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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Aug 26. 2020

지는 게임일지라도 한번 해보는 것

초콜릿 칩이 들어간 오렌지 파운드 케이크

 가끔 그대로 레시피를 따라 한다기 보단 새로운 맛 조합이나 방식을 찾아 내보고 싶어 질 때가 있다. 나름 레퍼토리가 많아지면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와 저기서 가져온 요소로 케이크를 만들까 고민해본다.

 내가 가장 자주 만들고 좋아하는 레시피는 우연히 찾은 크림치즈 파운드 케이크 레시피인데, 레몬 파운드를 만들어야 할 때는 다른 곳에서 레시피를 찾지 않고, 그 레시피에 레몬 재료를 더하는 식으로 만들고 있다. 사실 이 레시피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고, 괜히 다른 것을 시도해 봤다가 실패하는 게 두렵기도 하다. 최근에 나름 시도를 한답시고 어떤 케이크를 만들어 봤는데 처참하게 실패한 적이 있다. 맛에 조합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구조적 결함으로 무너져버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주말에만 시간을 내서 베이킹을 하는 홈베이커에게 한 번의 실패는 꽤 부담스러운 경험이다. 애써 준비해서 계획하고 만들어 본 것이 실패라니 또 한 주간 다른 준비를 하고 또 실패할지도 모르는 베이킹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운이 빠지기 십상이다. 뼈 아픈 트라우마 없이, 손해 보는 일이 없이 배우는 공짜 life lesson 은 있을 수 있나?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일러주는 이 실패하는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경험 없이 얻는 가상의 지혜는, 개인에게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일말의 소유권을 느끼게 해 주며 그게 지속되면 정체되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만들고 그런 삶의 가장 흔한 부작용은 그 어떤 시도도 못하게 되는 삶의 자세다.

 어디서 누가 '지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면 그게 참 거슬리는데, 그 말은 자신을 굉장히 자신만만하고 전력적인 완벽주의자로 포장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는 게 싫으니 어려워 보이는 건 안 한다, 내가 잘할 줄 아는 것만 안전 하게 해 보겠다는 말로만 들린다. 그 말에는 다양한 못난 점이 있는데,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거만함, 어려움을 피하려는 일종의 비겁함, 그리고 성공을 통한 기쁨만으로 성장하겠다는 우둔함 등등. 못난 점들을 이렇게 자세하고 원색적으로 늘어놨지만, 실은 나도 그럴 때가 종종 있고 대부분의 우리가 다 그렇다.

  뭔가 크게 실패하지도 않고 큰 실수도 안했기에 별다른 곤경에 처하지 않았던 인생은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모양새가 된 것일까? 무엇을 어떻게 했다기 보단 정말 뭘 안 해서 그렇게 무난 무탈한 것일까? 무난 무탈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이고 우리 삶에 어떤 득과 실을 가져다줄까? 탈 없이 사는 인생, 그야말로 별 탈 없이 안전하고 건강하며 크게 망하지 않아도 되니 크게 걱정할 일이 없고 애쓸 필요도 없는 삶이란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언젠가 티브이에서 누군가가 행복이란 무엇인 것 같냐는 질문에 했던 답이 떠오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걱정되는 일이 없는 생활', 이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한 동안은 그 말에 크게 공감하고 살았었다. 아무 탈만 없어도 정말 감사하겠다는 약간은 게으른 심정이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배탈이 나서 세상을 향해 기도하며 하는 생각들처럼.  '아 이 위기만 지나면 인생이 평화로울 것이다', '이번만 넘기면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야지,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라테도 안 마셔야지.....'.

 인생이 한참 무료하고 편안했을 때 가장 큰 위기와 절망이 느껴졌던 것이 기억난다. 걱정할 일도 없었지만, 아침에 눈을 떠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무난하게 탈 없이, 조용하게 대충 사는 게 장땡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말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때가 왔고, 더 이상 수평선 그래프를 그리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선견지명이 부족하고, 차분한 고찰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경험, 그것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약간은 동물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종종 사람들은 도전에 대해 불필요한 심리적 무게를 느끼곤 한다. 한 달 안에 10kg  감량하기,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 템플 스테이. 극단적이지 않으면 시도라고 느끼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영혼들이 많다. 뭘해도 대박이 나야 성공이라고 인정해주는 세상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을 다해 삶에 작은 변화를 주고 그것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면, 굳이 첫날부터 풀 코스 마라톤을 뛸 걱정을 하지 않을 텐데....

