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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Oct 03. 2020

내 명상의 모양

베이킹


 앉아서 눈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10분간의 숨이 내 삶에 어떤 영상을 미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요가를 1년, 2년 하다가 살이 빠지는 운동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는 이유는 뭘까? 정말이지 바보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 자신보다도 더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속을 사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든 일은 옆에 있는 것의 영향을 받고 또 세상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들 하지만 그 흐름이 과연 완전히 유기적인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잠깐 살다 가는 이 시뮬레이션에 내가  존재하되,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며 계속해서 내 길을 가로막는 멍청이들의 헛소리에 지치지 않고 이 곳에 있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자연의 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는 참을 수 있지만 사람이 내는 소리, 공사장 소리, 자동차 소리, 골목길 오토바이 소리 이런 소음을 견디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의 소리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일까? 바꿔 말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통제 할 수 없듯이 그들이 내는 소리 또한 통제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공존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견디기 쉬워질까? 거대한 폭포의 소리는? 작은 소리로 말해도 듣기 싫은 직장 동료의 성차별적이거나 인종 차별적 발언들은? 소리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그 소리의 종류, 그 소리가 상징하는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 지저귀는 새의 소리와 저 멀리 싸우는 술 취한 사람들의 소리에는 데시벨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하는 각각의 에너지가 있다. 나를 빡치게 하는 무례하거나 무지한 사람도 언제나 만나게 된다. 단지 그 상황을 받아들일 때, 화내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며 유연하게 상황을 품고자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생각해보니 때로는 무례함 보다 무지함에 더 화가 나곤 한다, 왜일까?)

 우리의 마음은 잔잔한 물 같아서 움직임 없이 편안하던 수면에 외부적 요인이 들어와 물결을 일으키고 때로는 그것이 강해져 파도가 치기 시작한다. 이때, 불안하게 이 물결을 바라보며 잔잔해 지길 기다리기보다는, 물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면 그 물결과 파도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결국 느껴지지도 않게 된다. 서핑을 해보았다면 안다. 파도를 찾아 물이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가다 보면, 어차피 타지 못할 파도가 부서지듯 다가오곤 한다. 이때는 목을 길게 빼 얼굴을 물 밖으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수그려 아예 파도 속으로 들어가 충돌과 압력을 피해 간다. 소음이 생겨날 때, 특별히 집중할 다른 일이 없으면 온 신경은 그 소음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그 순간에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면 소음도 단지 내 주변을 맴도는 산소처럼, 또 먼지처럼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결국 평화에 물결이 이게 하는 외부적 요일을 컨트롤하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 나의 정신과 내면 안으로 다이빙하듯 들어가면 불필요하게 분출되는 말과 감정, 행동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로 인한 후회와 반성도 없게 된다. 하지만 참 불안하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라도 흔들리고 흘러넘칠 수 있는 수면과 같다니. 왜 돌 같고, 땅 같을 수 없을까.

 나는 살면서 실수도 하고 죄의식이 있음에도 과거에 대한 후회를 잘하지 않는 대신, 미래에 대한 공상을 많이 하고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불필요한 생각을 많이 한다. 그게 걱정이나 불안일 때도 있고, 설렘이기도 하다. 상황적 공상을 하는 것에 대한 중독이 가장 큰 것 같다. 그래서 이 부분을 줄이고 현재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명상을 하고 있다.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지금이 바로 내 인생인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현재를 제외한 모든 것에 내 포커스를 두는 실수를 한다.

 조금은 불안정하고, 때론 중심을 못 잡는 나에게 딴생각이 들지 않게 해주는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그것 중 하나가 바로 베이킹이다. 역시 별 다른 반전은 없다.

 베이킹이 요하는 노동과 그것에 요구되는 생각과 계획의 양은 묘한 방식으로 내 성질과 잘 맞고, 혼자서 함에도 나 자신과 협동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나에게 적절한 정신적 집중과 신체적 움직임을 제공해주는 것을 통해 내 감정의 균형은 잡아가곤 한다. 때로는 그 균형의 시소가 멈추지 않고 굴러다니는 위태로운 공이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우선순위가 뒤엉키고 즐거운 긴장감은 압박이 되고 만다. 아무도 대가를 치러주지 않을 스트레스가 생겨나는 순간에 필요한 마음들은 이렇다. 그 누구도 이 브라우니를 언제까지 몇 개를 만들어 오라고 하지 않았다. 이 케이크를 망쳐도 나 말고는 알 필요 없다. 이렇게 어떤 목표나 마지막 도착지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베이킹은 나에게 명상처럼 느껴진다.




  내가 학생 시절, 처음으로 미싱 앞에 앉아 작은 원단 조각 두 개를 겹쳐 박음질된 부분을 펼쳐서 봤던 그 단단한 실 자국을 봤던 기분이 생생하다. 처음으로 믹서 볼에 설탕과 버터를 넣고 그것이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관찰했던 그때, 오븐에 넣은 작은 반죽이 15분 후에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쿠키가 되어 나오던 기적을 경험한 날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 나는 가장 많은 기분을 느꼈다. 셀 수 없이 많은 도구와 재료를 지닌 지금, 베이킹에 대해 그때만큼 다양하고 강한 감정들을 느낄 수는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은 기적 같았고 나에겐 마치 내가 꿈꾸던 마법을 부리듯 행복하고 생경한 일처럼 느껴졌다. 모든 결과가 성공은 아녔어도, 나는 파운드케이크 하나를 굽고 쿠키를 구울 때마다 , 전개를 알 수 없는 소설의 변화무쌍한 주인공을 따라가며 넘기는 페이지들처럼 내 베이킹의 경험도 레이어를 쌓아 갔다.

