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상담사
상담실은 항상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 커다란 창에 블라인드가 쳐져있고 방에는 단출하게 의자와 작은 탁자. 벽에는 기다란 램프가 놓여있다. 벽에는 옅은 녹색과 노란색이 섞인 추상화 캔버스가 걸려있다. 고요함.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이 조용한 느낌이 생소하게 느껴지곤 한다.
“안녕하세요?”
중년의 러시아계 여자 상담사가 인사하며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물 잔을 받고 한 모금 마신다. 시원한 느낌.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물을 마시지 못했다. 커피는 참 여러 잔 대수롭지 않게 마시는데 물을 오히려 마시는 기회가 적은 것 같다.
“찾아오시는 길 어렵지는 않았나요?”
“네 사실 집 근처여서 걸어왔어요.”
“다행이네요. 여기 아래층이 치과이다 보니 가끔 사람들이 못 찾는 경우가 더러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소파 앞에 앉은 내 반대편 의자에 앉는다. 그녀의 손에는 대학노트와 펜이 들려있다.
“자, 그러면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야겠지요? 어떤 계기로 상담소에 찾아오게 되셨나요?”
나는 물을 한 모금 더 입에 가져간 후 그녀에게 말을 꺼낸다.
“한동안 우울감을 계속 지니면서 생활했던 것 같아요.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거나, 직장생활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왜 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한때는 이게 조금 정체된 느낌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기간이 길어질수록, 영원히 이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네요. 생각을 바꾸려고 취미생활도 조금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이 찾아보려고 하는데, 이제는 그런 의욕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요.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행복할 것도 없다, 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본인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행복하고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더 두렵네요”.
“언제 처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나요?”
“일 년... 반 정도? 생활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부터였어요.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시간은 점점 지나가는데, 뭐랄까 주위 사람들은 다들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인생의 다음 단계에 접어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런 게 없어요. 아니, 분명히 있겠지만 제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요.”
“인생의 다음 단계, 그게 어떤 거죠?”
“글쎄요,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기고, 뭔가 '자리를 잡는다'(settle down)는 느낌을 가진다는 게 맞는 표현일까요? 무언가 뚜렷한 목적, 그게 결여된 느낌이에요.”
“그렇군요. 현재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10월이면 만으로 서른여덟이 됩니다”
“어쩌면 새로운 목적 ‘re-purposing’ (목표 재설정)이 필요한 시기일 수도 있는 것 같네요”
“’re-purposing’이요?”
“네, 우리는 살다가 어떠한 목표를 지나게 되면 그다음 목표를 찾으려 하지요. 하지만 때로는 그게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 시기가 길어질수록 괴로워하게 되지요”
“제 이야기인 것 같네요. 저도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원하는 것을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알지만 어떻게 찾는지를 모르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자, 그러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지요. 어떤 일을 하세요?”
“저도 당신처럼 상담심리사입니다 ”
상담을 하다 보면 한 번쯤 나오는 주제는 ‘행복’이다. 행복에 대한 질문에 답은 항상 흥미롭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행복에 대한 정의를 세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처럼 행복을 '찾지 못해'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도 있고,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항상 자신이 왜 행복한지에 대해 수첩에 적어두는 사람도 있고, 너무 바쁘다는 이유 (또는 비슷한 다른 이유)로, 행복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게 행복을 바라보는 방식이 있겠지만, 그 방식은 강요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생활 자체가 행복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루었을 때는 매우 자연스럽지만 도착하는 데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격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거의 어떠한 사건 때문일 수도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유일 수도 있다. 언제부터일까 기억을 더듬어보려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마치 어린아이가 해변가에서 신나게 놀다가, 떠날 때가 되어서야 가지고 온 장난감을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는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을 잃어버렸다고. 한참 동안 행복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지내왔다고.
바쁘게 살다 보니,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나도 모르는 채 시간이 흐르고 잠시 멈추었을 때 문득 드는 생각, '나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다는 감정을 눈치챈 순간부터, 그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마치 이마에 난 큰 여드름처럼, 한번 눈에 띄기 시작하면 점점 더 커 보이기 시작한다. 콤플렉스와 같은 복잡한 감정과 뒤섞인 나의 불행감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큰 여드름을 사람들이 보고 놀라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아주 천천히,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그 감정은 우울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내가 우울감과 함께 지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특정, 인생의 커다란 사건의 충격으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다르게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우울감이 아주 천천히 우리의 마음을 갉아먹을 때도 있다. 이미 눈치챘을 때는 무릎 위까지 차오른 뒤다.
