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속 작은 프랑스
내가 일하는 회사는 미국계 헤지펀드다. 전 세계에 20개가 넘는 지사가 있지만, 전 직원은 1,000명 남짓. 트레이더들은 국적도 다양하다. 한국인은 7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내가 속한 팀은 조금 특별하다. 약 120명의 팀원 중 90% 이상이 프랑스인이다. 120명 가까운 팀원 중, 100명이 넘는 프렌치라니. 그들과 함께한 몇 년간 나는 자연스레 "프랑스인과 일하는 법"에 꽤 능숙해졌다.
오늘은 그들만의 회식 문화, 아니 비(非)회식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헤지펀드 회식이라고 하면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를 떠올린다. 돈을 많이 번 날에는 샴페인과 파티, 광란의 밤이 펼쳐질 것 같다는 환상. 실제로 세일즈 쪽이나 투자은행(IB) 쪽에서는 그런 문화가 조금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가끔 골드만삭스나 JP모건 직원들이 우리 회사에 놀러 와 술자리를 가질 때 보면, 확실히 더 잘 마시고 파티 분위기도 잘 즐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몸담은 이곳 헤지펀드는 그런 환상과는 180도 다른 세상이다.
우선 한국식 ‘회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정기적인 회식은커녕, 대부분의 식사는 누군가가 다른 지사에서 출장을 왔거나, 새로운 사람이 팀에 합류했을 때 조심스레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건, 회식이라기보다는 그냥 “같이 밥 먹는 자리”에 더 가깝다. 신기하게도, 팀의 수익률과 회식 빈도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돈을 많이 번 날에도 그냥 사무실에서 조용히 샴페인 한 병을 따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곧바로 회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첫번째 프렌치의 회식 문화로는 무조건 와인, 와인 그리고 또 와인. 술 = 와인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내가 느낀 바로는 맥주는 약간 편의점 느낌이라 공식적인 자리에선 잘 안 마신다. 회식 열번 중 아홉 번은 와인을 마시러 가고 특히나 그냥 마시는 것이 아닌 항상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함께한다. 와인을 시킬 때도 라벨을 떼어내거나 병을 손수건으로 감싸서 가져온다. 모두가 눈을 감고 향을 맡고, 한 모금 머금은 뒤, 음미하며 품종을 맞춘다. 그들만의 리그에 나는 늘 소외된다. 레드랑 화이트밖에 모르는 내가 낄 틈은 없다. ‘이번엔 와인 좀 공부해봐야지’ 하고 to-do 리스트에 써놓지만, 항상 숙성만 되고 끝난다. 그래서 가끔 장난삼아 “어디 품종일까요?” 하고 물어보면,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스팅을 하는 와중에 나는 “South Korea, Busan”이라고 답해서 분위기를 깨곤 한다.
그리고 매번 회식에서 느끼는 공통된 감정—배고픔이다. 프랑스인들에게 음식은 "먹는 것"보다는 "맛보는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밥류 보다도 치즈, 햄, 올리브 등의 핑거푸드가 더 많다. 심지어 와인과 항상 페어링을 해서 생각하다보니 매번 따끈한 돼지국밥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 특징은 자유로운 분위기. 프랑스인들은 ‘평등’이라는 개념을 유독 중요하게 여긴다. 아마 프랑스 혁명 이후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치관이 아닐까.
그 영향읹, 일도 회식도 수직적이지 않고, 매우 수평적이다. 술을 권하거나 회식을 강요하는 일? 말도 안 된다. 예전에 높은 직급의 분들이 출장 오셨을 때, 한 동료가 "오늘 딸 아이랑 자전거 타기로 했어"라며 당당히 말하고 회식을 빠지는 걸 보고 그리고 또 이를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그 모습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아직 한국인의 피가 흘러 그런지 왠만하면 참석하려고 하며 아직도 가끔 와인을 마실 때도 등을 옆으로 돌려 마신다.
매번 회식 때마다 생각하는 나의 작은 야망이 있다. 이 프랑스인들 전부 삼겹살집에 데려가서 "소맥"의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다. 불판 위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 고소한 김치찌개 한 냄비, 그리고 1:1 비율의 소맥. 이것만큼 낭만 있는게 없다. 그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눈을 감고 향을 맡을까? 혀끝에서 굴리며 분석할까? 아니면 이미 소맥을 직접 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