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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은 May 27. 2024

독일 회사에서 독일어는 스펙이 아닐까

칭찬을 받고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 

'Guten Tag(구텐탁)'보다 'Hallo(할로)'를 더 많이 쓴다는 사실을 2018년 1월에 처음 배웠다. 1년 후에는 C1 자격증을 따며 독일어가 낯설지 않은 단계까지 올라섰다. 매주 주말 축구 경기 취재를 하며 실전에 몸을 던진 게 큰 도움이 됐다. 독일 지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 교과서 독일어가 아닌 생활 독일어를 배웠다. 하루에 한국어보다 독일어를 더 많이 쓰는 날이 많아지며 독일어로 꿈을 꾸고, 한국 단어보다 독일어 단어가 더 먼저 생각나고,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어도 자연스럽게 독일어로 대답하는 (나는 영어로 대답한다고 생각했던) 일명 '질풍노도의 0개 국어' 시즌도 겪었다.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독일에 살기로 선택한 이상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기에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렇게 벌써 7년 차가 됐다. 한 5년 차까지는 독일인들이 내게 하는 독일어 칭찬이 마냥 좋았다. 언어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정체기가 온다. 어느 단계 이상 올라서지 않는 시기. 그게 5년 차 언저리부터 시작됐다. 그 시기에 독일 회사에 입사했다. 나의 완벽하지 않은 독일어로 이 회사에 입사했다는 사실이 무척 감개무량했다. 클라이언트와 소통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 포지션에 자리한다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이제 나의 독일어 스펙은 - 적어도 하루 8시간 동안 - 사라졌다. 독일 회사에서 독일어는 스펙이나 메리트가 아니라, 당연한 조건이니까. 입사했을 때까지는 나 자신이 대견했는데 이후부터는 왠지 무기를 하나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다른 팀의 한 동료가 유난히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는 중국에서 교환학생을 한 적이 있어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웠고, 한국어 배우기도 버킷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회사 내에서는 아시아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마땅히 없었는데, 한국인 동료가 생긴다는 걸 알고 유난히 기뻐했다고. 생소한 언어 체계를 배우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이해하는 그는 나의 독일어에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뭔가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가 동료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그건 너의 무기야!'라고 말해주니, 싫지 않았다. 


이 회사에 다닌 지 반년이 넘었다. 업무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지는데 독일어에 대한 자신감이 뚝뚝 떨어졌다. 비즈니스 독일어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혼자 독일어와 사투를 벌였다. 챗gpt나 시니어 동료를 활용해 더 나은 문장과 표현을 익히고 쿠션어를 배웠다. 언어에 쏟는 시간이 꽤 되다 보니 왠지 독일어만 더 완벽했으면 가뿐히 해냈을 일도 늘 느리게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썩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독일어를 하는 게 당연한 회사에서 독일어를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양새라니. 나 자신이 무척 부족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 위에서 말한 저 동료와 미팅을 했다. 미팅이 끝난 후 그는 내게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 독일어 진짜 잘하는 거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도 아시아권 언어를 그렇게 잘하고 싶어. 리스펙!"

분명 긍정적인 메시지인데 썩 달갑지 않았다. 업무적인 피드백이 아닌 언어에 대한 피드백. 기분이 좋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미팅 내용은 별로였나? 내 독일어 실력 향상이 더 돋보였나? 생각이 생각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내 태도에 문제가 있단 걸 깨달았다. 저 동료는 반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관적으로 나를 칭찬한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문제였다. 


아무래도 어느 순간부터 '독일어는 스펙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나를 잡아먹은 것 같다. 독일 생활 7년 차라는 백그라운드, 작년보다 오늘 훨씬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이 회사에서 그저 그런 동료가 아닌 돋보이는 동료가 되고 싶다는 욕심 등등이 뒤섞였다. 한편으로는, 자란 곳이 독일인 다른 동료들과 동등하게 시작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니 욕심을 조금 버려야 하나 싶기도 하고.


나의 이 고민을 들은 한 친구는 말했다. 직장 동료의 코멘트이니만큼,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고 받아들이라고. 뭔가 가슴속에 있던 작은 응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 태도의 문제다. 


아마 이 언어에 대한 왔다 갔다 하는 생각은 독일에 사는 내내 떼낼 수 없을 것 같다. 


비즈니스 독일어 수업을 따로 더 들을까 고민 중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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