약 지난 1년 반 동안, 제법 깊은 우울감과 함께 살아왔다. 많은 내담자가 나에게 하소연했던 것처럼, 나 역시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졌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행복이라는 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눈치채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생각의 전환이란 그만큼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첫 번째로, 내가 행복과 멀어지게 한 나쁜 습관들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그래도 하는 일이 심리치료인지라, 지속적으로 어떠한 습관들이 나를 이렇게까지 우울감이 들도록 만들었는지를 생각해보았고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세울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수치심을 밖으로 내보내는 작업을 통해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약점을 말로 꺼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는 치유의 방법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이 글은 '엔딩'이 없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나는 내가 만든 우울감과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 다만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우울감의 무게가 약간은 가벼워졌고, 점점 더 가벼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우울감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형화할 수 없지만, 이 글이 당신의 우울감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조언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제는 마흔을 앞두고 있지만) 서른 중반이 되면서 나는 암묵적으로 내 인생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했었다. "그래, 나름 커리어도 좀 자리를 잡고, 배우자도 만나고, 결혼도 해서 가정도 꾸리고… 그러면 아마 도시 외곽으로 이사를 가야지, 차도 새로 바꿔야겠지. 그러면 조금 여유 있게 여행도 다니고, 뭔가 조금 덜 전투적으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같은 생각.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일종의 모티베이션이 되기도 했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하고, 조금 더 바쁘게 살다 보면 행복해질 거야, 하고 말하면서. 휴가철에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그냥 계속 일을 했다. 나중에 행복해지려면 지금 좀 더 고생하지 뭐, 하면서. 삶의 즐거움은, 여행은, 나중에 좋은 사람 만나면 시작하자. 그때까지 더 열심히 일하고 이쪽 분야에 더 성공하자.
그렇게 나는 행복에 조건을 두기 시작했다.
바쁘게 생활한 만큼 어느 정도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고, 주위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좋은 기회도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점점 더 나는 불행해졌다. 그것들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또는 행복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일 뿐, 행복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리어의 진전이 더딜수록, 행복에 다가가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것은 고스란히 '불행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마치 내가 나 자신에게 “아직은 행복해질 때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 한 달, 한 해가 지날수록 자연스레 지쳐갔고, 나 자신이 낡아간다고 느꼈다. 마치 낡아버린 내 자동차처럼.
나는 내 차를 2009년에 구입했다. 당시에 사회 초년생 치고는 조금 큰 중형차를 샀었는데, 그 이유는 ‘언제 또 결혼하고 그러면 작은 차로 생활하기 힘들 테니까’라는 이유였다. 그렇게 11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싱글이고 내 차는 낡을 대로 낡았다. 여기저기 녹이 슬었고, 오일이 새고 사이드 미러는 금이 가서 고속도로를 달리면 덜덜덜 떨린다. 한 번은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에 브레이크 피스톤이 터져서 차가 멈추지 않아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항상 난 그냥 고쳐서 쓰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차를 바꿀 때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언제부터였을까. 결승선 없는 달리기를 무작정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번아웃 (burnout)이 오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우울감이라는 가랑비에 옷이 젖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변해버린 스스로의 모습에 혼잣말로 ‘나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왜 점점 이렇게 바뀌어가는 걸까?’라는 말은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우울감이 늘어나면 종종 과거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시기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가 딱히 더 행복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면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아 내가 참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살았구나'.
어느새 차오른 우울감 때문일지, 또는 나이의 무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와 같은 생각들이 내 머리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평생 해본 적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과거의 나와 비교하기 시작한 것.
자존감에 건강하지 못 한 행동 중 하나가 바로 ‘비교’다. 때문에 우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되도록이면 소셜미디어 사용부터 줄이라고 권하는 편이다 "소셜미디어로 뉴스를 보는데요?" "그거로 보지 말고 그냥 뉴스 보세요". 나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은 더더욱 안 좋은 것이 바로 과거에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박탈당했다는 기분, 점점 퇴행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모습에 점점 더 민감해진다. 자신의 모습에 민감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마치 앞서 이야기 한 여드름처럼), 내가 퇴행한다는 느낌을 다른 사람들도 눈치챌까, 두려움이 앞서게 된다.
