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 강원도 속초
한참 덥고 쨍쨍해야 했을 8월의 어느 날, 내가 속초를 방문했을 때 하늘은 매우 흐렸다. 속초에 머물렀던 2박 3일 내내 햇살 한 줄기가 얼굴을 비추지도 않고 우중충했다. 평소와 같았던 여행이었다면 큰 아쉬움으로 남았겠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어둡고 축축한 속초의 하늘이 오히려 반갑고 고마웠다. 날씨가 마치 내 마음을 반영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급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은 뒤 도망치듯 속초에 갔다. 함께 가기로 했던 여름 여행이 취소된 자리에 그 공허함을 참을 수 없어 급하게 속초를 끼워 넣었다. 뻥 뚫린 바다라도 봐야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강릉, 양양 등 갈 수 있는 동해안의 바다는 많은데 왜 속초가 번뜩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속초에 오면 느껴지는 도시 특유의 정취가 있는데,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 투박한 상점의 간판에서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깔끔하고 선비적인 강릉, 젊고 힙합이 가득한 양양과 비교하면 더욱 속초만의 촌스러움이 대비된다.
이번 여행에서 머물 숙소는 버스 터미널 바로 뒤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체크인을 했는데 목요일이라 그런지 여행객이라고는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숙소가 조용했다.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이 썰렁함이 오히려 좋았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보고도 모른 척해주길 바랐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속초 시내를 누비기 시작했다. 첫 행선지는 속초 중앙시장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만석 닭강정이 유명한데, 지나가는 무리들마다 한 손에는 큼지막하게 포장된 만석 닭강정을 들고 다녔다. 너무 먹고 싶었지만 한 마리 단위로 밖에 팔지 않기에 혼자서는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나를 여기에 홀로 있게 만든 그가 너무 미워졌다. 우리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나는 이 멀리 속초까지 와서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군중 속의 고독을 심화시키는 시장을 빠져나와 자전거를 끌고 해안가 쪽을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속초를 다니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속초는 언덕이 많아 자전거를 타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전거 안장에 앉기보다는, 양손잡이를 잡아끌고 다녔다. 그래도 해안가 옆의 평평한 1km 정도의 직선 도로에서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마음껏 페달을 밟을 때 엄청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영금정에 닿았다. 영금정은 파도가 거세기로 유명한데, 날카로운 암벽 사이로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신비한 거문고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거센 파도가 바위를 시원하게 덮치며 흰 물거품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를 향한 그리움이 흰 물거품처럼 부서져 사라지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서울을 떠나 함께한 추억이 없는 속초에 오면 그의 생각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어딜 가든 그의 생각은 나를 따라다녔다. 잠깐 들렀던 카페에서 익숙한 향수 냄새를 맡고는 그가 너무나 그리워졌다. 내 후각은 아직 생생히 그를 기억하고 있나 보다.
속초의 밤바다에서 하염없이 멍을 때리며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 대한 기억을 떨칠 수 없다면, 차라리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자고. 좋았던 향기로, 나에게 줬던 꽃다발처럼 예쁜 사람으로.
속초에서의 마지막 날 칠성조선소를 찾았다. 칠성 조선소는 1952년에 원산 조선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지만 2017년까지 운영되고 현재는 카페, 북살롱, 뮤지엄 등이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 된 속초의 명물이다.
비교적 최근까지 이곳에서 배가 만들어지고, 수리되었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때는 큰 배로 가득 찼을 공간이지만 지금은 텅 비어있는 것을 보니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사실 이때 나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돌발성 난청 증상 때문에 이명이 들리고 귀가 먹먹거렸고, 날이 흐린데 연속으로 찬 음료를 마셔서 배탈까지 났다. 그래도 속초까지 왔는데 칠성 조선소는 꼭 들리고 싶었기에, 너덜거리는 몸과 마음으로 찾았다.
칠성 조선소 카페에서 보이는 뻥 뚫린 청초호 풍경과 별개로 내 몸의 컨디션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지고 눈이 감겼다. 이런 몸 상태로 서울까지 4시간이 걸리는 길을 혼자 운전해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수액이라도 맞고 회복해야겠다 싶어 휴대폰을 켜고 주변의 가정의학과를 찾아봤다. 그런데 그날은 토요일이고, 이미 점심을 넘긴 시각이라 문을 연 병원을 찾기 힘들었다.
아쉽지만 남은 일정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전에 일단 차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기 위해 카페를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그때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칠성 조선소 랜드마크에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수많은 무리들 사이에서 내 친구, 하은이를 발견한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톡을 주고받았던 친구였기에 같은 속초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친구랑 재잘재잘 수다를 떨다 보니 급속도로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늘이 나를 위해 수액 대신 하은이를 나에게 선물해준 것 같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속초를 급히 떠나려 했지만 컨디션이 회복돼서 2시간 더 머무를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했지만 역시 나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힘을 얻는 ENFP임을 실감했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속초에 찾을 때는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다.
카메라: Kodak M35
필름: 코닥 컬러필름 컬러플러스 200-36
현상: 여기현상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