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티 jaetty Mar 10. 2023

평범한 20대 후반 여자, 그런데 가발을 쓰는 - 3

03 나의 탈모 연대기(1)


중학생 시절, 할머니 집에서 놀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셨다


“어머!! 이리 와봐!!!!”


하고 갑자기 내 머리를 헤집으셨다.

이유는, 내 긴 머리 사이에 땜빵이 났기 때문..

그게 내가 기억하는 탈모의 시작이다.

그 이후로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이 피부과, 저 피부과, 한의원도 다녔다.


벌써 10년 여가 지난 기억이라,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좋은 기억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나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고, 괜찮다고 웃었다.

한참 꾸미는 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나이인 중학생 여학생이, 정말 괜찮았을까?

지금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가서 한번 안아주고 싶다.


원형탈모 부위는 점점 넓어졌고, 많아졌다.

처음에는 뒤통수 쪽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서 머리를 아래로 묶고 다니면 보이지  않았으나 부위는 점점 넓어지고 많아져서 이마 쪽까지 오게 된다.

부위가 애매해서 가발을 쓰기도 이상하고.. 그 당시에는 가발은 생각도 못했다. 그냥 핀으로 대충 꽂고 다녔다.

친구들이 왜 핀을 꼽냐고 물어보면 그냥 멋으로 꼽는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하하하고 웃어넘기는 일.


-

그렇게 시작된 탈모는 고등학교까지 이어졌다. 여러 피부과와 한의원 등을 다니면서도 낫지 않으니 대학병원까지 갔다.

대학병원에서는 스테로이드를 활용한 치료를 했고 머리에 주사를 놨다. 머리에 진물이 항상 가득했다. 이게 부작용이었다고 한다.

병원에선 괜찮다고 했다. 정말? 피가 뚝뚝 떨어지고 노란 딱지가 머리 가득 생기고,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가 따끔따끔한 기분이다.

부작용은 너무 심해졌고 탈모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내 멋대로 치료를 중단해 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학 입시가 끝나고 나니 자연스레 탈모가 번지지 않았고 나는 그냥 머릿속에 땜빵 몇 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예전보다 나아졌으니 좋았지만, 미용실에 갈 때마다 반복되는 대화..

”어머! 여기 땜빵 있어요! 알고 있어요? “ ”네^^“


몇 년 지나고 나선 미용실 의자에 앉자마자 탈모 사실을 밝히기도 했고,

머리는 계속 길렀고 잘 자르러 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긴 머리, 그리고 그 안의 땜빵을 가진 채로 살았다.


-

내 욕심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건 내 욕심이었다.

밤샘이 일상이었고, 학교도 집에서 가깝지 않아서 통학 왕복 3-4시간 정도 걸렸다. 집 위치가 원망스러웠다.

9시 출근, 퇴근 미정.. 대부분 막차를 타고 갔다. 23시쯤 막차를 타고 집에 가면 자정이 훌쩍 넘는다. 그때 바로 씻고 자도 몇 시간이나 잘 수 있나?

근데 잠도 바로 안 왔고 항상 수면 부족, 그때 처음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았다.


일과의 시작은 커피 타기였고, 쓰러져서 잠드는 날이 이어졌다.

다음날 논문 마감이나 발표라도 있으면 자연스레 밤을 새웠다.


내가 나를 이렇게 가혹하게 대했으니.. 뭔가 고장 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리에 항상 갖고 살던 땜빵이 커졌다.

내가 느낄 정도로 커졌다.


이맘때쯤, 머릿결이 안 좋아지는 걸 느꼈다. 머리가 빗질이 되지 않고 뻣뻣해졌다. 그리고 모발이 얇아졌다.

미용실에 가면 갈 때마다 고데기를 그만해라, 펌/염색을 그만해라.. 이런 말을 들었다.

아침에 눈떠서 학교 가기 바쁜데 무슨 고데기..? 펌/염색은 평생 해본 적도 없는데요.. 항상 억울한 상태로 미용실을 나왔다.

이 사실을 부모님한테 말했더니 내가 드라이기를 너무 오래 써서 그런 거란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은 이유도 있단다. 머리도 너무 길어서 그렇단다.

