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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Apr 07. 2019

기왕이면 좋아할 사람들에게

쿠키 가득한 박스.

 본인이 홈 베이커이고 , 직접 만든 쿠키나 케익을 혼자 다 먹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선 내 주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의 수를 생각해 보자. 그중에서 쉽게 당장이라도 연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을 추려본다. 개중에서 만나기가 싫지 않은 사람은? 또 그중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은 몇 명인지 생각해 본다. 그중에서 나만큼 케이크, 쿠키를 정말 좋아하고 잘 먹는 사람만 추려보자. 한쪽 손의 손가락도 다 접지 못했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적어도 주 2회 이상 베이킹을 한다면 넘쳐 나는 쿠키, 랩에 꽁꽁 싸여 냉동실에 쌓여있는 케익 조각들은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직장이 있기 때문에 종종 만든 것을 이고 지고 출근하여 점심식사 후 동료들을 불러 모아 나누어 먹을 수도 있다.  갑자기 주목을 받거나 잠시라도 여러 사람의 시선이 한 번에 느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글쓴이 같은) 성격이라면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도 정말 부담스러운 과정이다. 친한 사람들에게 가서 조용히 '10분 이따 내려와'라고 던져 놓고 불안한 마음으로 세팅을 하면서 혹여나 누가 어머 이게 다 뭐예요?라고 말을 걸어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야 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다 보면 어느샌가 도란도란 모여 파운드 케익이나, 레몬 타르트를 나누어 먹고 있다. 맛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정말 민망하고,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먹는 것일까 봐 또 미안하기도 하고... 매번 이러면 좀 귀찮나 싶어서, 좋아서 한 일이건만 혼자 민망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 직전에 이틀 정도 월차를 내고 내내 집에서 베이킹을 했다. 한국에선 특별히 크리스마스이브 디너 같은 게 없으니까 어디 가서 느껴보지 못할 분위기를 케익과 쿠키로 내보고 싶었다. 초콜릿 케익, 진저브레드맨 쿠키, 브라우니, 레몬 파운드 케익, 초콜릿 칩 쿠키.. 이런 일반적이지만 누구나 좋아할 구성으로 만들어서 펼쳐 놓았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했던 것 같다. 아무도 안 먹어서 남아돌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 뒤에 찾아온, 표현하기 어려운 좋은 기분이었다. 마음의 표현이 서투르거나 매사에 민망해하는 한국인의 특성들이 모여, 그냥 서둘러 디저트를 담아가는 사람들, 수줍게 '잘 먹을게요!' 하는 사람들, 그리고 눈에 안 띄게 지켜보는 나까지 참 분위기가 이상하지만 동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20분을 보냈다.



 

  베이킹을 자주 하고 싶지만 이런 자리를 매번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시식을 강요하는 것도 싫고. 그래서 소셜 계정에 24시간만 보이는 포스팅을 올렸다. 대략 '이런저런 이유에서 정말로 원하는 사람에게 나누고 싶은데 원하면 연락해주세요' 같은 내용이었다. 생각보다 단시간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걱정되고 불안했지만 나는 힘을 얻었다.

 어떤 방식으로 나눌까 고민을 했다. 무언갈 만들어 한 사람당 한 번씩 차례로 전달할까도 생각했다가, 우편으로 보내도 될 만한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잘 만들 수 있는 것, 안 해본 것, 더 연습하고 싶은 것들로 구성한 베이크 박스를 만들기로 했다. 실온 보관이 가능하고, 쉽게 상하거나 망가지지 않는 것들: 쿠키, 스콘, 파운드케이크...



그렇게 해서 첫 사이클을 시작했다. 구성은  피넛 버터 쿠키, 초콜릿 칩 쿠키, 파운드케이크, 솔티드 숏 브레드 초콜릿 청크 쿠키, 얼그레이 스콘이었다. 다섯 가지를 도우, 반죽, 굽고 식히기 까지 이틀 내내 만들고, 보내기 전날 밤에 스티커 라벨을 잘라 붙이고 박스에 담아 착착 박스 쌓아 나갔다. 



 남자 친구는 처음엔 남을 위해 이렇게 애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돈도 받지 않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이 너한테 뭘 해줬다고 이렇게 힘든 일을? 왜? 나도 달리 이렇다 저렇다 내가 하는 이 액션에 던지는 의문에 방어하기가 어려워서 ' 아 그냥 하고 싶으니까 그러지..'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선뜻 연락해준 것 같아도 어떤 사람은 손을 내밀기가 참 쑥스러웠을 텐데, 또 누군 근거 없는 믿음으로 연락해 온 것이기 때문에 고맙고 그것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 나에게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내 주변 말고 좀 더 먼 곳까지 나를 내놓아 보고 부딪혀 봐야 할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부담스러운 도전을 지금 바로 하지 않으면 나는 이대로 탁한 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민망해도 해보겠다는 마음이다.

 며칠 뒤, 남자 친구는 나에게 '생각해봤는데, 누군가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냥 마음이 원해서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인데 이런 걸 한다는 게 멋진 것 같아.'라고 말했다.

 

 

몇 번 이걸 하면서 배운 것들이 있다. 박스를 구성할 때 반복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 싫어 고민을 많이 하는데,

쉽지가 않다. 내 레퍼토리가 부족하고 취향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야 하고 더 다양한 맛에 마음을 열어야만 한다. 즉, 더 자주 베이킹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지나치게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스케줄이나 양을 하다가는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겠구나, 쿠키 여러 개를 태우며 느꼈다. 이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여러 가지를 하려다 그중 하나를 망쳤을 때, 받는 사람이 내가 너무 많은걸 하려다 이렇게 하나 정도 놓쳤구나, 하고 알아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금 새삼 느낀 것은, 예상보다 사람들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준 것에 작게라도 감동한다. 별 감흥도 의견도 없고, 줘도 먹어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들과의 경험과는 굉장히 다른 감정이었다. 더 나 같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많이들 달라서, 각각의 반응들도 다르고 표현방식도 다르다.


 언제까지 이걸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이 들고, 정말 베이킹이 느는지도 의문이 든다. 분명한 것은, 첫째, 복잡한 일을 단순화하고 정리 정돈하여 실행하는 연습을 하게 해 주고, 둘째, 내 단순한 취미를 한 단계 끌어올려, 개인적인 만족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삶에서 이런 단순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삶에서, 조금은 주체적이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감정의 부재에서 예상치 못한 기쁨을 일궈내는 활동은 신발 한 켤레를 사는 것보다, 즐겁게 술에 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신적으로 생산적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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