다. 인기척을 느낀 왕후는 뒤를 돌아봤다. 이결이 멀찌감치서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왕후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이결도 선왕의 묘 앞에 다가와 절을 올렸다. 왕후는 이결을 초막 안으로 안내했다. 거적 데기를 걷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는지 이결이 먼저 입을 뗐다.
“마마, 선왕의 죽음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마마께서 제게 주신 은침도 그렇고, 궐에서도 독살설이 파다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의원을 샅샅이 뒤지고, 어의를 조사해도 이렇다 할 혐의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왕후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결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말이 멈췄을 때, 비로소 눈을 떴다.
“그럴 수밖에요. 내의원 사람들도 대비의 사람들이니까요. 목숨이 끊어져도 실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왕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결은 왕후의 그 확신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마마, 그렇다면 선왕의 죽음은 영영 밝힐 수 없다는 말이옵니까?”
이결의 말 끝에는 답답함과 허탈함이 묻어 있었다.
왕후는 조용히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이결도 따랐다. 왕후는 선왕의 묘를 지나 산기슭을 따라 걸었다. 어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걷던 왕후가 걸음을 멈춘 건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벽 근처 계곡이었다. 계곡 물줄기를 따라 이름 모를 꽃과 키 낮은 풀이 무성했다. 왕후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새순 줄기 모양의 풀 앞에 섰다. 줄기는 가늘지만 곧고, 잎은 깊게 갈라져 바람이 스칠 때마다 칼날처럼 흔들렸다.
“쑥인 것 같기도 하고, 미나리 같기도 합니다.”
이결은 새순 한줄기를 꺾어 들고 유심히 들여다봤다.
“투구꽃입니다.”
“이게 꽃이라고요?”
“가을에 투구 모양의 보라색 꽃이 핍니다. 아름답지만 가까이 두기엔 독한, 조용히 서서 죽음과 약 사이의 경계를 지키는 꽃이지요.”
이결은 왕후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듯 말 듯했다. 하지만 다음 말을 듣고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험한 독초라서 민감한 이들은 꽃을 만진 손으로 얼굴만 만져도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입니다. 어린잎을 나물로 알고 먹었다간 환각에 시달리다 죽을 수도 있지요.”
왕후의 의미심장한 투구꽃 설명에 이결은 품속 은침이 떠올랐다. 왕후는 선왕 죽음의 단서를 알려주려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왕후께서는 투구꽃을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십니까?”
이결이 물었다.
“조부께서 약방을 운영하던 한의사였습니다. 어릴 적 동무들과 놀다가 무심코 꺾어온 투구꽃을 조부께 보였더니 설명해 주시더군요. 이 꽃에서 나온 독을 침에 묻혔을 때 검게 변한 것도 직접 보여주더이다.”
왕후는 말을 더 이었다.
“선왕께서 저녁상을 물리고 드신 탕약 바닥에 마른 투구꽃가루를 봤습니다. 발작을 일으키고 어의가 침을 놓아 진정을 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은침이 검게 변했고, 선왕께선 곧 승하하셨습니다.”
왕후의 말을 들은 이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탄식했다.
“내의원 기록에 투구꽃은 없었습니다.”
“기록에 있었다고 해도, 독초라는 걸 아는 이는 궐 안에 어의밖에 없습니다. 어의는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았겠지요. 은침은 모두 여섯 개였습니다. 한데 아침에 보니 모두 사라지고, 이불 속 한 귀퉁이에 떨어진 하나를 겨우 발견한 겁니다.”
왕후는 선왕 죽음의 전모를 이결에게 전달했다. 이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후에게 절을 올렸다.
“마마, 고맙습니다. 이 길로 궐에 들어가 선왕 폐하의 죽음을 낱낱이 고하고, 관련자들을 엄벌하겠나이다.”
*
궐 안은 여전히 선왕의 독살설을 두고 서로를 물어뜯는 화인과 수인의 고함으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이결은 그들이 몰려 있는 편전 대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내의원 구석의 약재 출납소로 향했다. 대신들이 입으로만 ‘진상 규명’에 매달릴 때, 진실은 먼지 쌓인 장부의 빈틈 속에 숨어 있음을 그는 직감했다.
