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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Jun 20. 2020

혼자 집에 있을 때 먹고 싶은 것

브라우니를 이해하기까지.


 내가 브라우니를 만들고 싶어 지는 때는, 대단하고 멋지고 신기한 케이크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타이밍과는 다르다. 그것 보단, 내가 지금 나를 위해 달고 부담스럽고 맛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 생각할 때 같다. 달고 진한 디저트로는 적수가 없는 것이 브라우니인데, 그래서 충동적인 디저트 갈망을 손쉽게 해결해 주는 게 아닌가 또 생각이 든다. 브라우니를 만드는 생각만으로도 일부 당 충전이 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겉모습이 그렇게 화려하고 멋지지 않아서 어디에 보여주기 위함이라기 보단, 셀프케어의 일환으로 만드는 게 브라우니라고 생각한다. 케이크를 선물하기는 좀 그렇지만 뭔가 맛있고 마음이 담긴 한 상자를 선물하고 싶을 때는, 이 다디단 초콜릿 네모들 한 가득도 아주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브라우니의 정체성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렸을 때 가지고 있었던 촉촉하면서도 가볍고, 케이크 크럼 안에 초콜릿이 녹아 있는 듯한 식감의 박스 초콜릿 케이크의 맛과 감촉으로 브라우니를 또렷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던 나는 '한국엔 진정한 브라우니가 없다'라고 단정 지었었다. 영국을 가서 부푼 기대에 골라 사 먹은 브라우니 덕에 그건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브라우니와 초콜릿 케이크는 엄연히 다른 디저트다.

 케이크는 다양한 재료가 만나 부풀어 오르는 성향의 결과물들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레브닝(leavening: 팽창제)이 들어가며, 뜨거운 공기가 내부를 부풀어 오르게 하며 가벼운 크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일반적인다. 브라우니는 팽창제가 들어가지 않고 납작한 형태로 구워지고, 식감은 스펀지 케이크가 아닌 묵직하거나 쫀득한 식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국에선 케이크가 아닌 쿠키로 분류된다. 다른 재료면에서는 케이크에 비해 훨씬 적은 밀가루, 그리고 더 많은 코코아 파우더나 녹인 초콜릿이 들어간다. 어떤 면에서는 케이크를 만들다 실수로 여러 가지 팽창제 역할을 하는 것(베이킹파우더, 소다, 달걀 등) 중 대다수를 깜빡하면 대충 브라우니가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브라우니의 역사를 알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최초 브라우니의 기원으로 알려진 제품에는 초콜릿이 전혀 첨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쿠키 바(cookie bar)'는, 실은 몰라세스(당밀)를 넣어 만들 쿠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쿠키 반죽을 네모난 틀에 넣어 바 형태의 네모난 형태로 구운 것에서 시작했다. 케이크가 아닌 핑거 푸드로 먹을 수 있는 쿠키 형태였고, 이 시기의 다양한 레시피에서 실제 'brownie'라고 불리던 쿠키는 몇 가지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금의 브라우니처럼 초콜릿을 넣어 만드는 종류는 20세기 초반에 처음 선보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것의 반응이 얼마나 좋았으면 백 년이 넘게 그대로 일까.


 브라우니가 촉촉하고 크리미 한 초콜릿 케이크 같은 것이라는 착각과 일방적인 실망을 해오다, 물론 그래도 맛있는 브라우니를 한 번은 만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게 되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의욕이 없었지만 그래도 대표적인 미국 디저트니까.... 파운드 말고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처음 레시피는 물론 내 미국 레시피의 안전망 Stella Parks의 책에 실린 레시피였는데, 처음 만들 때는 굽는 시간을 정말 모르겠어서 상당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레시피에서 알려준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가운데 찔러본 케이크 테스터로는 안된 것 같아 보이고, 표면이 이 갈색으로 예쁘게 구워지는 케이크처럼 육안으로도 확인이 어렵고.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눌러봐서 아래쪽 팔뚝 눌렀을 때 정도라고 정말 정확히 설명해놓았는데, 그렇게 비교하려니 계속 브라우니 눌렀다가 팔뚝 눌렀다만 수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뭐 어쩔 수가 없으니 일단 다 됐다 치고 꺼냈던 기억이 난다.

