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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Sep 05. 2020

새롭고 어려운 경험.

바닐라 타르트




 사람에겐 무서운 습관이라는 게 있고 안정을 위해 이용하는 본능적 방어 기제가 있어서 편안함이 주는 행복에 약하다. 그러나 또다시 방어의 연장선으로 새로운 곳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것이 인간이기에 우리는 수백만 년에 걸쳐 불안정과 평화를 오가며 이렇게 이상한 동물로 진화했다. 익숙하고 확실한 행복과 낯설지만 설레는 경험의 사이에서 양 쪽을 오가며 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균형이라는 것은 말 자체에 안정감이 있지만 좌우 아래위의 무게를 맞춰 중심에 서 있고자 할 때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노력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신체적, 정신적 어떤 면에서도 그것은 어려워서, 종종 성실하고 규칙적이지만 도전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을 볼 때는 경외감이 느껴지곤 한다.

나는 어떤 한 가지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어려워하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까지에도 긴 시간이 걸린다. 타인의 거슬리는 버릇이나 말투에도 쉽게 익숙해지지 못해 불편함을 느끼고, 매일 걷는 길이여도 낯설고 어색할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길 눈은 밝다. 한동안 꾸준하게 하던 일이여도 몸에 밴 습관처럼 쉽게 그 일을 해내지를 못하고 힘들어할 때가 있고 거기에 많은 감정 소모를 하다 보면 지치기도 한다. 즉, 매일 하는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고 수행인 삶. 그래 한 가지 익숙해진 것이 있다면 매일이 새로운 이 삶이겠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나는 내 인생이 기구하거나 흥미롭지 않고, 또 항상 내가 좀 더 획기적이고 혁명적이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참 보람 없는 인생임을 느끼곤 한다.

 
 최근 새롭게 닿은 인연에게 선물 받은 책이 있다. 프랑스식 디저트를 알기 쉽게 풀이하여 설명해 놓은 쿡북이다. 대충만 넘겨 보아도 생경한 어휘와 재료들이 쏙쏙 보였다. 새롭고 설레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나는 종종 위가 꼬이듯이 아픈데, 역시나 그날도 그런 기분으로 집에 와 편안한 빈백에 앉아 조용히 페이지를 넘겨 레시피들을 살펴보았다. 보통은 새 쿡북을 사면 후다닥 넘겨 보고 원하는 아이템을 표시한 뒤 하나씩 빠르게 읽어본다.

골라 놓은 레시피를 보고 집에 없는 재료는 재빠르게 주문하고... 굉장히 설레고 가벼운 마음이지만, 이 책은 달랐다. 우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책들과 언어가 다르고 재료를 다루는 방식이 달랐다. 거기에 눈이 팽팽 돌아가는 복잡한 공정들까지, 걱정이 앞서는 동시에 내가 반복해 오던 레퍼토리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아이템의 레시피를 읽을 땐, 몇 배의 집중력이 들고 눈과 머리가 쉽게 피로해진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의미가 없기에 차근차근 한 단계씩 숙지하며 또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손으로 흉내 내가며 이해하려 하니 진도 나가기가 참 어렵다.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언어로 된 설명서를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모스 부호를 모르는데, 모스 부호로 써진 장편 소설을 글자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가며 읽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 그날 밤은 레시피 하나 읽고 진이 빠져 잠든 것 같다.

  재료가 익숙하고, 공정(비교적)도 단순해 보이는 바닐라 타르트를 골라 봤다. 두려움에 재료만 사놓고 한 2주 정도는 미루다가 어느 주말, 내가 가진 최대한의 집중력을 투자했지만 역시 굉장히 복잡한 과정이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더욱이 처음 해보는 일에 대비해 완벽힌 계획을 세우기란 참 어렵다. 경험이 없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조차 예상할 수가 없어 매 공정이 처음 디뎌보는 땅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예상되는 두려움도 없다. 누군가가 몰래 다가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 직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있듯 어려움은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맞닥뜨리고 지나쳤다.


