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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RONY Jun 07. 2023

여자는 야한 소설을 쓰면 안 되나요?

뮤지컬 <레드북> 감상 후기

뮤지컬 <레드북>은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던 19세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당시의 시대적 규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여인 '안나'의 이야기다. 2023년 <레드북> 삼연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3월 14일부터 5월 28일까지 상연할 예정이다. 본인은 2023년 3월 30일 밤 공연을 관람했다.


※ 본 후기는 극의 줄거리와 주요 장면에 대한 가감 없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또한 본 후기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 감상이며, 다른 관객들의 모든 주관적 감상을 존중합니다.

뮤지컬 <레드북>,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티 없이 맑은 시대, 새까만 얼룩이 될 여자


19세기 대영제국은 산업혁명의 중심에 서서 유례없는 군사적·경제적·문화적 부흥을 이루어냈지만, 그 이면에는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시민의식 및 허영심과 사회적 차별 등 무질서하고 위선적인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나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을 일컬어 빅토리아 시대라 불리우는 것이 무색하게 당대의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격히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


작품에서는 브라운으로 대표되는, 상류층의 그 이름도 유명한 영국 신사들은 교양과 품격을 가장 중요시 여겼고, 그 반대로 여성들에겐 정숙한 품위와 순종적인 태도가 요구되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영국에 만연했던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주체적인 행복을 좇고 당당히 자신의 성경험을 말하는 작중의 안나는 그야말로 시대의 돌연변이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사라지는


<레드북>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되는데, 먼저 세간의 편견에 맞서는 작가로서의 안나의 이야기이다. 안나는 솔직하고, 당돌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보는 그녀는 매력적이고 진취적인 캐릭터지만 당시의 여성상을 고려하면 작중에서는 정 맞는 모난 돌이며 반(反)여성스러운 인물이다.


안나를 일차원적으로 '야한 여자'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시각일 것이다. 안나의 야한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은유하는 보조 관념이며 작품이 비추는 것은 안나의 원시적인 성욕이 아니라 '자신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에 가깝다.


안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방법으로 글을 선택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작품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이다. 작중 로렐라이는 "화장은 얼굴에나 하고, 치장은 나갈 때나 하고, 글에는 진실만을 쓰라"고 강조한다. <레드북>에서 '글'이란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한 시대적 배경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안나가 쓴 레드북의 흥행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가장 진실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로 바뀐 사람들이 있다는 이유로 불명예스러운 면죄를 거부하고 재판장에 섰다. 작가 안나의 서사는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주제의식을 연장하며 막을 내린다. 결말부 재판 장면에서 작품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가벼워진 것은 아쉽지만.

<레드북> 공연 사진, 안나 役 민경아 / 출처 : 문화포커스

당신은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안나와 브라운의 로맨스도 작품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서사이다. 안나는 각각 로렐라이 언덕과 브라운의 사무실을 오가며 극을 이끌어가지만, 두 스토리를 독립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한 쪽의 결과가 다른 쪽의 원인이 되는 상호 연계식 전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충실한 전형적인 영국 신사다. 기품 있는 용모와 반대로 틀에 박힌 보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글을 써 자신을 말하고자 하는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번 갈등을 빚게 된다.


본인은 누군가의 멍청함으로 주인공의 현명함을 보여주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물의 캐릭터성을 소모하는 수준 낮은 연출의 형태이고 결과적으로 주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때로는 특정 계층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안나와 대조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는 신사들, <레드북>도 이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이들의 사상이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극이 21세기의 관객들에게 상연되고 있기 때문이지, 시대적 배경과 어긋나는 안나의 캐릭터성에 설득력을 주기 위한 방법이 당시의 평범한 신사들을 죄다 유치찬란한 인물들로 묘사하는 것밖에 없었을까라는 아쉬움은 있다.


다만 브라운이 안나에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좋아할 수 있다"며 고백하는 장면은 두 사람의 서사를 크게 보충하고 작품의 또다른 메시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높게 사고 싶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일차원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다른 '타인'을 어떻게 슬기롭게 마주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에서 안나는 자신을 '당신과 같은 심장으로 숨을 쉬고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꿈을 꾸지만 결국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정의한다. 즉 '나는 타인과 다른 존재'라는 전제를 두고 '그렇기에 나는 나를 말하고자 한다'라는 작가 안나의 의지와 '그럼에도 타인을 사랑하고자 한다'라는 브라운과의 연정이 이 넘버를 통해 절정부에서 격정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이다.

2023.03.30. <레드북> 밤공 캐스팅보드

<레드북>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대표적인 창작뮤지컬로 산뜻한 작품의 분위기와 기분좋은 결말 덕에 많은 팬들의 인생 뮤지컬로 자리잡고 있는 작품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기분 좋게 극장에 들어와 기분 좋은 마음으로 극장을 떠나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굴레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지킬 줄 아는, 요컨대 '나를 말하는 나'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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