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직장편: 낯선 첫 출근

킥보드 타고 등장한 보스

by 싱대디

드디어 싱가포르로 비행기를 타고 날라왔다. 서류를 넣은 시점으로부터 약 9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여행조차 와본 적 없는 나라였기에, 공기부터 낯설게 느껴졌다.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푸근하게 생긴 중년의 아저씨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웰컴 투 싱가포르, 미스터 킴!”

차에 올라 창밖을 보니 고층빌딩 사이로 야자수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이국적인 풍경이 마치 여행 온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회사에서 Ascott Raffles Hotel이라는 5성급 호텔을 한 달간 제공해주었다. 건물 외관은 다소 낡았지만 내부는 꽤 넓어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출근은 2주 뒤였지만, 집을 구하고 동네를 익힐 겸 미리 들어왔다. 입사 후 3개월동안 수습 기간(Probation)이라는 또 다른 크나큰 관문이 있었고 이 기간을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짐을 싸야 한다. 그래서 우선은 와이프와 딸은 일단 한국에 남기로 했다. 내가 먼저 ‘살아남는지’ 확인한 뒤에야 가족을 부르기로 했다.


날씨는 의외로 괜찮았다. 적도 근처라고 하여 숨막히게 더울 줄 알았지만, 밤이 되면 바람도 불고 은근히 선선했다. 문제는 음식이었다. 호텔 조식은 며칠 만에 질렸고, 정체 모를 향신료 범벅의 현지 음식들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어느새 따끈한 돼지국밥이 간절해졌다.


그렇게 2주 동안 살 집 주변도 탐험하고, 틈틈이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새 출근날이 다가왔다. 회사는 마리나원이라는 건물이었고 메타, 넷플릭스 등 낯이 익은 회사들이 같이 위치해 있었다. 컨시어지에서 출입 카드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갑자기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팀 자리로 안내받아 들어가니, 가장 먼저 CTO가 반갑게 인사했다. 어려운 프랑스식 억양으로 “Good Morning!”을 외치는 그의 모습에 그제야 "아, 진짜 시작됐구나"라는 감정이 다시금 밀려왔다. 면접에서만 봤던 얼굴을 실제로 마주하니, 현실감이 묘하게 밀려왔다. 팀원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나눴지만, 모두 트레이딩에 몰두해 있어 짧은 인사만 주고받고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사무실엔 키보드 소리만이 가득했고,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 킥보드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륵-

모니터에 가려 머리만 보이던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19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정말 잘생긴 프랑스인이 킥보드를 타고 나타났다. 바로 우리 팀의 보스였다.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등장한 그의 모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굿모닝!”
보스는 밝게 인사하곤, 급히 자리에 앉아 30분가량 일에 몰두했다가 여유가 생기자 아침 먹으러 가자고 손짓했다. 라운지에는 간단한 조식이 마련돼 있었다. 보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팀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의자가 있었지만 아무도 앉지 않고 전부 서서 커피를 마시고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다. 나는 앉고 싶었지만 혼자 앉는 건 어색해, 어쩔 수 없이 따라 섰다. 돌아보면 그 이후로도 서서 아침을 먹었던 날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그제야 한 명씩 다가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스몰 토크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영어만 쓰다 보니 귀가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몇몇 얘기는 대충 흘려듣고, 리액션이라도 열심히 하려고 애썼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열 명 넘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 긴장감은 면접 때보다 더했다.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지?’ 평소라면 유머도 던지고, 여유롭게 농담도 했을 텐데 영어라는 단 하나의 차이만으로 입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출근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이미 기가 다 빠진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인사팀, 컴플라이언스팀 등과의 미팅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 우리 팀은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아시아 주요 시장을 모두 커버하다 보니 호주에서 시작해 인도 시장까지 마무리한다. 노예 근성이 있는 나는 10시간 넘는 근무는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유독 힘들었다.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샤워를 하고, 맥주 한 캔을 들이킨 뒤 머리를 대자말자 3초 만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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