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직장편: 책상이 없어진 날 (2)

뜻밖의 동아줄

by 싱대디

헤지펀드 업계의 해고는 예고 없이, 마치 새벽 기습처럼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잔혹함의 본질은 ‘지적 재산’에 있다. 회사가 미리 해고를 알리지 않는 건, 누군가가 알고리즘이나 핵심 전략을 몰래 챙겨 나갈 위험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막상 그 순간을 맞이해보니, 내 삶은 단숨에 뒤엉켜버렸다. 당연한거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일 당장의 계획도 준비할 틈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곁엔 가족이 있었고, 내 해고는 곧, 가족 모두의 삶에 직접적인 충격이 되었다.


오전 12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나… 해고당했어.”
2초간의 침묵.
“에이~ 나 놀래키려고 휴가 낸 거지?”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모든 얘기를 듣고 나서 아내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그럼 다음 달 비행기표랑 이사 화물짐 다 취소할까?”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직 없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은 길었고, 내가 생각해둔 목표 리스트의 10%도 채우지 못했다. 미련이 컸고, 지독하고 피곤하겠지만, 면접이야 다시 또 준비하면 된다. 곧바로 책상에 바로 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우선 펜을 들고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아침에 먹은 크레페 한 조각이 다였지만, 배고픔은커녕 속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얼마 있지 못해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 노트북 하나만 달랑 들고 카페로 향했다. 잡 마켓 분위기부터 파악할겸 평소엔 바빠 잘 못 들어가던 링크드인에 접속했다. 그러나 나의 첫 눈에 들어온 건 최근 2개의 메세지였다. 놀랍게도,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몇몇 헤드헌터들이 “혹시 이번 해고 명단에 당신도 있냐, 다른 포지션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고 연락을 해왔다.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팀 외에는 아직 시기상조인데. 세상은 좁고, 업계에는 비밀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하지만 섣불리 어딘가에 지원하고 싶진 않았다. 그 동안 회사 일에 너무 몰입한 탓에, 몸과 마음이 이미 많이 지쳐 있었고 며칠만이라도 숨을 고르고 싶었다. 저녁엔 지인과 밥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피로가 몰려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새벽 6시에 눈이 떠졌다. 알람소리와 함께 화장실로 걸어 갔고 한 10초 정도 멍 때리다가 아참 하며 다시 현실을 느꼈다.

"아 맞다 나 해고 당했지"

그러고선 다시 침대에 몸을 누웠다. 잠시 눈을 붙인 줄 알았지만 눈을 떴을 땐 몇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습관처럼 회사 이메일을 들어갔다. 계정은 당일날 해고 통보를 받은 회의실에서 나온 순간 다 없어졌었다. 슬랙, 구글 이메일 등 전부 없어지고 나니 허전했다.


개인 이메일을 확인하던 중, 한 통의 메일이 눈에 띄었다. 회사로부터 메일이 한통 와있는 것이다. 런던 보스가 다음주에 미팅을 하자고 한다. 싱가포르 보스가 해고 되었으니 다음 보스는 런던이고 그 위에는 뉴욕이다. 그렇다보니 내 경업금지와 퇴사 관련 협상을 런던 보스와 해야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미팅 시간을 잡았고 이왕 이렇게 기회가 온김에 겸사겸사 묻고 싶었던 질문들도 쏟아낼 생각이었다.


며칠 뒤, 다시 회사 건물로 향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젠 직원이 아니기에, 건물 출입구부터 게스트 카드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익숙한 듯 낯선 사무실에서도 출입이 막혔기에 앞에서 대기 했다. 곧이어 회의실로 안내를 받았고 머지않아 런던 보스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직접 대면한 건 처음이었다. 매번 줌으로만 미팅을 할 뿐 런던 출장을 아직 가본적이 없기에 볼 기회가 없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보스는 팀 내에서 내려진 결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더니,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한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다시 오퍼를 주고 싶습니다. 팀으로 돌아와달라"였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해고된 지 며칠 만에 복귀 제안을 받다니,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현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트레이더가 필요했고, 내부 회의 끝에 나를 포함한 세 명에게 다시 오퍼를 주기로 했다고 한다. 나머지 두 명이 누군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그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이 의아했다. 해고된 열 명이 넘는 트레이더들 중 대부분은 나보다 경력도 많고, 실력 면에서도 손색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오퍼를 받았을 때, 단순히 기뻐서 받아들이기보다는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맴돌았다.

“왜 저인가요?”

보스는 내 퍼포먼스가 좋았고, 팀원들로부터 피드백도 가장 좋았다고 답했다. 내심, 혹시 내가 거절할까 봐 더 좋은 포장을 얹어주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번 대량 해고로 내 역할도, 책임도 두 배로 늘어날 것이었다.

어쨌든, 뜻밖에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겼고,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오퍼를 거절한다면, 내 앞에 놓일 건 다시 시작해야 할 수많은 면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지치는 일이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바로 수락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며칠만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머릿속은 다시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다. 언제든 또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 내가 진행하던 프로젝트들의 방향성 변화, 그리고 익숙한 동료들이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한 건 “이렇게 어렵게 들어온 회사를, 조금 더 버텨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었다. 더구나 가족들도 이제 막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안정을 찾기 시작한 참이었기에, 또다시 대이동을 감행하긴 쉽지 않았다.


며칠의 고민 끝에, 오퍼를 수락한다고 답했다. 그렇게 해고 당한 날로부터 일주일 뒤, 다시 회사 출입 카드를 발급받고, 익숙한 듯 낯선 사무실로 출근했다. 개발자 동료들이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은 마치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했다.


내 책상 앞, 옆, 뒤가 모두 비어있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문득 예전에 한 동료가

“나는 출근할 때마다 고개 빼꼼 내밀고, 내 책상이 아직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있어.” 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젠, 그 농담이 더 이상 남 얘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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