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T기업과 실리콘 밸리
며칠 전 스레드(Thread)에 우리말을 배우는 중인 어떤 외국인 분이 한국에서는 "너, 당신"하면 싸우자는 얘기라고 배웠다고 하시더라고요. You를 어떻게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해야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댓글 중 하나가 기가 막혔습니다.
"님아."
한 참을 웃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PC통신 때 (옛날 사람?)부터였던 것 같아요. 이후 인터넷 모임이 오프라인에서도 활발해지면서 아이디+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었고요. 그러더니 2018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름+님이라고 부르시더라고요. 저는 어색했더랬습니다. 이름+씨에 익숙했는데 이름+님?
2010년대 중반에 IT 기업 등에 “님 문화”가 등장했대요. 조직 제도로요. 네이버, 카카오, 배달의 민족 등 IT 기업을 중심으로 직급 호칭을 없앴대요. "수평적 조직", "자율과 책임", "빠른 의사결정"이라는 목표가 붙었다고 합니다.
애자일이 처음 등장했던 미국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 IT 기업이 겪는 상황과 비슷했었습니다. 1990년대 미국의 대기업과 정부 조직 역시 Waterfall 방식과 관료주의 구조로 인해 거대한 IT 프로젝트 실패를 반복했대요. 요구사항은 상부에서 정의되었고요. 실행 주체들은 의사결정권 없이 보고만 했고요. 결정은 수주, 때로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내려왔고, 그 사이 현장 상황은 계속 바뀌었답니다. 리스크는 계속 상향 보고되었지만, 누구도 책임지고 방향을 바꾸지 못했고요.
대표적인 사례가 FBI의 ‘Virtual Case File’ 프로젝트래요. 수억 달러가 투입되었지만, 결국 시스템은 완성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고요. 애자일은 이런 반복된 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네요. 대규모 계획 대신 작은 단위의 실험, 상부 승인 대신 현장 판단, 실패를 숨기는 대신 빠르게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 거죠.
아마 한국의 IT기업들도 유사한 문제에 직면해서 사내 문화를 바꿔보자는 의미였을 거라 추측합니다. 의사결정은 느리고, 현장의 판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왜곡되었으니까요. 시장 변화는 빨라졌는데 조직은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고요. 작은 실험을 하나 하려 해도 승인 단계가 길어 실패에 대한 비용이 지나치게 컸죠.
"님 문화"는 분명 성과가 있었다고 해요. 회의에서 말하기는 이전보다 쉬워졌고, 상호 호칭의 긴장감도 줄어들었을 테고요. 외부적으로는 젊고 수평적 이미지가 되었고, 관계의 온도와 말투를 바꾸는 데에 성공했죠.
하지만 조직의 본질은 결정, 실행, 리스크의 정렬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계가 있더랬습니다. 중요한 결정은 여전히 위계의 상단에서 내려왔고, 실패의 책임은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었죠. 결정과정은 프로젝트나 팀별로 집단적이었지만, 평가와 책임은 개인에게 귀속이 되어버렸죠.
이 불일치는 조직 내부에서 특정 위치에 부담이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팀장입니다. 팀장은 "수평적 사내문화"덕분에 지시하기는 어려워졌지만, 동시에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팀의 합의를 존중해야 했고, 동시에 일정과 성과에 대한 압박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실패가 발생하면 "왜 그렇게 판단했는가"라는 상부의 질문에 반복적으로 답해야 했고요. 그 "실패에 대한 리스크"는 커리어 평가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실리콘 밸리의 문화와 결정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실리콘 밸리 역시 업무 강도도 높고, 팀장이 리스크 관리의 헤드가 맞습니다. 그런데 차이는 강도가 아니라 실패를 묻는 방식입니다.
실리콘 밸리의 테크 기업은 실패가 발생했을 때 먼저 묻는 질문은 이겁니다.
"가설은 당시 정보 기준에서 타당했는가?"
"집행은 절차에 충실했는가?"
이 두 질문에 충분한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가?"
실리콘 밸리는 실패가 개인의 커리어 평가가 아니라, 시스템과 판단을 개선하기 위한 사건이 되는 거죠.
반면, 한국 조직은 실패 그 자체가 곧바로 개인의 커리어 리스크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설과 집행의 합리성이 아니라 결과가 먼저 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리죠. 이 차이는 팀장의 행동을 완전히 바꿉니다. 실리콘 밸리의 팀장은 판단을 명시하고, 실험에 대한 위험을 감소하지만, 한국 IT기업의 팀장은 결정을 흐리고 리스크를 상향시킵니다. 그러나 둘의 판단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생존.
흥미로운 점은 "님 문화"이후의 변화죠. 2020년 이후 한국의 많은 IT기업들은 결정 오너를 명확하게 하고, 프로젝트 책임자를 공식화하며, 의사결정 근거와 로그를 남기기 시작했어요. 실패 시 책임 범위를 사전에 정의하려는 시도도 늘었고요. 이는 애자일이 요구하는 핵심요소와 매우 유사합니다.
즉, "님 문화"는 애자일로 가는 길목에서 치른 불완전한 예비실험인 셈입니다. 문제의식은 애자일과 유사했지만 구조전환대신 문화적 우회를 택했고, 그 한계를 체감한 후에야 핵심으로 이동을 했죠.
근데 진짜 질문은 이겁니다.
“우리가 정말 실리콘 밸리처럼 실패를 학습으로 간주해 줄 수 있나?”
저는 꽤 어렵다고 보거든요. 실리콘 벨리의 벤처 캐피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네요. 100개 스타트업 투자해서 90개 망해도 10개만 성공하면 된다고요. 창업자가 망해도 재기할 수 있죠. 7년 후에는 신용이 리셋되고, “경험 많은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미국이 필요하면 달러 찍어줍니다. 국채 발행하면 전 세계가 사줍니다. 그러니까 벤처 캐피털을 넘어 국가가 시스템 레벨에서 실패 리스크를 흡수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요? 벤처 캐피털 자금은 제한적이죠. 10군데 투자해서 5군데 망하면 펀드의 존립이 위험해집니다. 창업자가 망하면 개인 연대보증으로 가족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은행? 원화 함부로 찍었다가 원화 가치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요? 환율 폭등하면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리잖아요.
그러니 한국 기업이 실패를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건 문화적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생존입니다. 자원이 없으니, 실패를 견딜 여유도 없고요. 조심하고 완벽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죠.
자원의 제약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IT기업들은 실리콘 밸리 기업들처럼 가능할까요?
다음 글은 미국의 경계가 확실한 문화와 우리나라의 경계가 구분이 잘 안가는 문화의 차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