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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직장편: 헤지펀드 퀀트의 하루

알고리즘과 루틴 사이에서

by 싱대디

내 공식 직함은 Quant Trader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직군이다. 아직도 부모님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시고, 친구들은 “금융 쪽에서 일한다는데, 명쾌히 설명하지 못하면 보통 사기꾼이더라"며 농담을 하곤 한다. 정작 나도 반박을 하진 않으니 그 연장선일수도..
나는 헤지펀드와 프랍 트레이딩 펌에서 초단타와 예측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운용한다. 회사마다 분위기와 일상이 다르겠지만, 내 하루는 꽤나 루틴에 박혀 있다.


오전 6시

보통 새벽 6시에 눈을 뜬다. 해가 뜨기 전, 도시 전체가 유령처럼 잠든 이 시간. 가족들은 모두 꿈나라에 있고,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이 고요함이 묘하게 중독적이다. 대충 씼고 책상에 앉는다. 보통은 공부를 한다. 회사의 일과 내 성장이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내 나름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오전 7시 30분

출근. 비싼 월세를 감수하고서라도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게 내게는 큰 효용이다. 도보 10분 거리. 나에게 있어 지각은 선택권이 없다. 지각은 곧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나의 에러를 놓치면, 단순한 실수가 수억, 아니 수십억 단위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지각은 지난 1년 넘는 시간 동안 딱 한 번 있었다.

아이폰 알람이 작동하지 않던 날. 일어나 보니 이미 8시 30분이었고,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수북했다.

그날의 심장 박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전 8시

가장 먼저 호주 주식장이 열린다. 이후 아시아 각국의 시장이 줄줄이 개장한다. 보통 장이 열리는 초반 1~2시간은 거래량도 많고 변동성도 커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몰입되는 시간이다.


오전 9시 30분

바쁜 일이 한풀 꺾이면 라운지로 향한다. 내 자리는 라운지랑 가까워서 냄새가 솔솔 올라오면 배가 먼저 반응할 때도 있다. 바쁜 날엔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로 때우지만, 가능하면 라운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먹으려고 한다.


오전 10시

다시 자리에 앉아 트레이딩에 집중한다. 장 변동성이 크지 않으면 알고리즘 개발에 몰입한다.


오후 12시

점심시간. 밖에서 먹는 일은 손에 꼽는다. 클라이언트가 방문했거나 미리 약속이 잡힌 경우 외엔 대부분 배달로 해결한다. 바쁜 날엔 자리에서 먹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라운지에서 식사한다. 이전 회사에서는 점심에 잠시 나가 바람 쐬고 커피 한 잔 사서 산책하는 게 큰 낙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별로 없다.

정말 피곤한 날엔 건물 내 라운지 소파에서 눈을 붙인다.


오후 1시 -

각국 시장이 차례로 마감되는 시간. 아침처럼 이 시간도 매우 중요하다. 자리를 뜨기 어렵다. 심지어 대부분의 미팅도 이 시간대에 몰려 있어 미팅을 하다가도 자주 중간에 나가곤 한다. 퇴근 시간 근처엔 시차로 인해 런던이나 뉴욕 오피스와 미팅을 한다. 미팅이 많은 날엔 기가 두배로 빨려있다.


오후 6시 30분

오늘의 수익률, 리스크 상황 등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주니어 시절엔 수익이 나면 기분이 좋고, 손실 나면 하루가 망가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 기복은 조금씩 줄었고, 이젠 조금 더 멀리 길게 보는 법을 자연스레 몸이 익혔다. 왠만한 스트레스에도 차분함을 유지하는 스킬이 생긴 것 같다.


오후 7시

퇴근.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일과 가정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한때는 집에서도 계속 장을 보고 새벽까지 일하곤 했다. 지나고보니 잃은 게 많았다. 가장 큰 건 가정에 소홀해지는 당연한 결과였다. 외국계 기업에 와보니, 외국인 동료들은 ‘일은 일, 삶은 삶’이라는 선을 정말 잘 그린다. 그리고도 일은 여전히 훌륭하게 해낸다. 나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선택과 집중. 그걸 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오후 10시

딸이 잠든 뒤, 내게 다시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두 시간이 찾아온다.

요즘은 맥주 한 캔을 마시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쇼츠를 보다 보면 시간이 훅 지나간다. 중독성이 너무 강해 다시 절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무튼 그러다 어느새 눈이 감긴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고, 알람 소리에 다시 내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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