 플레인 파운드, 레몬 파운드만 만들던 나에게 그것을 벗어난 변화를 주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변화를 준 결과를 얻기는 어렵지 않았다. 단지 그것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마치 계단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이동해야만 하는 것처럼 벅찬 일이었다. 리스크는 있지만 그래 봤자 나만 겪을 실패임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만 만족시키면 된다는 마음의 평화로 레시피를 바꾸어 본다.

 보통은 플레인 파운드를 만들거나 크림치즈 베이스 반죽에 레몬 제스트와 즙을 더하거나, 때로는 레몬 글레이징 까지 올리는 방식으로 두 가지 파운드를 만들어왔다. 나는 오래전부터 오렌지향과 초콜릿 맛의 조합을 좋아해서 그 두 가지 맛의 케이크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야 할지 고민을 해왔다. 어떤 쿡북에서 다크 초콜릿 글레이즈를 얹은 오렌지 케이크를 보았다. 당연히 마음이 동요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이번에 새로 산 번트 틀을 꼭 써보고 싶은데, 글레이즈를 얹고 나면 그 아름다운 번트 틀의 섬세한 모양이 하나도 안보이려나. 이번에 직구한 기타드 초콜릿 칩이 있으니 아예 칩을 넣어 식감을 바꿔볼까? 주로 텍스처가 일관적인 밋밋한 케이크를 좋아하는 나에게 파운드에 초콜릿 칩을 더 한다는 것은 긴장되는 변화다. 어차피 해보는 김에 한번 다 몰아서 해보자.

 레몬즙 대신 약간의 오렌지즙과 오렌지 제스트를 넣고, 혹시 모를 부족함에 아주 소량의 오렌지 익스트랙트도 첨가했다. 아름다운 만큼 정말 많은 굴곡이 있는 번트 팬에 꼼꼼하게 버터칠을 해주고 반죽을 담아 가운데까지 익도록 구워주었다. 이다음 첫 위기는 케이크를 팬에서 invert (꺼내는 것) 하는 스텝인데, 팬에 기름칠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으면 구워진 반죽이 들러붙어 꺼낸 케이크의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부서진 형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 이다. 번트 팬을 이용하면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케이크가 무사히 잘 빠져나오면, 베이킹을 하면서 만나는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된다. 이때, 충분히 식히고 꺼내야한다. 다행히 예쁘게 빠져나온 케이크를 식힘망에 조심스럽게 옮기고 최대치의 인내심으로 한 김 더 식힌다. 깨끗하게 잘라질 만한 온도가 되면 잘 갈린 식칼을 준비해 어떤 부분을 잘라볼지 고민하지만 사실 잘라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기에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케이크는 잘라 단면을 확인한다. 촉촉하게 잘 익은 내부와 적당히 가라앉은 초콜릿 칩들. 오렌즈 즙이 주는 촉촉함과 제스트가 더하는 특유의 씁쓸한 향기로움이 있고, 작은 다크 초콜릿이 씹히며 은은한 오렌지 케이크 베이스를 지루하지 않지만 뭔가 아는 어른 같은 맛으로 만들어 준다.

 

 

진작에 만들어 볼 것을, 그러면 몇 번이고 만들어서 더 맛있게 잘하게 되었을 텐데? 새로 산 번트 팬도 정말 마음에 들고 여러모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정말 성공적인 맛에, 동네방네 소문도 내고 싶고, 빨리 누군가에게 맛을 보여주고 싶다. 혹여나 오렌지와 초콜릿 조합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 케이크는 좋아하지 않을까? 성공한 이 작은 도전에 마음이 많이 분주해지고 또 아드레날린이 작게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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