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는 역시 결혼식이 많다. 이제 내 나이 또래가 슬슬 다 가는 시기인가 보다. 얼마 전에는 대학교 동기 남사친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W는 입학 전 진행되는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 같은 조에 배정되어 첫 인연을 맺었던 친구로, 대학 생활동안 엄청 친하지도, 그렇다고 소원하지도 않은 적당한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였다. 1-2명의 동기들과 같이 껴서 어울리긴 하지만, 절대 단 둘이 만나는 일은 없고 메신저로 안부를 묻거나 하지도 않는.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는 소중한 추억은 없지만 그래도 10년 이상 오래 봐왔던 터라 친밀감이 두터웠고 특유의 진중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친구였기에 결혼식에 참석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축의금을 인출하고, 예식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별 생각이 없었다. 대학교 동기의 결혼식장에서 과연 어떤 얼굴들을 마주하게 될지. 그저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고 맛있는 밥 먹고 집에 돌아오는 게 내 계획이었다.
예식 시작 10분 전에 로비에 도착했다. 같이 청첩장 모임에 참석했던 친구를 만나 그 무리에 합류했다. 그런데 하객들로 붐비는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튀어나왔다.
축의금을 내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데 옆에서 누가 나를 아는 체를 했다.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결혼을 한 S 언니다. 결혼식 이후 5년 만이다. 얼굴에는 약간 살이 붙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다. 사실 반가움보다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결혼식 때 내가 부케도 받았는데 그 후 뭔가 사이가 어색해져서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중 H 오빠는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이었다. 별 교류도 없었고, 10년도 더 넘는 세월 동안 주변 지인을 통해서도 안부를 들은 적도 없었으니까. 너무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당황한 나머지 이름도 까먹어서 인사할 때 어버버했다.
이렇게 경조사의 현장에서 예상치 못하게 과거의 지인들을 만나면 선택지는 2가지인 것 같다. 교류가 없었던 지난 과거를 민망해하며 애써 말을 아끼거나, 아니면 소원했던 지난 과거는 잊고 아무렇지 않게 안부 인사를 나누거나. 나는 주로 후자인 편이다. 연락을 지속하지 않은 누군가의 귀책이라기보다는 서로가 대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뒤로 안부를 주고받을 만했던 그런 관계가 아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너의 지난 과거에 대해는 세세히 잘 모르지만) 지금은 무슨 일 하고 지내니? 만나는 사람이 있니? 결혼해서 가정은 꾸렸니?"
쿨하게 근황을 물으면서 나와 연관되거나 관심 있는 분야가 딱히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냥 딱 거기까지. 우연히 그 어떤 공통분모라도 찾으면 흥미롭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관계가 발전될 가능성도 있으리라.
내가 결혼식을 한다면 초대할 대학교 동기 및 선후배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것 같은데 W의 결혼식은 정외과 동창회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말 많은 동기들과 선, 후배들이 모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경조사 이벤트는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주변 관계에 신경 쓰고 투자했는지를 드러내주는 성적표 같다.
예식이 끝나고 연회장으로 이동하려는데 혼잡한 로비 공간에서 눈에 띈 얼굴이 있었다. 남자 후배 P였다. 새까맣게 탄 얼굴이 신혼여행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었음을 증명했다. 아뿔싸 싶었다. 사실 얼마 전에 카톡을 통해 그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나는 예식에 참석도 안 했고, 축의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학번 아래의 후배로 나를 잘 따라줘서 밥도 종종 사주고, 2013년에 머나먼 땅 에스토니아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엽서도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러나 으레 대부분의 관계가 그렇듯 대학교 졸업 이후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과거에 좋은 관계를 유지한 선후배 사이었어도 오랜 공백을 깨고 갑자기 온 초대가 당황스러웠던 걸까?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결혼식 2주 전에 모바일 청첩장만 전달한 게 성의가 없었다고 느꼈던 걸까?
'어차피 내 결혼식에 안 부를 것 같으니, 나도 가지 말자'라고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를 피했지만, P는 연회장에서 굳이 내가 있는 자리로 찾아와서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미안하고 민망했다.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마음의 크기가 너무 작았다. P는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못 와도 좋으니 결혼한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는데.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큰 용기를 내서 나한테 연락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내가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 내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는, 치밀하게 따지는 계산으로 한때 순수한 관계 속에서 쌓았던 추억들이 빛바래 가는 건 아닐지 씁쓸해졌다.
이날 내가 선택한 하객룩은 고무 밴딩의 검은색 슬랙스와 재킷이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롱 원피스를 입을까 하다가, 그러면 힐을 신어야 했는데 발바닥에 잡힌 물집 때문에 구두를 신을 상태가 아니었다.
'잘 보일 사람도 없는데 그냥 편하게 입자' 화려하게 꾸민 주말의 하객룩보다는 평일의 출근룩에 가까웠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 여자친구들은 화려하고 예뻤다. 다들 원피스, 치마를 입고 힐을 신었다. 안 그래도 키도 작은데 낮은 단화를 신어서 내가 더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손에는 다들 샤넬, 디올 등의 명품백을 들고 있었다. 가진 명품백이 없어서 몇 년째 결혼식 참석할 때마다 동일한 중저가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가는 나와 비교가 되었다.
화려한 명품 로고들 앞에 생각보다 별 타격감이 없었다. 얼마 전 '진짜 부자들은 불필요한 곳에 돈 쓰는 것을 정말 아까워한다'는 부읽남 채널의 영상을 봐서 그런가? 부자도 아닌 월급쟁이가 몇백에서 몇 천하는 돈을 가방에 쓰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정신 승리일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사치스러운 물건과 화려한 취미생활보다, 나 스스로 명품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게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명품백보다 내 눈에 들어온 건 광채가 나는 여자친구들의 피부였다. 지성 타입이던 내 피부는 서른이 넘으니 빠른 속도로 푸석푸석해졌는데 메이크업도 대충 하는 편이라 얇은 커버로는 잡티와 푸석함을 가리지 못했다.
우리가 스무 살 때 대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안에서도 나름 동안과 노안 페이스가 다양하게 있었지만, 그래도 큰 차이는 나지 않았었는데. 서른이 넘으니 생활 습관과 관리 여부에 따라 각기 다른 속도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테이블에 쭈르륵 앉은 남자 동기들을 보니 '같은 나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운동을 통해 다져진 몸과 세련된 코디로 20대처럼 보이는 친구가 있는 반면, 어떤 친구는 배도 나오고 칙칙한 옷을 입어서 영락없는 30대 아저씨처럼 보인다. 앞으로 한 두 살 나이를 더 먹으면서 이 격차는 더 커지겠지.
명품백, 외제차 등 사치품에는 감흥이 없지만 '젊음'에는 욕심이 난다. 주변 친구들은 다 명품백이 있는데 나만 없는 것보다, 내 신체적 나이보다 실제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게 나에게는 더 끔찍한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동기들 사이의 비교 속에서 내 행복을 위해 무엇이 중요한 지가 명확해져서 오히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