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지? 너 해고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늘 그렇듯 아침의 가장 바쁜 시간대가 지나면서 팀원들이 하나둘 라운지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날은 오랜만에 크레프 출장팀이 왔다. 오피스 전체에 버터로 반죽 구운 냄새가 퍼졌다. 여러 가지 맛이 있었지만, 건강 같은 건 일단 다음 생에 신경 쓰기로 한 나는 누텔라 크레페를 주문했다. 보스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시계를 보더니 급한 미팅이 잡혔다며 돌아왔을 때도 크레페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고 황급히 자리로 갔다. 그렇게 크레페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웠고, 두번째를 주문하려던 참이었다. 그 때, CTO가 라운지에 들어와 말했다.
"우리 팀 전원, 회의실로 모이죠. 지금요."
출근 이래로 그런 적이 없었지만 모두들 별 대수롭지 않게 갔다.
우리 팀은 회사에서 가장 큰 팀이었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니, 다른 팀 직원들도 힐끔힐끔 쳐다봤다. CTO는 인원이 너무 많다며 한명한명씩 두 회의실 중 하나로 나눠 앉혔다.
앉고 나서 팀원들을 보니, 이 방엔 전부 트레이더 및 퀀트였고, 다른 방엔 전부 개발자였다. 오는 길에 런던에서 날라온 보스도 보였다. 연말이기도 하고 이번주에 마리나베이에서 파티도 있어서 여러 지사에서 날아오는 시기이다. 그래서 그저 연례 보고인가보다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다.
우리는 나란히, 조용히,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긴장감 속에 앉았다. 몇 분 후, CTO가 들어왔다.
손에 작고 얇은 종이 한 장. 입을 떼려다 망설이던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지금 이 방에 계신 분들은…
현 시점부터 전원 해고입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회의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곧바로 기다렸듯이 인사팀장이 들어와 법적 절차와 퇴사 안내를 읊었지만, 아무 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우리 팀이지? 해고? 왜? 도대체 왜?
그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이해하려고 계속 생각 했지만 물음표만 남았다.
우리 팀은 역사가 오래된 팀이다. 보스는 이 회사에서 10년이 넘게 이 회사를 버텨낸 인물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실력자임이 업계에선 입증이 되어있다. 보통 이런 대량 해고는 적자를 면치 못할 때나 일어나지만, 우리는 오히려 최근까지도 신입을 뽑고, 인터뷰를 진행하며, 심지어 지금껏 내가 다녔던 회사들 중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돈을 잘 벌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럼 도대체 뭐 때문이지?
그러던 중 옆에서 한 트레이더가 질문을 했다. "저기 방에 있는 개발자들도 다 해고인가요?"
CTO는 애매하게 대답을 했다. 나는 아니라고 해석을 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보스는… 이 자리에 없네?”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가 동시에 깨달았다. 아, 보스를 제외한 전원 해고였구나.
묘한 납득과 씁쓸한 체념이 퍼졌다. 구조조정..
각자 자리로 돌아가 짐을 챙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무심코 후드, 펜, 공책 차례로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인사팀장이 “공책은 두고 가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작은 것 하나까지 통제당하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일했던 공간이, 이제는 감정의 공동묘지 같았다.
난 짐이 별로 없어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는데, 출입카드는 이미 회수당했고, 모두가 짐을 챙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모두가 짐을 다 챙겼을 때 기차놀이하듯 인사팀장을 따라 한 줄로 출입문을 나섰다. 한 명씩 카드를 찍어주며 문을 열어주고,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필 그날 라운지 한쪽에선 넷플릭스 행사 때문인지 분장을 한 캐릭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커피라도 마시죠.” 한 트레이더가 제안했다.
모두가 아무 말 없이 따라갔다. 이 업계에선 해고가 일상이라고들 하지만 다들 내 예상보다 빠른 시간 안에 받아들이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해고는 모두를 복잡하게 했다. 호주에서 온 친구는 아이 학교부터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한달 전에 들어온 신입은 심지어 어제 막 집 계약을 해서 어떻게 취소해야하는지 등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카페에 앉아 처음으로 휴대폰을 켰다. Whatsapp에 보스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했다. 지금까지 너희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두번째 충격이었다. 모두가 보스는 살아남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였다. 보스는 우리보다 먼저, 혼자서 해고된 것이었다. 감정이 격해질까봐, 아침에 보스를 먼저 해고하고 나머지 열명이 넘는 팀원들을 차례로 불러 해고한 것이었다.
또 다시 무한 반복의 "왜?" 라는 의문이 들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개발자들 만으로는 시스템 유지가 불가하다. 트레이더들을 전부 이렇게 한번에 해고하면 모델들은 돌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리스크 관리는 더더욱 힘들다. 그렇다고 돈을 잘 벌고 있는 이 모델들을 중단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시스템을 제일 잘 아는 보스는 살아남았을거라 모두 자연스레 생각한 것이다.
머리가 꽤나 복잡했다. 멍 때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빠르게 이전에 연락이 닿았던 다른 경쟁사 채용 공고를 뒤지고 지인들에게 연락해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틀 전 롱디를 끝내고 와이프가 일을 그만두고 딸과 함께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다음 달 이사를 앞두고 사전답사 겸 왔던 참이었다. 어떻게 얘기를 할지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