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치도치상 Dec 31. 2023

절대적 기혼주의자의 프롤로그

회상

나는 가톨릭 사제였다. 과거시제가 주는 매력이 있다. 회상하는 듯, 회고하는 듯,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이제는 무관한 일인 것처럼, 기억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아련함이 있다. 


종교는 성역이다. 거룩한 영역. 더더군다나 사제였다니. 사제를 축성하는 예식은 '신품성사'라고도 불린다. 거룩한 영역 안에서 더 나아가 신의 영역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드는 것은 타부이다. 


내가 사제였다는 사실, 이제는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 얘기가 어떤 이에게는 신성모독처럼 들리리라. 환속, 세상으로 돌아온 한 신부의 얘기가 마치 거룩하고도 거룩한 신의 영역을 세상이라는 곳으로 끌어내리는 느낌을 받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환속한 신부를 경멸했던 분의 눈빛을.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독신으로 살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한 선서를 짓밟고 떠난 사람에 대한 증오. 마치 벌레를 취급하듯, 오물을 뒤집어써서 구린내가 난다고 눈을 찡그린 채로 나의 인사를 받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기만 했던 그분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러나 경험은 모두 과거시제이다. 나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세월은 흐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Everything shall pass!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과거시제는 매력적이다. 


딸이 자라 아빠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쯤 되었을 때 나의 회고가 그녀의 마음에 닿기를, 아빠의 과거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나를 열어본다. 


2023년 마지막 날에

작가의 이전글 Being Dependent Independen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