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파우스트>는 괴테가 평생을 걸쳐 쓴 인생의 역작 희곡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만든 연극이다. 2022년 마곡지구로 이전하여 새로 개관한 LG아트센터에서 제작한 연극이기도 하다. <파우스트>는 LG아트센터 시그니처 홀에서 2023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상연했고 이 후기를 작성하는 시점에서 폐막했다. 본인은 2023년 4월 27일 밤 공연을 관람했다.
※ 본 후기는 극의 줄거리와 주요 장면에 대한 가감 없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또한 본 후기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 감상이며, 다른 관객들의 모든 주관적 감상을 존중합니다.
LG아트센터 서울 - LG아트센터 시그니처 홀
19세기 괴테의 역작, 21세기 대극장에서 구현되다
<파우스트>는 연극치고는 드물게 상당히 방대한 양의 독백을 대사로서 구성하고 있다. 이는 원작 「파우스트」의 희곡적 특색을 살려 등장인물, 더 정확히는 파우스트의 지적 허무와 인격적 고뇌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함 같으나, 오히려 내게는 이 부분이 더욱 극과는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요컨대 지루하다. 1막 러닝타임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늙은 파우스트가 별다른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본인의 방에서 평생에 걸친 자신의 사유를 죄다 구두로 늘어놓고 있으니 관객은 그 의미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지쳐버린다. 책이라면, 글이라면 한 자 한 자 여유롭게 곱씹으며 그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것이 가능하겠으나 공연이고 극인 만큼 굳이 이런 구성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무대 뒷면의 LED 화면 연출에 관해서이다. 최근 다양한 공연 예술에서 미디어아트를 활용하여 폭넓은 연출에 도전하고 있고, <파우스트>에서도 여러 종류의 공간적 배경을 이 미디어아트를 통해 구현해내었다. 그런데 <파우스트>에서는 극의 일부, 그레첸의 방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들을 완전히 영상으로 대체했다. 관람 중에는 녹화 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무대 뒷편에서 이루어지는 배우들의 연기가 실시간으로 화면으로 중계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신선한 연출의 도전이라는 점은 높게 사지만, 본인은 이 연출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연출해야만 했던 이유'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레첸의 방이 무대 위에서 실체로 구현하기 어려운 배경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일부 장면의 영상화가 관객들의 몰입감을 더욱 높이는가? 이 역시 아니다. 1000석이 넘는 3층 대극장의 관객들에게 모두 보이게 영상을 구성하다보니 무대 위 배우와 화면 속 배우의 물리적 크기 차이가 상당하고 이는 관객들에게 되려 괴리감을 선사한다. 곡형 LED 화면의 1인칭 시점이라 본인은 일종의 VR 게임이 연상되기도 했다. 하다 못해 영상이 송출되는 동안 등장인물의 의상이나 분장, 혹은 무대 세트의 파격적인 변신이 필요해서 그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면 납득이라도 가겠다만 해당 장면 전후로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 역시 없다.
그 외의 연출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마녀 소굴, 마녀들의 밤 등의 장면들은 충분히 역동적이면서도 그 괴이한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다. 여담으로 배우들의 객석 등장이 이렇게나 많은 극인 줄 몰랐다. 알았다면 1층으로 예매했을텐데.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까
2023.04.27. <파우스트> 밤공 캐스팅보드
원체 방대한 양의 작품을 연극화한 만큼 원작의 깊이를 고스란히 극에 녹여내는 것은 무리였겠지만, 그럼에도 서사적인 설명에 미흡했다는 점만큼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특히나 이전까지의 유약한 그레첸과 감옥에서 미쳐버린 그레첸의 괴리감이 상당한데, 이를 보완해줄 극적인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여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에게는 다소 납득가지 않는 결말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배우 이야기도 안 할 수 없겠다. 우선 메피스토 역의 박해수 배우, 최고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 넓은 무대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카리스마와 장악력, 단 한 장면도 놓칠 수 없게 만드는 연기력, 거기에 길고도 복잡한 대사를 조금도 놓치지 않는 발성과 발음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최근 출연한 드라마들이 연이어 히트를 치며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배우인데, 그마저도 저평가가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이로운 연기력의 배우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파우스트 역을 맡은 유인촌 배우는 상술했다시피 1막의 대부분을 독백형의 대사로 채워야 했는데, 이 난해한 독백들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소화하는 것이 놀라웠다. 이후 파우스트가 젊어지며 박은석 배우가 이 바통을 넘겨받는데, 유인촌 배우가 연기하던 늙은 현자의 어투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극을 이끌어간다. 그러면서도 메피스토를 통해 맛보게 되는 각종 본능적 쾌락에 쉴새없이 흔들리는 입체적인 인물상을 매우 수준 높게 연기해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던 배우다.
그레첸 역의 원진아 배우는 대사 처리가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연극 데뷔 작품임을 감안하면 역시 나쁘지 않았다. 특히 극 후반 감옥에서의 미쳐버린 그레첸 연기만큼은 엄청난 흡인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마녀 역의 박하진 배우, 대지의 정령과 메피스토가 변장한 검은 개를 연기한 김범진 배우가 기억에 남는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고전 작품을 대극장에서 연극으로 선보인 사례는 드물다. 그러나 이번 연극 <파우스트>가 흥행에 성공함에 따라 앞으로 다양한 연극을 대극장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또한 원작의 2부 역시 제작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기다려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