 처음 피칸 파이를 구워야 했을 때, 속이 익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당황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 후로 몇 가지 레시피로 여러 번 브라우니를 구워봤지만,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느낌상 괜찮을 것 같으면 꺼내고, 대체로 결과는 좋다. 사실 고기 돼지고기 익히듯 바싹 익혀야 하는 건 아니고, 재료가 설 익은 것 만 아니면 굳이 더 많이 익히느니 살짝 덜 구워져도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면 오히려 브라우니 속이 더 촉촉하고 찐득하게 된다고 할까? 베이킹에서의 내 자신감은 정확한 수치와 횟수로 따지는 경험치보다는 괜찮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도 같다. 어쨌든 브라우니를 만들면서 이건 케이크라는 것을 unlearn* 하게 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unlearn: 학습되어 믿고 있는 사실이나 관념을 고쳐 잊어버리고자 학습하는 것, 오래된 습관과 버릇을 고치려는 행동.

 

 한국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브라우니의 타입이 있다고 한다. 주로 케이크스러운 (cakey) 것과 찐득한(fudgy) 타입으로 나뉘고, 너트류가 들어가거나 추가 재료가 더해지는 타입도 있다. 개인적으로 브라우니에 너트류가 들어가는 것은 세계적으로 금지시켜야 하지 않나 자주 생각한다. 브라우니에 너트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일반적 금기사항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으로... 아무튼, 케이키한 브라우니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찐득한 초콜릿 브라우니보다는 케이크처럼 약간 가벼운 느낌이 아닐까 싶은데 그게 맞다면 나는 자신 있게 fudgy 한 브라우니를 선호한다. 정확히는 이게 케이크인지 초콜릿인지 모르겠는 정도로 묵직하고 밀도도 높은 식감의 것을 한입 베어 물고 씹다가 삼킬 때면 꼴-깍 하고 힘주어 목으로  넘겨야 하는 브라우니. 잘랐을 때 단면에 케이크 같은 크럼이 보인다기 보단, 자르고 난 칼에 묻은 진득한 초콜릿을 닦느라 바빠지는 그런 브라우니라고 해야겠다. 작게 자른 한 조각도 큰 케이크처럼 묵직한 것도 중요하겠고. 이빨 사이에 끼지 않게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혼자 집에 있을 때 먹고 싶은 그런 느낌의 브라우니.... 때때로 내가 만든 브라우니를 먹을 때, 일단 적당한 크기로 잘라놓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 다 먹나 싶어도 본능과 이성의 싸움이란, 긴장되는 균형이라기보단 주로 내 안의 동물이 원하는 것이 언제나 조금은 더 우세한 게임이라, 블랙홀 같이 묵직한 브라우니 하나도 생각보다 쉽게 사라질 수 있다.

 혼자 집에 있을 때 먹고 싶은 것, 그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들고 사진을 남기기 위해, 또는 경험을 하고 싶어 굳이 찾아가서 먹는 디저트나 음식들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내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선사하는 원초적 행복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트리트(treat)를 선사하는가? 이번 주 내내 생각해 봐야 할 질문 같다. 남의 부러움을 사는 일은 단지 남의 배를 아프게 할 뿐, 자신에게 남는 것은 없다. 역시 밤엔 라면이지, 아 비싼 식당 다 필요 없고 집밥이 최고다 식의, 소박함에서 느끼는 안전한 만족감보다는 훨씬 복잡한 문제이지 않을까. 물론 집구석에서 몰레큘러 다이닝을 통해 극강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게 어떤 종류의 셀프케어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상사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우리의 평일 낮을 없던 일로 해 줄 수 있는 원초적 행복이 뭔지 찾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라 묻는 것은 어제 폭음을 한 후 오늘 나 왜 숙취 있지? 묻는 것과 비슷하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말, 보지 못한 곳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라는 말에도 우리는 의지 하지 말아야겠다. 개인 행복의 발생은 생각보다 오가닉 하지 않다. 행복은 엄연히 일궈야 하고 찾아내야 하는, 개인의 자아 같은 것이다. 오기만을 기다리다가는 그대로 끝나버릴 수 있는 사람 인생은, 우리 엄마가 말한 것처럼 대체적으로는 불행과 고난의 연속이다. (엄마는 이어, 굳이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해 고난을 겪게 하기보단, 돌봐줄 부모 없이 태어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훨씬 더 생산적이지 않은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타고난 환경은 있지만 타고난 행복이란 없고 우리는 울면서 태어나 미소 지으며 눈 감을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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