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비의 자결 소식은 종소리처럼 궐 안에 퍼졌다. 조회가 끝나자마자 대신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한 달 전만 해도 대비 눈치를 보며 웃던 자들이, 이제는 왕의 기침 소리 하나에도 몸을 움츠렸다. 편전의 문이 닫히자, 왕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줄지어 서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왕의 손은 점점 더 옥좌의 팔걸이를 깊게 움켜쥐었다.
“물러들 가세요.”
짧은 한마디였다. 대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편전에는 왕과 이결만 남았다. 제법 더운 바람이 열린 창을 타고 들어왔다. 왕은 소매를 걷으며 입을 열었다.
“나라가 조금은 조용해질 줄 알았다.”
이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해졌다는 말이, 평온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궐 안의 사람들은 대비를 잃었지만, 욕심까지 잃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자가 없다. 다들 자리가 어디로 움직일지만 보고 있지.”
이결은 무릎을 곧게 세운 채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는 제자리에 계시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도 웃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내다봤다. 뜰에는 전날 내린 비가 채 마르지 않아 흙빛 웅덩이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그 위로 바람이 스치차, 물결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제까지는 대비에게 고개를 숙이던 자들이 오늘은 나를 본다. 하지만 내 얼굴이 아니라, 내 뒤를 보는 것이다.”
어조는 담담했지만, 말 끝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이결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전하께서는 이제 누구의 그림자도 아니시옵니다. 이 나라의 군왕이옵니다.”
왕은 고개를 돌려 이결을 봤다.
“그 말이 제일 무섭구나. 그림자가 없다는 건, 햇볕을 온몸으로 맞아야 한다는 뜻이니까.”
편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밖에선 까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고, 왕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손만 바뀌었을 뿐, 나라가 바뀌진 않은 모양이다.”
왕은 다시 옥좌에 등을 붙였다. 아직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이결의 눈에는 어느 때보다 크게 보였다. 이결은 왕의 모습을 보며 대비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더 무거움을 느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누구도 먼저 칼을 뽑지 않을 뿐이었다. 이결은 속으로 되뇌었다.
‘전쟁은 조용할수록 길어진다.’
“전하, 탕평 인사를 하옵소서. 그리하여 화인과 수인을 견제하고, 외척을 멀리 두소서. 나라를 바꾸는 첫 관문인 듯하옵니다.”
이결은 그 말을 남기고 편전을 떠났다. 왕은 가만히 앉아 이결의 조언을 곱씹었다. 왕은 점심 수라를 거른 채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에 인사 문서를 올려놓고 반나절 넘게 궁리했다. 다만,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화인과 수인을 고루 등용하려 했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상 개혁은 어려웠다.
반대로 그들을 배척하자니 중용할만한 인물도, 구심점도 보이지 않았다. 왕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소매로 훔쳤다.
왕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을 즈음, 중전의 부친이자 수인 당수 이윤이 찾아왔다. 그는 평소보다 한참 일찍 입궐했다. 그는 왕 앞에 예를 갖춘 뒤, 준비해 온 말을 담담히 전했다.
“신은 이제 정계를 떠나겠습니다. 낙향해 남은 생을 조용히 보내고자 합니다.”
왕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윤의 등 뒤에는 권력도, 청탁도 없었다. 다만 오래 버텨온 자의 회한만이 서려 있었다.
“전하께서 더 이상 외척의 그림자를 걱정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좌의정 관직과 수인 당수를 내려놓겠다고 했다. 왕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노회한 정객의 깊은 주름을 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의 상징이 스스로 내려옴으로써 왕이 홀로 설 기회를 준 것이다. 궐내 가장 강력한 외척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 나갔다.
같은 날, 이결도 떠날 뜻을 밝혔다. 그는 화려한 공적도, 보장된 탄탄대로도 마다한 채 예전처럼 자신이 처음 있던 거친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원래 있던 변방으로 돌아가겠나이다. 전하의 곁에는 이제 검보다 붓을 든 자들이 더 필요하옵니다.”
왕은 그도 붙잡지 않았다. 이결이라는 존재는 왕에게 든든한 방패였으나, 동시에 굴곡진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 거울이기도 했다. 이결이 떠남으로써 왕은 가장 아끼는 무장을 잃었지만, 대신 자신의 시대를 오롯이 책임져야 할 고독한 통치자의 무게를 받아들였다.
궐을 나온 이결은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북쪽 산자락으로 향했다. 가파른 고갯길 위에는 보랏빛 투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투구꽃은 멀리서 보면 용맹한 장수의 투구를 닮았으나, 그 뿌리에는 생명을 단숨에 앗아가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었다. 마치 그간 자신이 걸어온 생사의 갈림길과 닮아 있었다.
이결은 품 안에서 은침을 꺼냈다. 그는 잠시 은침에 비친 자신의 지친 눈매를 바라보다가, 거칠게 흐르는 계곡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은빛 섬광이 포말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더는 독을 살피고 살기를 읽어야 하는 삶은 없을 것이었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그의 뒤척이던 세월을 하얗게 씻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 궁은 한동안 적막에 잠겼다. 외척도, 친위 세력도 물러난 빈자리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젊은 사관들의 필봉은 날카로웠고, 오래된 권력의 이름들은 하나둘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왕은 비로소 세대의 문을 열었다. 누구의 그늘도 빌리지 않는,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통치를 시작하고자 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사가로 쫓겨났던 경희왕후를 대왕대비로 복권하고, 그 이름에 걸맞은 명예와 예우를 갖추도록 명했다.
편전의 등불은 다시 밝아졌고, 끊겼던 왕실의 의례가 비어있던 자리를 메웠다. 선왕의 무덤 또한 도성 안 양지바른 곳으로 이장했다. 남산 기슭, 초막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던, 비석도 없이 버려진 듯 쓸쓸했던 무덤. 그곳은 이제 왕릉의 위용을 갖췄고, 금기시했던 선왕의 이름도 숨겨지지 않았다.
왕은 제향을 올리며 무덤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바람 끝에 실려 오는 향내 속에는 죄도, 음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정통’이라는 기록만이 비석 위에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사라졌는지, 누가 어떤 죄를 짊어졌는지. 사간들도 오로지 새로운 성세(盛世)가 시작되었다고만 기록의 첫 줄을 채웠다. 그러나 왕은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리는 죽음과 죽음을 잇대 만든 자리라는 걸. 단단하게 밟고 선 땅은 거대한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백성과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사실을.
왕은 무덤 앞에서 차가운 산바람을 맞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가 선택한 길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가슴에 얹힌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궐의 육중한 문이 닫히고, 옛 인연들의 이름들은 성벽 너머로 남겨졌다. 왕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홀로 정전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편전에는 새로 등용한 젊은 신하가 올린 첫 장계가 올라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