자존감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문제가 생기는 것은 바로 대인관계다. 사람들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쓰니 불필요하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누군가가 장난스레 한 말도 상처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사람들과의 연락이 점점 줄게 되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외로움. 내가 가진 나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고스란히 외로움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나름대로 이 답답한, 조급한 마음을 일로 풀어내려고 했다. 마음가짐은 좋았다. 하지만 방법이 좋지 못했다. 더 무리해서 일을 했고, 나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친구에게 ‘너 사채 썼냐? 왤케 이렇게 일을 많이 해?”라는 말 까지 들으면서) 적어도 일을 하는 동안에는, 나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근 후의 공허함은 견디기 어려웠다.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만들어낸 나 자신의 수치심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정교하게 감추려고 했던 거니까.
'계기'란 항상 사소한 곳에서 온다고 말한다. 나에게도 실제로 그랬다. 어쩌면 나에게는 결정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다름이 아니라 차가 망가졌다. 엔진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고 차는 덜덜거렸다. 정비소에 가져가니 이것저것 다 고치면 차 값만큼 나올 거라고 말한다. 180000km 달렸으면 그래도 제법 분발한 건가. 결국 차를 새로 바꾸기로 결심을 했다. 나는 원체 차에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있다고 해도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했던 말처럼, 나중에 자리 잡히면 좋은 차 사자,라고 생각했으니까. 차 보러 다니는 것조차 스트레스였던 나에게 친한 동생이 시간 내서 같이 시운전을 다녀줬다. 그래 싼 차 사자, 좋은 차는 '나중에 더 안정되면' 사지 뭐.
“형님, 이거 사면 몇 년 모실 생각이에요?”
나한테 '좋은 차는 아직 필요 없어'라고 혼잣말하는 내가 답답해서였을까. 시운전을 마치고 운전석에 앉아서 고민하는 나에게 옆에 있던 동생이 물었다.
“글쎄, 본전 뽑으려면 10년은 타야지?”
“아니, 형님 10년 뒤면 마흔 후반인데 그때까지 이 차 탈 거예요?”
그 한마디에 확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10년 뒤면 난 쉰을 바라보고 있겠구나. 이내 깨달았다. '아직은 아니야', 하면서 행복을 계속 미루는 습관을 만들었구나. 마치 나에게 좋은 차는 '아직' 이르다며 사는 것을 미루는 것처럼. 물론 차와 행복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내가 '현재의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은연중에 행복에 자격을 두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다. 상담사들끼리 농담 삼아 쓰는 'WeCroak'이라는 앱이 있다. 하루에 몇 번씩 휴대폰에서 “Don’t Forget, You Are Going to Die” (잊지 마, 넌 결국 죽을 거야)라는 알림이 울리는 앱. 그래, 죽고 나면 끝이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배우자도, 가정도, 도시 외곽에 있는 집도 아니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시제의 변화였다. ‘안정이 되고 나면’ 하려고 했던 일들을 지금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 깨달음에는 좋은 새 차와 4년 할부금, 두배 가까이 늘어난 보험비가 덤으로 함께 왔지만, 나는 그냥 미래에 누리려고 미뤄왔던 행복을 조금 일찍 누리기로 했다.
여전히 나는 우울감에서 벗어나는 연습 중이다. '지금', '오늘' 행복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나에게 좀 더 잘해 줄 수 있는 방법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냐고 물어본다면, 아직은 그 대답을 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다만, 조금은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시간적 여유가 아니라 (여전히 참 바쁘다), 마음의 여유 말이다.
사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목표는, 실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목표다. '행복'은 여러 감정의 하나일 뿐,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더 이상 무언가를 치열하게 좇지 않고, 심적인 여유를 찾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의미라면, 행복이라는 감정은 생각만큼 얻기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참 솔직하게 쓰기 어려운 글이었다. 글 중간중간에 차마 꺼내지 못 한 내용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신, 이 글을 쓰면서, 내가 가졌던 사고방식,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작업은 참 신기하다. 때로는 마음에 담아놓은 것들을 글자로 적으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짐을 덜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글을 통해 앞으로 내가 가지고 올 변화를 통해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내면 아이’가 조금은 더 위로받고,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