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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Oct 09. 2020

나의 이웃과 친구들에게 주는 그라놀라.

외로움이 나에게 보여준 세상.

 우리 집 강아지를 입양한 지 두 달 반이 되었다. 3개월짜리 이 강아지가 집에 왔을 때 너무 작고 겁이 많고 조용했다. 그 걱정을 한 것이 화근일까, 집에 온 지 2주 정도가 지나자 그 작은 몸집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숨어있던 울림통이 열리고 말았다. 창밖에 오토바이와 현관 밖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우렁차게 답을 하곤 한다. 종종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정신줄을 놓고 이상한 소리로 혼잣말도 하고, 신이 나서 허공에 대고 한 번씩 크게 소리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에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회적 민폐만큼은 강박에 가까운 수준으로 최대한 피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처음엔 강아지가 가진 특유의 에너지로 거실과 방을 오가는 우다다 뛰기를 하며 방향을 바꿀 때마다 가구와 벽에 몸을 밀쳐 충돌하며 소음을 일으켰다. 가볍지만 거슬릴 수 있는 소리에 대한 아랫집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믹서기 쓰는 소리에 올라와 소음이 많다며 발 뒤꿈치로 걷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아랫집 이웃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바로 그 이웃이다. 일부러 안돼! 그만해!라고 크게 훈육하여 그 목소리라도 전달이 되길 바랐다. 그러다 보니 과하게 강아지를 훈육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 딜레마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는 시험 삼아 강아지를 두고 집 밖으로 나가보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도 들리는 울음소리에 아이고! 시끄러운 식구를 들였구나! 약간 절망했다. 강아지가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이 그 예민한 이웃집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주변에 민폐 끼치기 싫어서-라고는 하지만 실은 남에게 욕먹거나 해명하는 게 싫어, 다양한 상황에 대한 예방의 차원에서 뭐든 조심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는 것이 맞다. 강아지가 찍소리라도 낸다 치면 쉬쉬쉿! 후다닥 내 마음과 행동도 빨라지고 이게 어느 순간 나와 강아지에게는 스트레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예민하다는 남편에게도 나 정도의 노이로제는 없다.

 남편도 잠시 떠나서 없는 최근 어느 금요일에 출근하며 강아지를 집에 두고 가보기로 했다. 울거나 안 울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강아지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홈캠도 설치했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하던 강아지는 결국 내가 떠난 지 40분이 지나자 구슬프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 강아지를 데리고 다시 출근하고 말았다. 이 충격, 그리고 강아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그 길로 방문 훈련사를 불러 교육을 받았다. 훈련사가 다녀간 그 첫 주말에 훈련을 하며 받은 스트레스에 나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할 수 있을지, 항상 이렇게 날카로운 감정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견디기 힘든 압박에 하루 사이 5번은 눈물이 터졌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던 강아지의 행동들은 실은, 정말 많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남편 없이 혼자 이걸 해내야 하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뛰기도 했다.

 훈련을 시작하고 우리 건물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에 메모를 붙였다. '우리 집에 현재 어린 강아지가 있고, 분리 불안으로 인해 종종 소음을 일으킬 수 있지만,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으며 한 달 후에 우리는 이사를 가니 그때까지만 이해해 달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배운 대로 훈련을 해보고, 처음으로 다시 한번 강아지를 혼자 두고 나가기로 한 다음날 아침이었다. 정해진 루틴대로 아침 6시에 일어나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려고 문을 여니 리본으로 묶인 작은 봉투가 문 아래에 툭 차였다. 직감으로 느끼고 내용물을 보기도 전에 울컥한 나는 봉투를 열어 보고는 문을 닫고 강아지 리드 줄을 잡은 채 현관 안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봉투 안에는 강아지 장난감 하나와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랫집 이웃의 편지였다. 소음으로 찾아간 이후 그동안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하게 잘 지냈고 고맙다, 가끔 강아지 소리가 들렸으나 괜찮다, 하울링 소리가 매우 구슬프고 안타까웠을 뿐 방해가 되지 않았으니 염려 말고 훈련하기를 바란다'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잘못 써서 슥슥 그은 흔적도 없이, 망설이지 않고 곱게 써 내려간 편지였다. 이미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사람이 쓴 듯.(출판업계에 있나? 정말 머릿속에 내용을 입력해 놓고 쓴 듯 완벽한 편지였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 느꼈다. 며칠간 내 마음을 단단하게 감싸며 압박하던 스트레스가, 겉면부터 갈라지며 내 몸을 타고 쓰라리게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큰 위로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고맙기도 했지만 정신이 함께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집에 살면서 아랫집 이웃에게 가졌던 내 불안함과 선입견이 너무 빠르고 극단적이게 교정되어야 했고, 그 감정의 변화가 굉장히 벅찼다. 나는 나의 이웃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아주 작은 이해와 양보 이상의 인간적 배려에 충격을 받을 정도로 나는 내 주위에 대해 비관적이고, 예민했다.

 

내가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직장 동료들도 눈치챘다. 사무실에 데려가면 몇 번씩 소란을 일으키는 강아지 때문에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강아지를 챙기는 모습에 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강아지가 소리 내도 우린 괜찮다고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말해주지 않아 걱정이 되었고 때로는 그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지쳐가는 모습에 하나씩 다가와 조심스럽게 힘들지 않냐며,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위로에, 함께 도우려는 그들의 제스처에,  나는 내가 혼자서는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나’라는 커다란 ego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나뿐이며 생각도 혼자, 결정도 혼자 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손을 내밀어 내 상황이 쉽지 않음을 보일 때 다가와 건네는 말과 위로는,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나 자신과 자신감을 잃어 갈 때 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하는구나. 이것을 왜 몰랐지. 궁금했었던 것 같기는 하다, 나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힘을 얻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묻거나 바라지 않고 살아왔다.