 베이킹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알겠지만 실제로 뭘 만들고 조리하는 과정보다 힘든 것이 재료 준비와 계량이다. 꼭 해야 하는 중요한 단계임에도 종종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어찌나 억울하고 귀찮은지 이상한 불만을 가지게 될 때가 있다. 하지만 최선과 정성을 다해 준비를 해봤다면, 그 준비가 실제 베이킹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이해하게 된다. 어차피 재료만 담고 바로 씻어버려야 할 그릇이라 해도, 요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처럼 작업 공간에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당장 필요 없지만 중간 단계에서 분명히 유용할 것 같은 도구를 손이 닿는 곳에 두고, 또 손을 닦을 적당히 적신 작은 수건도 테이블 끝에 접어 놓는다.  중간중간 주변 정리도 해가며, 설거지는 생겨날 때마다  바로 한다. 재료 하나하나를 잘 계량하고 또 체 쳐야 할 것은 체 쳐서 담아 놓고 준비를 마치면 이미 케이크 하나 구운 듯 피곤해진다. 이렇게 피곤하게 준비를 하고 나서 베이킹을 하다 보면 바로 느끼게 된다. 그 준비에 들인 조금은 지루하고 번거로운 시간 덕에 실제로 베이킹을 하는 시간은 훨씬 더 수월해지고 골치 아프지 않다. 적은 양의 소금이나 향신료라도 미리 계량이 되어 있으면 재료를 믹스하다 말고 찬장에서 재료를 뒤져 찾고, 다른 재료가 묻은 계량스푼을 찾아내어 한번 씻고 재료를 더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바보 같은 실수도 줄어든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 순간순간 내 손에 재료를 쥐어주듯, 마법을 부리는 기분으로 미리 준비된 재료를 큰 볼에 모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생각하지 않는 그 준비 과정에 애를 쓰고 주변 정리를 해 놓은 덕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본 과정을 더 수월하게 해낸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또 인생 속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은 종종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약하고, 강한 마음을 타고 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나도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참 어렵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희망을 가지고 레시피를 공부하며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고, 계량을 할 땐 정확하고 차분하게, 마음이 급해도 주변을 정리해가며 준비해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곳에 필요한 것들을 배치해 놓고, 필요한 순간에 당황하지 않는 것.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다면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감정적 소모 없이 수습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것은, 잠깐의 순간을 위해 준비에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 하다는 사실. 하루에 한 번씩 하는 명상은 10분으로도 충분하지만, 때로는 하루 종일 살아가는 일상보다 지루하고 길게 느껴질 수 있다. 생산성이란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우리 강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명상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놀라운 충전을 하고 있다. 그 10분이 주는 힘으로 하루를 보내면 마주하는 갈등에 조금 더 쉽게 대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명상을 시작했을 때, 내 하루가 놀랍도록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일을 할 때, 압박보다는 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고, 평소엔 듣기 싫었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명상 시간 동안 집중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 명상에 익숙해지면서 깨달은 것은, 내 집중력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 때문인지 평소에 하던 공상을 명상 중에는 더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가진 산만함의 근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의도 치 않게 하루 명상을 하지 못해서 그 하루를 살아가는 게 어려워 질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명상은 중독이 되고 내성이 생기는 치료제나 운동이 아니다. 명상은 집중을 잘하며 중립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나를 변화시켜주는 운동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나에게 일러주는 시간을 가지는 활동이다. 돌아보는 것을 통해 나의 약함을 인지하며 받아들이고, 또 동시에 내가 가진 힘을 확인하면서 오늘 하루는 어떤 태도로 걸음을 걷고 또 내 의견을 표현할지 계획할 수 있는 균형을 일러주는 정신의 트레이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어도 내 의견이 그렇다.


 어떤 목표를 이루고자 명상을 하면 한 없이 어렵고 복잡한 것이 되어버린다. 일종의 enlightment, 깨달음, 터득을 바란다면 명상은 단지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행이 되어버릴 수 있다. 과정과 그것에 내가 할애하는 시간이, 그 자체가 명상이다. 그 과정을 통해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시도 해보는 것. 명상을 설명하는 외국 콘텐츠를 접하다 보면, 그 맥락에 항상 'being present' (현재에 존재하는 것)라는 개념이 따라온다. 그냥 지나치듯 생각해본다면, 내가 여기 여기 현재에 있지 그럼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은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잠깐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체크해보면 자신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지금의 공간보다는 과거에 있었던 일, 미래에 일어날 일,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현재에 머무르지 못한다. 우리는 전과 후를 생각하며 우리 인생의 전부를 눈 앞에서 놓치고 살아간다. 명상을 하고 베이킹을 하며 구름 위에 떠 올라가 있던 내 머리를 땅으로 내려오게하고, 내 주변과 나를 살피고, 지난 주 그 날, 10분후의 나를 제쳐두고 지금 현재 내 주변을 흘러가고 있는 한 순간 순간을 호흡하고 받아들이며 버터 설탕이 섞이며 새로운 성질로 거듭나는 것을 관찰하며 현재를 살아가보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보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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