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해 보여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독일 뮌헨에 6년째 살고 있다. 뮌헨에 도착한 첫해에 독일어 인텐시브 수업을 들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독일어를 잘하고 싶었다. 1개월에 700유로(한화 약 100만 원)에 육박하는 수업을 1년 동안 들었다. 필요한 교재를 사고, 보충 수업을 듣고, 인터넷 강의도 추가로 듣고, 그런 비용까지 더하면 한국 대학 1년 등록금에 준하는 혹은 그보다 훨씬 큰 액수가 나온다. 아마 나처럼 혈혈단신 독일로 넘어와 무작정 독일어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비용이 들었을 거로 생각한다. 이런 경우가 아닐지라도 각자의 상황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테다.
돈이 아까운 적은 없다. 내가 원해서 한 거다. 잘 배운 독일어로 큰 무리 없이 잘 살고 있다. 독일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축구였다. 독일어가 가능해진 덕에 경기장에 가서 선수들의 인터뷰를 알아듣고 내가 원하는 기사를 썼다. 현장감 있는 기사와 영상을 한국에 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저지른 큰 실수가 있다. 저렇게 열심히 배운 독일어를 나의 능력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오직 나만 가능한 독일어 인터뷰를, 그 현장에서 쓴 기사를 헐값에 팔았다. 번역에 대한 비용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도 후회한다. 독일 현지에서 취재하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그런 요구를 했어야 하는데, 내 영향력이 크지는 않아도 조금씩 취재 환경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동안 크고 작은 협업 제안을 많이 받았다. 내게 들어오는 제안은 모두 감사하다. 기꺼이 논의할 의향도 있다. 내가 축구판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 감사하고,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좋다. 그런데 조건을 듣다 보면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간다. 독일어가 가능한, 분데스리가에서 경력이 적지 않은 사람을 고용하면서 내세우는 조건은 어디 가서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어떤 회사들은 내가 NO라고 했을 때 충분히 이해해 줬고, 어떤 회사들은 '그래도 축구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좋은 거 아닌가?'라는 태도를 취했다. 놀랍게도 복수의 회사가 그랬다.
실제로 적지 않은 종사자들이 일명 '열정페이'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말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그렇고, 그 마음을 이용하는 '갑'이 많다. 사비를 써서 '출장'을 가고, 휴가 중에 인터뷰를 해서 회사에 바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내 경우, 발품이 많이 드는 원고에 터무니없이 적은 고료를 부르는 회사도 2, 3군데 있었다. 협상에 성공한 회사는 진행하고, 그렇지 못한 회사는 작업을 함께 할 수 없었다. 하루에 A선수 인터뷰와 B팀의 경기를 둘 다 챙겨야 하는 해외 출장에 보내면서 6인 민박집에 재우려는 엄청난 시도까지. 심지어 내가 시간을 들여 통번역해서 sns에 올린 독일어 인터뷰를 내 이름 박아서 기사로 내도 되냐는 문의도 있었다.
너는 독일어가 되니까, 너는 영어가 되니까, 너는 그 선수랑 친하니까, 너는 뮌헨에 오래 있었으니까...
내가 갖지 못한걸 네가 갖고 있으니, 네가 좀 해줘라. 근데 조건은 겨우 이 정도야. 사실은 그 -독일어와 영어를 못하고, 선수들과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 받는 비용에서 10센트도 올리지 않은 채 내게 건네는 태도.
기분이 나쁜 건 내가 무시당해서가 아니다. 왜 자꾸 축구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이 부분이 화가 난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축구의 현장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글과 그림이 매체를 통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가진 능력을 마음껏 인정받고 취재하고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눈앞의 경기와 선수를 위해 더 최선을 다할 텐데. 지난 몇 년간 유럽 현장에서 오역 기사를 내보내는 경우를 자주 봤다. 한국에서 그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그게 오역인지 진짜인지 알 턱이 없다. 어떤 동료는 10중에 5만 번역한 후 "어차피 사람들 독일어 모르니까"라며 그대로 한국에 보냈다. 해당 인터뷰 주인공이 꽤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순환인 것이다. '헐값'에 현장에 오면 생기는 일. 내 업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일. 물론 그 '헐값'에 진심을 다했던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 이유. 최근 한 팬분의 고민 어린 메시지를 받았다. 독일에 살고 있는 축구팬이고 나를 오랫동안 팔로우하셨던 분이다. 최근 그분이 모 회사에서 현지 통신원 제안을 받았는데 페이가 정말 말도 못 할 만큼 적었다. 기사당 4만원. 무려 김민재와 그의 동료들을 취재하는 현장에 출근을 시키는데 말이다. 경기장에 가고, 현지 언어로 관계자와 소통하고, 장내 해설을 듣고, 경기를 취재하고, 인터뷰를 하고, 다시 퇴근하는 모든 과정을 다 포함해 나온 기사 1개가 4만원이다. 내가 독일에 처음 왔던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가 않다. 그분의 프로필을 보니 독일어가 가능하고, 현지에 살고 있어 적응도 필요 없고, 똑똑하고, 더 큰 대우를 받으며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큰 약점이라면 축구를 너무너무 좋아한다는 것.
능력을 하나라도 더 가진 사람을 원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우를 충분히 해줘야 하지 않나. 통신원의 역할이 아무리 크지 않더라도 말이다. 난 그분에게 이런 대우받기 위해 고생한 거 아니지 않냐고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했다. 아니라고 생각될 땐 안 하는 게 맞다고. 그분을 경기장에서 보게 된다면 반갑겠지만 한편 씁쓸할 거 같다.
지금부터라도 많은 '능력자'들이 자기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축구가 아무리 좋아도 말이다. 축구 공짜로 보는 거 물론 좋지만 축구가 일터가 되는 순간 공짜는 없다. 당신이 이 자리에서 무리 없이 독일어로 선수와 대화할 수 있을 때까지 들인 모든 시간과 노력이 계산되어야 한다. 고작 '그 돈' 받으려고 고생해서 해외에 나와 울음 삼켜가며 버티고 언어를 배우고 현지에 적응한 게 아니지 않나.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곳은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는데 왜 그 밖의 것들은 함께 발전하지 못할까. 축구선수들은 나날이 비싸지는데 그 선수들을 다루는 글값은 왜 쌀까.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어서 그렇다.
내가 배운 독일어에 대한 비용을 대시오! 내가 여기 적응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를 호소하는 게 아니다. 능력자를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 축구를 향한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지 말고.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