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과연 원자인가? 사회는 과연 사람의 단순 집합인가?
여기 '사회적 원자'라는 책이 있다.
내용은 사회과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책이 사회과학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은 일부 물리학적 이론이나 관찰 혹은 수식을 활용하여 사람의 행동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 혹은 예측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한명의 사람의 움직임은 사회전체의 개념에서 보기에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향해서 혹은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각자의 사람들이 서로서로 다른 (행동에 대한)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개개인의 움직임 방향은 서로 다를 것이므로 집단의 입장에서는 하나가 된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집단이 하나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려면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인 개개인의 행동은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눈에 띄는 법이다. 그리고 집단이 방향성을 가진다는 것은 책에서 이야기 하였던 자석의 움직임과 같이 한쪽 방향으로 끌리는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집단이 한쪽으로 움직이에 되는 그 힘의 원천에 대해서 주목하고 싶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이 책이 초반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1. 집단이 움직인다는 트렌드를 보이는 경우 처음에는 그 집단의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던 사람들이 소신과는 상관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일수록 그 흐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마다 사회현상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역치값이 서로 다른데 그 서로 다른 역치 값을 충족할 수 있는 수준의 사회적 동조현상이 발생한다면 차례차레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이 모두가 끌어당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운동이라는 부분에서는 너무나도 적절한 비유이다. 특히 우리나라 역시 촛불집회를 통해서 이런 사회적 현상은 꽤 많이 자주 관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사회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불충분한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회가 가지는 방향성이 항상 모든 사람들의 순수한 의견의 집합을 통해서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2. 의도된 사회적 트렌드 방향에 따라서 사람들이 순수히 그 흐름에 복종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는 것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회과학적 요소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설명을 빌리자면 나치의 선동이나 선거철이 되면 빠짐없이 나오는 정치적인 공세나 언론에 보도되는 콘텐츠에 따라 대중이 움직이는 것은 모두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역시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여러명의 인간들이 모인 집단의 행태는 단순히 하나의 이론이나 수식 혹은 정의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게는 개인의 성격이나 습성으로부터 크게는 집단의 방향성과 목표에 이르는 다양한 과정의 변수들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결론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양한 사회과학적 요소들을 수실을 통해서 잘 설명할 수 있는가는 이책이 다루고 싶었던 매우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특히 멱함수에 대한 부분은 어느 정도 그 사례가 적다고 하더라도 수식을 활용한 과학적인 사회현상의 이해가 가능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장치였던듯 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매우 범용적이지 않은 서너개의 멱함수 적용 가능 사례를 제외한다면 이 세상은 그렇게 쉽게 하나의 수식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확신한다. 앞서 이야기 했던 것과 같이 사회의 움직임은 그 사회로부터 하위로 이어지는 다양한 원자 그리고 분자 등등의 상호작용 결과물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라는 개념과 상호 집단간의 선긋기를 보면 숫자를 통한 사회과학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때로는 얼마나 의미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에를 들어 우리나라는 크게 '도'라는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남반부는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두개의 큰 도로 좌우가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개념적으로 그 두개의 도를 서로 워낙 정치적으로 이념이 다르고 서로 맞서는 느낌으로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매우 서로 먼 존재로 생각하지만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 서로 단순히 도로를 하나두고 마주보고 있는 이웃 관계인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낯익은 지명으로 유명한 화개장터는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지만 그 접경은 바로 전라남도 순천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어릴적부터 익히 들어온 이 화개장터라는 지명을 듣고 그리고 그곳이 경상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리적 거리의 개념에서 그곳을 매우 먼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가 자주 갔던 순천에서 불과 차를 타고 10~20분 정도만 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또한 이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서로 다른 행정구역들이 특별히 많이 정치적색이나 지역의 특색이 많이 퇴색되는 느낌도 없다. 그냥 하동은 경상도 사람이고 순천은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행정구역을 만들기 전에 그들은 모두 하나였겠지만 인간이 제도라는 규정 아래 선하나를 그으면 그들의 삶의 방향은 선이 그어진대로 서로 갈라진다. 즉 겨우 10미터 내외의 차도 하나로도 당연할 것같은 사회현상이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데 정해진 몇 개의 수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설명한다는 것은 난 여전히 잘 수긍이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앞서 말한 것처럼 개개인의 수용성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집단화에 대한 다양하고 훌륭한 이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언제나 그 이상의 예측불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덩어리이다. 즉 내가 보는 사회는 아무리 훌륭한 사회과학자가 연구를 한다고 하여도 그 대상이 정량적이지 않고 정성적으로 보인다.
결국 관건은 정량적이지 않고 정성적으로 동적하는 행동의 모방, 사회가 가지고 있는 룰과 기준에 대한 적응이 사회 그 자체인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두 권의 책인 1.협력의 진화와 2.괴짜 사회학 가운데 2.괴짜 사회학이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절대 1.협력의 진화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협력의 진화'는 분명 게임이론적인 현상에 대한 책으로는 최고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인간과 사회가 절대 숫자놀음인 게임이론처럼 정확하게 동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의 명백한 확신 속에서 이 책은 '협력의 진화'에 약간은 치우친듯한 '사회' 및 그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인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분명히 좀 더 '괴짜 사회학'쪽에 가까운 존재이다.
이 책은 분명히 그 내용이 훌륭하며 사람을 본질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겠지만 일단 글 자체가 매우 술술 읽히지는 않고, 더불어 그래서 저자가 생각하는 사회적 '원자'인 사람 개개인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저자가 생각하는 사회과학과 개인 그리고 집단간의 관계란 어떤것인지 뚜렷하게 결론을 내려주지는 못하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너무 이 책을 통해서 듣고 싶었던 내용이 너무구체적인 수준이었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회적 원자'는 적당히 많은 그리고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생각과 개념들응 머리 속에 남겨주는 책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