 남편이 상황상 집을 떠나 있는 이 시간 동안, 나 자신과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가 생겼다. 나는 더 이상 혼자의 적막을 즐길 수가 없는, 외로움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조금 더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다. 글쎄, 한편으론 항상 그랬던 것도 같다. 유학을 떠나 혼자 지내던 몇 년의 시간은 나에게 너무 멋진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어두운 시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두 번 정도 이웃집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도움을 얻으며 내 인류애는 새로이 갱생되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도 조금 해소가 되었다. 내가 좋으려고 했던 베이킹을 하면서 종종 쿠키나 케이크를 선물할 때 고마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저렇게 고마워할 필요가 있는 건지....? 내가 하는 취미 활동의 부산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저렇게 고마울 일인가? 이번에 강아지에 대한 도움과 위로를 받으며 깨달았다. 고맙다, 괜찮다, 미안하다, 힘내라는 말 한마디도 사람을 이렇게 벅차게 하는데, 나를 위해 구운 쿠키 한 상자면 나라도 기분이 좋겠구나. 내가 그러하듯, 나의 이웃들도 소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소음을 방치하는 보호자의 뻔뻔한 자세에 더 불편함을 느끼는 이해도 있는 사람들이겠다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먼저 전달해오는 마음을 받아들여줄 수 있구나.

 엘리베이터 안의 편지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 오랜만에 베이킹을 하기로 했다. 누구나 좋아하고 만들기도 쉬운 피넛 버터 쿠키를 구워, 작은 메시지와 함께 종이봉투에 나누어 담은 뒤 건물 안 모든 세대의 현관 앞에 두고 왔다. 마음의 여유와 에너지가 없어하지 못했던 베이킹을, 내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게 되었다.

 베이킹을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나를 연결해줬다.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싶을 때 나쁘지 않은 핑곗거리가 되고,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생일날 별 감흥 없는 생일 선물로 마음이 다 전달되지 않을 때, 굉장히 적합한 선물이 되곤 했다. 마음이 힘들 때 남을 위해 베이킹을 하는 것으로 위로를 얻기도 하는데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게 장기적으로 내 마음으로 고쳐주는지는 모르겠다. 아주 조금은, 사랑을 받고 싶은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가끔씩만. 그것을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도.

 아직도 생일 자리에 내가 만든 케이크를 가지고 가서 선 뵈면 쑥스럽고 어색하다. 하지만 축하해 주고 싶고, 미안해도, 고마워도, 그냥 손을 내밀고 싶어도 말로만 하는 연락보다는 내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까. 종종 선착순 쿠키 박스를 만들 때도 일면식 없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굉장히 설렜다. 처음 쿠키 박스를 보냈을 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이런 걸 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너무 과한 행동인가? 동시에 그 박스가 누군가에 전달이 되고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의 낯선 집에 가있는 모습에 이건 굉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작은 집의 작은 오븐에서 만들어진 쿠키와 케이크가 무사히 길을 잃지 않고 나와 그 사람을 연결해 준다는 것은 콧방귀가 나올 수준일지라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제는 바나나 브레드를 만들었고 오늘은 그라놀라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서 만드는 디저트는 보통 이렇게 소박하고 단순한 편이고, 재료가 단순하거나 아침으로 먹기에 좋은 것들로 만들게 된다. 화려한 것보다는 마음을 편하게, 속을 채워주는 것들을 만들려고 한다. 잘 만들 줄 모르거나 실험적인 디저트는 만들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홈베이커의 법칙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를 생각하며 만드는 디저트에는, 그에게 놀라움을 주려한다던가 잘 보이려 한다던가 하는 긴장과 조급함 보단, 정말로 그 사람이 이 디저를 즐기고,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생각하며 이것을 만들었구나- 하는 행복감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파운드케이크, 머핀, 쿠키, 브라우니, 그라놀라.... 어렵지도 않고 걱정도 되지 않고 전달하기도 쉬운 그런 것들. 매일매일 생일 케이를 먹을 수는 없지만 하루에 한 번 아침으로 머핀 하나는 괜찮으니까. 쿠키를 굽고, 파이 도우를 만들며 대가 없는 노력을 하는 것이 누구나에게 다 즐거운 일이 아닐 테지만, 내가 해온 베이킹은 여러 면에서 내가 얻는 것이 많았다.



 마음에 있는 말을 숨기지 못하는 나이기에 역시 요즘의 고민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줬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을 귀찮게 하면서 조금씩 나 자신을 치유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줬으면 한다.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내가 어떤 기분인지 설명하는 것에 귀가 아팠을 그 순간들이었을지언정 사실 그 시간 동안 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을, 작은 용기에 담긴 그라놀라를 통해, 종이봉투에 담긴 쿠키를 통해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주변 친구들과 이웃,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강아지는 자신감을 길러가고 있고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안정적으로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너무 감사하고 또 기특하고 감격스럽다. 그 힘들었던 시간으로 인해 마음과 정신에 생긴 흠집들이 아직까지도 다 아물지 않았고, 때론 갑갑해지는 가슴에 바닥에 누워하는 명상으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도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가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정말 중요한 시간을 겪고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으로 내면의 불안감을 회피하려 않고, 외로움에 맞서며 그 싸움에서 지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내 감정과 싸우며 오직 나와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내가 아닌 내 주변을 빛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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