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와의 점심 식사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얼마 전 대표님과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그녀는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한 앱 서비스를 기획해서 성공시킨 굵직한 이력이 있고, 스타트업 씬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여성 CEO다.
입사 전 면접 준비를 하면서 대표를 인터뷰한 기사를 여러 개 찾아서 읽었다. 그때 딱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한때 그녀의 꿈이 국제 구호 활동가였다는 것. 나 또한 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한때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를 꿈꾸며 아프리카에서 1년 동안 봉사활동을 한 이력이 있기에 이러한 공통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운명처럼 더 이 회사에 이끌렸다.
입사를 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대표의 MBTI가 나와 같은 ENFJ라는 것. 단지 MBTI가 같고, 대학교 전공이 비슷하다는 것 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확실히 그녀와 나는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공통점이 많은데도 나와 그녀 사이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존재한다. 물론 경력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 할 수 있지만, 똑같은 시간이 주어져도 과연 그녀만큼 이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Input은 비슷한데, Output과 Outcome의 차이가 너무 큰 것이다. 대표님은 어떻게 이렇게 큰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걸까. 회사 대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궁금해졌다.
식사를 하면서 그녀는 당당하게 본인의 꿈은 전쟁 난민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비영리적인 꿈을 실현하려면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영리 회사에 취업했고, 지금은 아예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수백 번 반복했을 듯한 대답이었겠지만 이제 막 한 달이 지난 신규 입사자 앞에서 이야기할 때도 여전히 그녀의 눈빛은 강렬했고,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저 말뿐인 꿈이 아니라, 진. 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사로 잡혀 있는 파이어족, 경제적 자유, 000억 자산가 등의 물질적인 꿈과는 결이 달랐다.
어렸을 때 만들었다던 비전 보드 사진을 보여줬다. 여러 사진과 손글씨로 정성스레 이어 붙인 보드에는 60대에 학교 설립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20대, 30대 등 인생의 주요 순간에 성취해야 할 마일스톤이 잡혀 있었다. 몇십 년 전 만든 것이지만 현재와 비교했을 때 크게 보면 굵직한 목표를 성취하며 차근차근 꿈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했다. 여태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이렇게 비전이 강력한 원동력이 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와 나 사이의 엄청난 격차가 있는 이유를. 바로 꿈의 유무와 그걸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 그녀는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고, 나는 사는 대로 생각해 왔다.
중학교 때 배웠던 거리, 속력, 시간의 관계 공식이 생각났다.
거리 = 시간 X 속력
미래의 목표 지점을 향해 가는 사람과 목표 지점 없이 눈앞의 길을 가는 사람이 내는 속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시간이라는 자원은 동일하게 주어져도 꿈이 있는 사람의 속력은 더 빨라지고, 결국 거리는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시간 점심 식사의 임팩트는 엄청났다. 꿈이랄 것 없이 살아온 내가 갑자기 초라해진 느낌이 들어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2023년을 살아가는 나는 왜 꿈 없이 살아가고 있는 거지? 옛날에는 어떤 꿈을 가졌지? 앞으로도 꿈 없이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진짜 어렸을 때의 꿈은 간호사였다. 막연히 한 생명을 살리고 치료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일 뿐 진지한 꿈은 아니었다. 한참 꿈 없이 살다가 중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또렷한 의지로 설정한 꿈은 역사 선생님이었다. 당시 역사 선생님이 너무 재밌게 잘 가르쳐주셔서 공부가 재밌었고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임용고시에 합격하더라도 비인기과목의 경우는 공고가 잘 나지 않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포기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반기문 전 장관이 UN 사무총장에 임명이 되면서 국제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막연하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교 전공을 정치외교학과로 선택했다.
순진하게도(혹은 어리석게도) 그 당시 나는 정치외교학과에만 입학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UN 산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현실의 벽은 매우 높고, 두꺼워 보였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 유엔 공식 언어를 할 줄 알아야 했고, 대학원 졸업장은 필수였다. 그나마 이 모든 것들은 비벼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고, 한국을 벗어나 전 세계의 뛰어난 인재들과 경쟁해야 했다. 한국의 기업처럼 대규모 공채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채용 공고는 드문드문 올라오고 게다가 외국에서는 추천 채용으로 많이 이뤄지기에 관련 경력이나 인맥 없이 자리를 따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대학교에 왔던 초기 목적을 잃어버린 뒤부터는 계속 꿈이 얕게 바뀌면서 방황해 왔다. 어떻게 말하면 현실을 직시하고 유연하게 대응했던 것이고 어떻게 말하면 현실과 타협했던 것이다.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어 나와 주변을 돌아보니, 이제 서서히 지난 10년간 노력의 결과물이 드러나는 시기인 것 같다. 공부를 잘했고, 좋은 대학교, 대학원을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잘 되는 것은 아니더라. 핵심은 얼마나 꿈을 크게 꾸고, 그걸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냐는 것. 내가 현재 이 위치에 있는 건 그 누구 탓할 것 없이 내가 꿈을 크게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인생을 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아찔하다. 앞으로 남은 인생, 주어진 시간을 더 가치 있게 쓰고 당장 10년 뒤 내 미래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어떤 목표라도 찾아야 할 것 같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걸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공의 정의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명확한 건 결국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고 싶어한다는 것. 행복에 이르는 길 또한 저마다 다르기에 나는 나만의 길을 찾으면 된다.
Photo by Armand Khoury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