 이 타르트를 만들면서 새삼 느낀 것은 이런 고메 디저트나 앙트르메 디저트가 얼마나 대단한지, 또 동시에 이 얼마나 부질없는 존재 인지? 손바닥 만한 부피와 공간 안에 최소 3가지의 요소로 맛과 식감의 조화를 개발하고, 각 요소를 연구하고 조리해 겹겹이 쌓고 그 위를 완벽한 표면으로 감싸고, 티끌보다 작은 장식으로 완성도를 이끌어내어 때로는 ' 어머 예쁘다' 정도의 감상을 듣는 작은 디저트. 이 작은 덩어리를 창조해 내는 데는 각종 속재료를 조리하거나 굽고, 경우에 따라 몰드에 한 가지 레이어를 넣고 냉동한 후, 다음 레이어를 담고 냉동한 후 다시 한번 반복, 표면을 씌우고 냉장, 그 다음엔 장식 등 많은 노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공정들이 필요하다. 이 디저트들은 쇼케이스에 나란히 진열되어 골라지고 순식간에 먹어진 뒤 종종 곧장 잊혀진다. 디저트의 제작이나 맛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작은 디저트를 포크로 살짝 잘랐을 때 보이는 단면 레이어에도 물론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뭐 대충 여러 재료가 안에 잘 섞여 있어서 이런 맛이 나는 것이겠거니 하겠지.


 이 타르트를 만들며 가장 힘들었던,  아니 나도 차마 대비하지 못해 당황했던 부분은 공정 사이의 기다림이었다. 우선 파트 사블레를 만들고 그다음엔 아몬드 가루로 비스퀴를 만들어 타르트링으로 여분을 잘라낸 뒤, 크렘 앙글레즈를 만들어 젤라틴을 더한 것을 상온에서 식히고, 거기에 샹티한 생크림을 믹스해 바닐라 무스를 만들어 준비해놓은 비스퀴의 타르트링안에 올리고 다음날까지 냉동한다. 이전에 만들어 놓은 파트 사블레에 얹어 슈가 파우더까지 쳐서 완성하게 된다. 식히고 굳히는 과정은 굽고 익히는 것보다 새삼 훨씬 정적이면서 느리다. 굽고 끓이는 것, 달리 말해 적당히 태우고, 필요한 만큼 수분을 제거하는 이 공정들을 어찌 보면 좀 더 급하고 과격한 조리 방식인 것일까? 케이크를 굽는 것도 참 지루하고 길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정말로 인내를 요하는 것은, 때론 굽는 과정이 아예 없을 수도 있는 이런 섬세한 디저트들이구나.

 무스 띠지를 사용하는 것이 정말 난제였다. 더 쉬우라고 사용하는 도구인데, 어설프게 쓰다 보니 진땀을 흘려가며 띠지를 둘러야 했는데 그 이유는 해보지 않으면 설명할 수가 없고, 나 조차도 도대체 뭐가 문제였기에 그게 그렇게 어려웠는지 묘사할 길이 없다. 거침없이 머랭을 만들고, 케이크 팬에 버터 칠을 하고 숨 쉬듯 계량을 해왔다. 그러다 이렇게 손발에 꽁꽁 묶인채로 무언가를 하는 기분이 들도록 하는 경험을 하니 스트레스가 동반되지만, 내 경험과 시야의 각도가 약간 벌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막상 부딪쳐보고 나니, 나 자신이 기특하고 결론적으로는 자기애에 마일리지를 더하게 되었다.



 다 만들고 나니 사진과 굉장히 흡사한 모양새에 기분이 좋았다. 신기하다. 망할 각오로 해본 건데 이렇게 된다니?  적당한 고난은 트라우마로 남지 않고 적절한 자기애가 되어 점점 더 서글퍼지는 삶에 힘이 되는 것이다. 엄청난 경험치를 쌓을 필요는 없다. 내가 기구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인생이 아니라도 내 삶을 그저 그런 것으로 평가할 이유도 없다.

 이렇게 해보면 되는 것이겠지. 특별하게 삶을 바꿀 순 없어도 나를 생경함에 던져보는 것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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