아.. 그때의 나는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손상모 전용 샴푸도 써보고, 빗도 비싼 거로 사보고, 생에 해본 적 없던 트리트먼트도 해보고, 길었던 머리도 좀 잘라보고, 드라이기 사용시간도 최소로 줄여보고.

머리에 신경을 썼다.


그 결과는?

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다. 당연하다. 그건  내가 머리를 막대한 잘못이 아니었던 거다.


-

그런데 하늘이 참 무심하게도, 그때가 대학원 마지막 학기였다. 휴학을 할 수가 없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은 4학기로, 보통 3학기 동안 졸업논문을 쓰고 마지막 1학기에 논문 심사를 한다. 휴학은 거의 할 수 없고(논문 쓰는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휴학을 하더라도 1~2학기때 하지, 3~4학기에 하는 휴학은.. 졸업을 안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 맘대로 쉴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적당한 사유를 대야 했고, 휴가를 쓰는 구조였다.

당장 내게 닥친 상황만으로도 힘든데, 이걸 다른 사람에게 적당히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든 대학원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공과대학이었고, 적어도 우리 연구실은 그랬다.


그래서 하루하루 머리가 몇 움큼씩 빠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밤새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를 감으면 당연히 머리가 빠지고, 머리를 말릴 때, 머리를 빗을 때도 한 움큼씩 머리가 빠졌다.

매일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버텼고, 한 학기만.. 육 개월만 버티면 돼. 그렇게 한 학기를 버텼고. 내 머리는 모두 빠졌다.


사실 모두 빠지기에는 육 개월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두 달 만에 머리의 90% 정도가 빠졌고 나머지 세네 달 동안 10%가 빠졌다.

모자를 쓰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초기 몇 주였다. 가발가게를 알아볼 여유도 없었기에 나는 뭔가 이상한, 누가 봐도 가발 같은 가발을 쓰고 학교에 가야 했다. 진짜 매일 매 순간 울고 싶었고 싫었다.


그 엉성한 가발은 색도 금방 빠져서 검은색이었던 가발이 몇 달 새에 갈색이 되었고, 나는 졸업논문 발표를 위해(단정해야 한다. 정장을 입고 한다.) 검은색 가발을 추가로 구매하였다. 그렇게 내 버티던 시절은 끝이 났다.

졸업 후, 난 제대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완전 민머리가 된 나와, 제본된 졸업논문을 보는데. 참 허탈했다.


-

그 너무 가발 같았던 가발도 100여만 원을 주고 구매했던 게 너무 싫었다. 그저 동네 가발 가게였는데, 그 당시의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서 꾸준히 다녔었는데 나한테 이걸 먹어라 저걸 먹어라, 하다가 결국 조상신의 덕을 안 쌓아서 그렇다고 ㅋㅋㅋㅋ 나한테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다. 예상했다시피, 종교 권유였던 거다.

웃기는 건 그 당시의 내가 흔들렸다는 거다. 무교인 내가.. 제사를 지내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남의 아픔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 다 천벌 받았으면 좋겠다.

길 가다 넘어지기라도 하세요. 제발.


-

근처 피부과에서 혀를 내둘렀던 상태였기에, 전국적으로 탈모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을 찾았다.

세상에나, 온통 광고뿐. 탈모가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광고였겠지.

탈모는 당장의 일상생활이 어려운 질병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광고들뿐이라니. 허탈하고 속상했다.


그렇게 찾고 찾아서, 충청북도 청주의 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게 되었다.

이것도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진료를 원하는 사람이 하도 많다 보니, 원하는 날에 전화를 해서 전화연결이 되면 그때야 몇 달 후 진료를 예약할 수 있는 시스템 ..


난 집이 경기도다. 청주의 병원에 가려면 차를 타고 몇 시간을 가야 했다. 하지만 갔다.

서울 경기도 병원은 어디를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었고, 이미 경기도 대학병원에서 부작용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었고..

한줄기 희망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평범한 20대 후반 여자, 그런데 가발을 쓰는 -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