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동명의 프랑스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하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캐머런 매킨토시의 뮤지컬이며,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랜 기간 공연한 뮤지컬이기도 하다. 코러스걸에서 주연 소프라노가 되는 주인공 '크리스틴'이 오페라 극장의 지하에 숨어 살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국내 프로덕션 삼연은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3개월 간의 공연을 마치고 현재는 샤롯데씨어터에서7월 21일부터 11월 17일까지 상연 중이다. 본인은 2023년 9월 5일 밤 공연을 관람했다.
※ 본 후기는 극의 줄거리와 주요 장면에 대한 가감 없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또한 본 후기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 감상이며, 다른 관객들의 모든 주관적 감상을 존중합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샤롯데씨어터
The Phantom of the Opera 이젠 네 맘 속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계의 클래식이라고 생각한다. 공연예술계에서 그 명성과 작품성은 시간이 흘러도 훼손되지 않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가 보면 어딘가 지루하기도 한 그런 클래식 말이다. 한국에서 <오페라의 유령>이란 국내에서는 생소했던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흥행시킨 상징적인 작품이지만, 특유의 고급화 전략으로 국내 뮤지컬 가격의 상향평준화를 낳은 관객들의 원흉이기도 하다. 초연을 올린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흥행하는 것을 보아 한국에서는 드물게 그 네임 밸류 자체가 작품의 셀링 포인트가 되는 작품인 듯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공연으로서 <오페라의 유령>의 대표적인 상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동명의 삽입곡 'The Phantom of the Opera', 다른 하나는 '샹들리에'. 각각 전자는 이 작품의 독보적인 음악성을, 후자는 화려한 무대 연출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겠다. <오페라의 유령>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역작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넘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메인 넘버인 'The Phantom of the Opera(이하 약칭 POTO)'는 오페라 기반의 성악적 극 구성과는 이질적인 록 사운드가 인상적인 곡으로 작품 전반에 걸쳐 유령의 등장마다 리프라이즈된다. 서곡부터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POTO의 멜로디와 함께 올라가는 샹들리에를 보며 실감했다. '아, 내가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왔구나.'
샹들리에로 대표되는 무대 연출도 상당히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오페라와 발레 공연, 화려한 가면무도회, 유령이 사용하는 여러 특수 효과, 그리고 샹들리에의 추락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다만 안전상의 이유인지 샹들리에가 정말 아찔할 정도로 극적으로 추락하지는 않고, 현실적으로는 떨어진다기보다 내려온다의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리는 속력으로 하강하니 기대든 걱정이든 크게는 안 하고 가길 추천한다.
이제 조금 더 솔직한 생각을 전하자면, 이 작품은 그 이름값에 비해 그렇게나 대단한 공연은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는 다른 뮤지컬에 비해 훨씬 더 비싼 가격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다양한 기술과 접목시켜 다차원적인 무대를 구현하는 오늘날의 뮤지컬들에 비해 <오페라의 유령>의 연출이 가지는 메리트가 없으며, 공연 도중 샹들리에나 보트 등의 무대 효과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문제되기도 했다. 또한 작품의 정수와도 같은 POTO를 전체 립싱크 처리한 것은 너무나도 아쉽다. 그 노래 하나만을 들으러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관객이 많았을 텐데. 기술적으로 완벽한 가창이 아니더라도 작품의 박진감과 현장감을 여실히 담아내는 배우들의 노래를 뮤지컬의 매력으로 여기는 본인에게 POTO 장면은 가장 실망스러운 장면이 되어버렸다.
종합하자면 시대를 타지 않는 불후의 명작이지만, 작품의 명성과 13년 만의 귀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다소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 상징성을 제하고 바라본다면 분명 아쉬운 점도 많은 공연이다.
사랑, 바람은 그것뿐
<오페라의 유령>의 등장인물들은 대단히 입체적이지만 사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이들의 본능적인 감정 교류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엄연히 크리스틴 시점에서 극이 진행되기 때문에 오페라의 유령의 생애와 일그러진 내면을 관객이 이해하기 쉽지 않고, 유령의 행적이 마냥 동정받기에는 지나친 악행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송스루라는 극의 특성상 대사 없이 가사만으로 극이 진행되나 본작의 번역이 그다지 질 높지 않다는 것 또한 한몫한다. 그래서 오페라의 유령은 정말로 어려운 배역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틴, 나아가 관객마저 그가 음악의 천사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가창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야 함과 동시에 어떠한 연출적 도움 없이도 유령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설득시킬 연기력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후자가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유령은 그저 청춘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에 훼방 놓는 삼류 빌런에 불과할 테니.
그러나 이러한 <오페라의 유령>의 서사적 미흡이 의외로 장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배우와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열어준다는 것이다. 크리스틴과 유령의 관계에는 한 단어로 정의되기 매우 복잡미묘한 본능적 감정이 오가는데, 이 간극 속의 디테일을 받아들이는 이의 감상으로 자유롭게 채워 넣을 수 있다.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는 게 명작의 매력인데,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이 명작이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본인 역시 여러 배우들의 다양한 해석을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솔직히 이 작품은 너무 비싸서 1회 관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래는 본인이 느낀 작품의 해석.
송은혜의 크리스틴은 데뷔작인 걸 감안하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유령에 대한 연민이 잘 느껴졌다. 배우가 은근한 관능미가 있어서 유령의 오페라 캐스팅에 제법 설득력이 있기도 하고(?). 최재림 유령의 가장 큰 매력은 음악의 천사다운 쩌렁쩌렁한 가창력이었다. 큰 키와 성량에서 나오는 위압감 덕인지 오히려 그 찌질한 행실이 더욱 극명하게 대비되어 드러났다.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보다 그 이전에 이미 깊게 자리 잡힌 열등감과 질투심에 눈이 멀어 거칠고 모진 방식으로 크리스틴으로 빼앗으려 했던 것 같다. 온전한 소유만이 사랑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연정은커녕 유대라는 것조차 쌓아본 적 없는 유령의 미성숙함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크리스틴이 유령에게 건넨 마지막 키스에는 연민이 담겨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담지 않은 이 키스에서 유령은 사랑을 배웠다. 크리스틴에게 보인 모든 게 그저 자신의 억지와 고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유령은 여기서 결국 라울과 크리스틴을 보내주는 선택을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의 뮤즈이자 동시에 에로스였던 크리스틴을 떠나보낸 뒤 흐느끼던 유령이 가면만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며 극은 마무리된다.
2023.09.05. <오페라의 유령> 밤공 캐스팅보드
더 쓰려면 더 쓸 것도 많은 <오페라의 유령>이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 담아낸 것 같아 여기서 줄일까 한다. 굳이 더 몇 마디 얹자면 칼롯타 역의 한보라 배우, 유령 횡포만 없었으면 그냥 프리마돈나 그대로 했어도 됐겠다 싶을 정도로 노래를 잘했다. 그리고 유령의 분장이 생각보다 훨씬 더 징그러워서 멀리서 봤는데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 정도로 흉측한 얼굴인 만큼 더 몰입감 있게 유령의 삶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감정을 나눠야 하는 크리스틴 역 배우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연 배우들 프로필이 그다지 마음에 안 든다. 다들 실물이 훨씬 낫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