이결은 최근 몇 년간 약재 출납 대장을 거꾸로 훑어 올라갔다. 그의 눈은 오직 하나, 산기슭에서 본 투구꽃의 또 다른 이름인 ‘초오(草烏)’만을 쫓았다.
한참을 뒤지던 이결의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선왕의 승하를 불과 열흘 앞둔 시점의 기록이었다. 다른 약재들의 수량은 정확하게 적혀 있었지만, 유독 ‘초오’가 적힌 줄만은 누군가 일부러 침을 발라 문지른 듯 글자가 번져 있었다. 그 위로 덧칠해진 건 평범한 보혈제였는데, 종이 뒷면을 불빛에 비춰보자 미처 지워지지 않은 획의 잔상이 희미하게 살아났다.
‘대비전, 초오 삼 냥.’
이결의 심장이 요동쳤다. 경희왕후가 계곡에서 보여줬던 치명적인 독초가, 기록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비전 문턱을 넘은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약재가 아니라, 선왕의 심장을 멈추게 할 소리 없는 화살이었다.
이결은 품 안에서 독기에 절어 검게 변한 은침을 꺼냈다. 산속에서 보았던 투구꽃의 서늘한 기운이 장부의 빈틈과 만나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궐 안의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작은 삭제의 흔적이, 이제 대비의 목을 죌 완벽한 올가미가 될 터였다.
이결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덮고 품속 깊이 갈무리했다. 밖에서는 가짜 진실을 외치는 광대들의 소란이 들려왔지만, 이결의 눈앞에는 왕좌를 지켜낼 진짜 칼날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어둠을 틈타 왕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왕에게 독살설의 실체를 고할 차례였다.
“전하, 이결이옵니다.”
왕은 문밖에서 들리는 이결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마침 중전도 왕과 차담 중이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 드디어 조사를 마무리한 것이냐?”
왕과 중전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결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네 전하. 선왕의 독살설 조사를 모두 마쳤나이다.”
이결은 왕과 중전 앞에서 자신이 조사한 모든 사항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이결의 보고를 받는 동안 왕과 중전은 대비의 치밀함에 놀랐고, 한통속인 내의원에 혀를 찼고, 무능한 대신들에 한숨을 지었다.
“전하, 이제 대비마마를 어찌하시겠습니까?”
이결이 왕의 눈치를 살피며 의중을 물었다. 왕은 입을 굳게 닫은 채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중전도 왕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자못 궁금했다.
“으음, 글쎄…만약 이결 자네가 나였다면 어찌했겠나?”
왕이 거꾸로 이결에게 물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소신이 어찌….”
이결은 당황해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네. 대비가 계략을 잘못 짰다면 나 대신 자네가 왕좌에 있었을지 모를 일 아닌가?”
왕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감히 저 같은 소인배가 왕자라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농이라도 그런 말씀은 거두어주시옵소서.”
왕은 연신 웃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다시 묻겠다. 이 사건의 처음과 끝을 다룬 조사관으로서 대비를 어찌 처리하면 좋겠느냐?”
왕은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마마, 대비는 선왕을 시해한 주모자이옵니다. 국왕을 멸하고, 조정의 권력을 손아귀에 쥐려고 한 국정농단 세력은 발본색원해야 마땅하옵니다. 그래야만 국본의 위엄을 바로 세울 수 있사오며, 백성 또한 그 죄를 분명히 알 것이옵니다. 대비 민 씨와 내의원 어의 신기륜을 능지처참하소서.”
이결은 대비를 참형하는 것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종식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왕은 이결의 진심 어린 주청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그만 가서 쉬도록 하여라.”
왕은 이결을 내보낸 뒤 중전과 남은 차담을 이어갔는데, 어떤 진지한 대화가 오갔는지 자정 넘어까지 처소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조회가 열렸고 이결은 비장한 각오로 대소신료 앞에 섰다. 선왕의 의문사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위함이었다.
