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이 있는 걸까?

by 재미로

손주들과 보낸 하루의 끝, 저녁 식탁에서 일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늘 그렇듯 아이들과 간단히 먹을 생각이었지만, 간식으로 배가 덜 꺼진 탓에 조금 더 놀다가 집을 나섰다.

집까지는 한 시간이 넘는다. 그냥 굶을까, 가볍게 먹을까 망설이다가 결국 초밥집에 들렀다. 예상보다 맛이 좋아 몇 점을 더 먹고, 아들네에 가져다주려고 포장까지 했다. 그 작은 선택이, 그날의 방향을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앞차가 차단기가 열리지 않는다며 갑자기 후진했고, 순식간에 우리 차를 들이받았다. 일하러 온 사람이라며 차량 등록이 아직 안 되어 급하다고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보내주려 했다. 그런데 입차 절차를 기다리며 살펴보니 번호판은 찌그러져 있고 범퍼는 벌어져 있었다. 보닛 틈까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냥 넘겼다면 더 큰 문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보험 처리를 요청하고 기다리는 동안, 상황은 점점 사람의 마음으로 번져갔다.

후진을 하지 그랬냐”는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됐다. 괜찮다며 보내주려는 나를 두고, 아내는 왜 피해자 편에 서지 않느냐며 서운함을 터뜨렸다. 아들은 사고를 낸 사람이 사과보다 자신의 사정만 먼저 말하는 태도가 무례하다며 화를 냈다. 잘못하고도 미안함을 모르는 세상이라며, 점점 더 단단해지는 그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나는 한편으로 그 사람이 안쓰러웠다. 일하러 가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기다려주는 우리는, 마치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비슷할 텐데, ‘미안하다’는 한마디의 부재가 누군가는 바쁜 사람으로, 누군가는 한가한 사람으로 갈라놓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직접 가지 않고 배달을 시켰다면.

포장을 하지 않았다면.

초밥집이 그저 그랬다면.

평소처럼 해장국집에 갔다면.

아니, 간식을 먹지 않아 손주들과 저녁을 함께했다면.

그중 하나만 달랐어도 없었을 일이다.

그래서 문득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양자역학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난다고 말한다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어디까지가 자유일까. 우리는 스스로 길을 고른다고 믿지만, 어쩌면 이미 놓인 도로 위를 따라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고처럼, 삶에도 피할 수 없는 구간이 있는 것일까.

생각은 거기까지 미쳤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차를 고쳐야 하고, 비용이 들 것이고, 중고값은 떨어질 것이다.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그날은, 단순한 접촉 사고 이상의 무언가를 남기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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