“대비 민 씨는 맹독성 약재인 초오를 비밀리에 대량 밀반입했고, 그걸 어의 신기륜에게 전달했습니다. 신기륜은 다량의 초오를 약재 출납 장부에 보혈제로 고쳐 쓴 다음 선왕 폐하께 탕약으로 올렸습니다. 그걸 드신 선왕께선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은침으로 진정을 시켰지만, 이미 독은 온몸에 퍼진 이후였습니다. 이후 독으로 검게 변한 은침 여섯 개 중 한 개는 경희왕후가 이불 밑에서 발견했지만, 나머지 다섯 개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대비전 수색 과정에서 자물쇠가 채우진 서랍 속 보자기에서 은침이 발견됐습니다. 다섯 개 모두 검게 변한 상태였고, 일부에서는 미세하게 초오 독이 검출됐습니다. 이로써 대비 민 씨가 선왕을 독살한 소행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을 주상 전하와 조정에 아뢰옵니다.”
이결의 보고에 대소신료 모두 혀를 내두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 역시-이결이 그랬던 것처럼-왕에게 대비 민 씨의 참형을 주청했다. 그러나 왕은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비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참형으로 다스린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비 하나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권좌를 둘러싼 화인과 수인의 전쟁이 끝나진 않을 것도 알았다. 왕은 결심한 듯 어명을 내렸다.
“선왕 독살을 주도하고, 승병을 동원해 역모를 꾀한 대비 민 씨를 폐하노라. 그 죄는 살아선 결코 씻을 수 없음이 마땅하다. 다만, 한때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큰 어른이었고, 사후 국정의 혼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봐라, 대역죄인 민가 홍연을 대부도로 유배 보내고, 유배지 십리 안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라.”
왕의 어명에 편전은 크게 술렁였다. 어명이 못마땅한 듯 웅성거리는 소리도 하나둘 튀어나왔다.
“어명이다. 경들은 받들라.”
왕이 일어나 고함을 치듯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편전은 다시 조용해졌고, 신하들은 고개와 허리를 숙였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비의 처벌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왕은 대비를 제거하는 대신, 유배를 선택함으로써 왕권 강화를 노렸다. 전날 밤, 이결이 처소를 떠난 뒤 중전과 마주 앉아 밤새 나눈 대화의 결말이기도 했다. 옥사에서 유배 소식을 들은 민 씨는 모든 걸 체념한 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난날의 부귀와 영화가 더듬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결국 살아남은 건, 내가 아니라 주상이었군요. 제가 주상께 졌습니다, 그려.”
대비를 태운 수레가 도성을 빠져나가자 그녀의 압송을 보러 나온 백성들은 욕을 하기도 하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에이, 나라를 이 지경을 만든 고얀 것! 저런 건 육시를 해서 저자에 걸어놔야 하는디 말여.”
“그래도 어진 임금께서 목숨은 살려주셨으니, 우린 이제 새 세상을 만난 것이네.”
사람들의 악담과 흥분 속에 폐비를 실은 수레는 쉬지 않고 대부도로 향했다. 대부도까지는 꼬박 닷새가 걸렸다. 수레에 갇혀 잠을 설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민 씨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졌다. 유배지에 도착해선 부쩍 몸이 쇠약해졌다. 미음 한 수저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자리는 이미 무너졌다. 더 이상 어린 왕의 뒤에서 왕과 대소신료를 내려볼 수도, 왕좌에 앉아 크게 하품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 현실을 마주한 민 씨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 당도한 뒤 꼭 일주일 만이었다.
민 씨의 자결 소식을 들은 왕은 탄식했다. 죽음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민 씨의 속내를 짐작할 것 같아 더 안타까웠다. 왕은 편전에 혼자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마, 기억하십니까. 이 자리에서 왕의 자질 검증을 하던 날을요. 그때 세 가지를 말씀하셨죠. 왕은 말을 잘해야 하고, 두려움을 숨길 줄 알고, 버텨내야 한다고. 네, 저는 이제 서출 출신 어린애 윤사월이 아닙니다. 말은 신중하고, 두려움은 버렸으며, 끝내 버틸 줄 아는 힘이 생겼으니까요. 그 힘은 마마와 부딪치며 하나씩 배운 것들이옵니다. 부디, 다음 생은 궐과는 먼 곳에서 필부의 딸로 태어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